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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틀림없이 갔다.
모든 것을 걸고라도 확언컨대 장준하가 대통령이었다면 그분도 어김없이 그 위험천만한 곳에 갔을 것이다.
 
왜정 말기 조선놈들 목숨으로 방패를 삼으려던 왜놈들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간 장준하는 중국에서 결사적인 탈출을 감행하여 거친 황야에서 돌베개를 베면서도 마침내 광복군을 찾아간다.
광복군으로 조국 진공을 준비하던 중 맞이한 때 이른 통탄의 해방 후 귀국한 장준하 앞에 펼쳐지는 조국은, 왜놈들 앞잡이 하던 수괴 박정희가 왜놈식 스탈린식 폭력적 압축성장으로 기층민중을 희생시켜 극소수 윗대가리부터 배불리고 쓰레기 같은 찌꺼기가 남으면,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의 수백 수천분의 일조차 마치 은혜라도 베풀 듯 희생자들에게 던져주는 곳이었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왜놈이 가니 그 왜놈의 떨거지가 수괴가 되어 다시 민중을 뜯어먹는 꼴이라니.
 
그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너무나도 정의롭고 옳은 것이었다.
옥중에서 출마한 그를 민중들은 국회로 밀어 넣었고 그는 국방위원회에 들어갔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나라에서 제일 힘센 놈이 누구겠는가.
그 나라의 의원이란 또 얼마나 약한 것인가.
 
그러나 그 기세등등하고 국회의원 알기를 개똥으로도 여기지 않던 군부의 장성들도 장준하에게만은 꼼짝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였을까.
 
그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왜놈들에 질식당해 꼼짝못하던 그때, 그는 이미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광복군의 자랑스런 군인이었고 왜군에서 군인질이라도 하여 먹고살려던 자기 선배들과는 전혀 다른 존개감이 압도해오는,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참된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군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사업을 위해 국방 예산을 깎으려 들 때 장준하 의원은 오히려 국방비 예산 증액을 주장했다.
나라가 있고서야 지역이 있고 나라가 있으려면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정치에 물들어 썪어빠진 정치군인의 마음에까지 울렸기에 그들은 기꺼이 장준하 의원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그런 장준하도 월남 파병을 반대했다. 극렬히 반대했다.
그럴 수밖에.
그 더러운 미제의 전쟁에 어찌하여 우리 청년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얻어지는 몇 푼돈으로 조국의 이념이 훼손되어 당연하단 말인가.
 
그러나 파병이 의결되고 실제로 파병이 이루어지자 장준하는 자기부터 아들을 월남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들이 부상하여 돌아오자 아들이 누워 있는 병실을 찾아와 보고는 아무 말없이 나가버렸다.
옥중에 갇힌 장준하를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한개씩 나누어 주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그의 아내는 그것이 그렇게도 야속했단다. 아마 전사라도 했으면 기뻐했을 사람이련가 했을지도 모르겠다.
 
장준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당한 파병에는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일단 그것이 결정된 다음에는 자기부터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이다.
그런 분이 대통령이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히틀러의 침략보다 더 역겨운 미제의 침략 전쟁에 어거지로 쑤셔넣은 우리 청년들에 어떻게라도 힘을 주고 격려해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맑은 눈동자를 대하고 돌아오는 길에 느낄 그 쓰라림과 묵직함을 예견했다 하여도 그는 갔을 것이다.
 
대통령께서 자이툰 부대를 방문한 것에 대하여 자칭 진보라는 것들이 싸질러대는 더러운 정론(正論)은 나를 역겹게 한다. 이라크 전쟁이 부도덕하고 그래서 노무현이 학살 도우미라는 그들 주장이 비록 옳다 하여도, 나는 그 옳음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순간 이미 한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지 진보만의, 개혁만의 대통령이 아닌 것이다. 수많은 생령들이 바라보고 있는 대통령이고 그들이 자기를 개구리로 부르건 말건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의 대통령으로 국가의 명운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으로 그분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오고 있다.
 
젊은 병사를 껴안은 국군 최고통수권자의 환한 얼굴 뒤편에서 나는 조국을 위하여 흘리는 맑은 눈물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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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많은 것을 발명했고 개발했다. 그런데 인류가 발명하고 개발한 것 중에 인간에게 진짜 행복을 더해준 게 뭘까. 많은 발명들이 인간에게 행복 더해준 게 있으면 또 그만한 위험과 부담을 안겨줬다. 지금은 생태계 파괴라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세계 문명을 누가 주도했느냐고 했을 때 에게해에서 지중해로,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그리고 미국을 넘어서 태평양으로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주도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른 거다. 물질 풍요와 힘에 의해 남을 지배할 수 있던 힘이 어디에 있었냐는 것이죠. 태평양 건너 이제 한반도에서 때가 온다고 얘기하고 있다. 저는 그 기준을 좀 다르게 생각했다. 역사에서 인류가 발명한 가장 훌륭했던 게 저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 왜냐하면 그 많은 것 중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하고 수탈하는 관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인간이 부닥쳐 있는 문제 가운데 오늘날은 생태계 문제가 새롭게 대두하고 있지만 적어도 환경과 생태계 문제가 대두하기 전까지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 문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다. 모든 불행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거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근본적으로 신분제 질서의 사회에서 적어도 명분으로라도 실질적으로 그 당시 제3계급이라는 것이, 진정한 인간평등을 실현할 의지가 있었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적어도 인류역사상 명분에 있어서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고 성공했던 혁명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충분히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충분히 다 성취하지 않지만 어떻든 우리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발명이 필요하다. 지금 세계질서 속에서 강대국과 약소국 있고 힘의 질서가 지배하고 아직도 곳곳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해결할만한 국제적인 역량은 부족하다. 이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국가 간 질서에서 정복과 지배의 질서, 요즘에는 간섭을 통한 간접적 지배의 질서, 이 질서가 해소되고 여기에도 상호 존중과 협력에 의한 공존의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앞으로 인간이 또 뭘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결국 국가 간의 힘겨루기, 그것이 지난 세기에 엄청난 세계적인 전쟁들을 가져왔고 인간을 불행으로 몰고 갔으나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면 성공의 사례는 역시 EU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EU가 완벽하게 성공하면 그게 새로운 세계질서로, 전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을 것 아닌가. 또 긴 세월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다. 만일 EU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음에 우리에게 닥쳐올, 우리 후손들이 부딪혀야 할 역사가 어떤 것일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 과학기술 문명을 인간의 평화 공존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소위 도덕적 통제력이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EU를 굉장히 의미 있게 보고 있고, 제 개인적으로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우리도 저리로 가자고 국민들에게도, 이웃나라에게도 말하고 있다. 전 이번 유럽방문을 계기로 꼭 확인하고 싶은 게 EU의 미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에도 한번 실현해보는 거다. 아마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국민들 마음속에 이를 희망으로 담으면 그것은 실현될 거다. 오늘날 아무리 큰 소리 치는 정치인도 국민들이 싫어하는 일 못한다. 결국 국민들 원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세상을 바꾸려면 위대한 지도자 한사람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국민들 마음속에 새로운 시대를 향한 올바른 생각이 자리잡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파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런 다짐을 하고 싶고, 이곳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파리를 방문해서 여러분에게 방문목적과 하고 갈 일 등 몇 가지 보고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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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자유주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 개념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말 그대로 상당히 자유롭게 쓰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공신이자 지금도 최전방에서 앞장서고 있는 유시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칭하고 있다. 그리고 민노당이나 시민단체 등 이른바 짝퉁 좌파가 아닌 진짜 명품 좌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하여 자유주의자라고 공격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가 하는 사람 중에는 유시민과 정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재벌을 옹호하고 박정희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자유기업원 공병호 원장도 자칭 자유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여기에 옛날에는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은 노무현 정권의 좌파 정책에 치를 떨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시는 보수 세력들의 모습을 보면, 자유주의에 대한 개념 정리는 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개념적 혼란에 또 한 다리를 걸친 것이 바로 조선과 동아의 환호를 받으며 New Right운동을 표방한 ‘자유주의 연대’이다. 이념적 좌표는 불확실하지만 정치적 스탠스에 있어서 ‘자유주의 연대’의 위치는 확실하다. 현실 정치의 좌표에서 분명히 反盧 진영에 속한다는 것이다. 본인들이 이러한 단순한 스펙트럼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참여정부를 수구 좌파로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 反盧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자유주의, 그리고 反盧의 길을 걷고 있는 ‘자유주의 연대’도 자유주의?




일반 보수 세력에게 자유주의는 상당히 유용하고도 매력적인 개념이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인지해야 한다. 그들은 늘 6.25때 북한 괴뢰로부터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열심히 싸웠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현재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해서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북한의 남침위협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보수 세력에게 자유주의는 반공주의의 동일한 용어이다.




2001년 당시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로 정치권이 시끄러웠을 때, 이회창은 “당신의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견해를 발표할 자유만은 옹호한다” 18세기 사상가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였다. 알다시피 볼테르는 18세기 계몽사상가로 굳이 이념으로 분류하자면 고전적 자유주의자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볼테르의 이 말이 이회창과 같은 보수 세력뿐만 아니라 진보 세력도 역시 즐겨 사용하는 명언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바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때 우리는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유주의적 질서 회복을 외치고 있다.




이쯤 되면 자유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이현령비현령, 즉 진보나 보수 어디에 걸어도 알맞을 멋진 치장용 보석이 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고려대학교정치외교학과에 박사학위를 받은 이나미는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현재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진보, 보수 양 진영으로부터 모두 환영받는 기이한 현상까지 나타내고 있다”고 표현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처럼 지고지순한 이념이기 때문에 진보나 보수 양측으로부터 환영받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진짜 명품 진보 혹은 좌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보고 자유주의자라고 비난을 하는 것을 보면, 좌파와 우파로부터 환영받는 민주주의와 같은 반열의 위치를 자유주의란 이념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이러한 혼란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이나미는 공병호를 영어 공용화론을 주장한 복거일과 함께 ‘확실한’ 자유주의자로 분류하였고, ‘진정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유시민과 진중권에게 ‘불확실한’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했다. 굳이 따지자면 이나미는 명품 진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비슷한 유시민과 진중권에게 ‘불확실’의 타이틀을 붙이고, 반대편에 있는 공병호와 복거일에게 ‘확실’이란 타이틀을 붙인 것이다.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비판받아야 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는 경우는 자신의 재산권이 위협받을 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억압당하던 시절에는 모두 침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물론 유시민은 공병호와 복거일 등을 비판하며 ‘진정한’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유주의는 분할될 수 없으며 “공병호씨의 주장을 들으면서, 이러한 주장이 자유주의라고 통용되는 사회라면 내가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시 긍정적 자유주의이다.




‘확실한’ 자유주의건 ‘불확실한’ 자유주의건 아니면 ‘진정한’ 자유주의건 이것을 구분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할 책이 많고 그 정도의 지식이 나에겐 아직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현 시점에서 왜 자유주의인가의 문제이다. 그것도 보수 진영에서 별로 기존의 수구 세력과 차이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New Right라는 명명을 통해서 마치 하늘 아래 새 것이 나온 마냥 헛갈리게 하는 최대 무기로 자유주의를 들고 나오느냐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는 한 보수적 정치학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자기 변신의 차원에서 자유주의와의 연계는 보수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사료된다. 양자 사이의 유기적인 연계가 실현될 경우 한국 보수주의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생명력 있고 의미 있는 이데올로기로서 순환의 현상에 스스로를 적응할 수 있는 건강한 보수주의로 살아나 갈 수 있으리라고 전망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설프지만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보수주의 세력이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당시에 발표된 글이다. 보수주의는 자신들이 존재가치를 안티의 논리로만 세워왔다. 즉 북한공산집단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약발을 써먹기 어려운 시점에 그들은 자유주의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주의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절대적으로 소중하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 시민사상으로, 억압적이고 차별적이었던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계급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근대시민사회를 건설한 근대 시민들의 건강한 이념”이다. 이 정도라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비견해도 절대 손색이 없는 지고지순한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을 자기들 세력의 모토로 삼고자하는 욕심은 마치 예쁜 다이아몬드를 갖고 싶어 하는 중산층 여성의 마음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3번 부인하고 도망간 베드로에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말처럼, New Right운동을 하는 ‘자유주의 연대’에게 묻고 싶다. 많은 이들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을 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자유주의 연대’는 자유주의의 근간은 법치주의이고 입헌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열린우리당 의원이 앞장서서 사법 쿠데타라고 주장하는 것을 예로 들며 현 정부를 좌파 정부로 몰아붙이고 있다. 미안하지만, 헌법 질서에 의해 수립된 대통령을 보수 세력이 전복하기 위해 위헌적 탄핵을 실시하고 이것이 기각 판결이 났을 때 헌재의 판결에 수구 세력들이 불복하려고 할 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자유주의 연대’는 답을 준비해 놓고 있다. 그들은 Old Right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러한 ‘수구 우파에도 반대하면서 수구 좌파인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자 이쯤에서 이 정도의 세력들을 대변할 만한 정치적 스탠스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가끔 한나라당 내에서도 개혁세력에게 약간의 박수(?)를 받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다. 원희룡, 고진화 같은 사람 정도가 그들이다. 가끔 김문수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수구 우파로 확실히 자리잡은지 옛날인 사람이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지만, 완벽한 기회주의자들이다. 난 원희룡이나 고진화보다 차라리 김용갑이 좋다. 김용갑은 솔직하며 확신범이다. 그에 비하여 원희룡이나 고진화는 ‘불확실한’ 개혁론자인 동시에 ‘확실한’ 수구 세력인 한나라당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수구세력의 품에 안기면서 가끔 개혁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며 수구세력의 장신구 역할을 하고 있다.




고진화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몇 년 후에 하자는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다음에 하겠다는 말은 안 하겠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 국가보안법이 처음 도입될 때 이를 두고 한시법이라고 한 것은 이것을 도입한 수구세력 그들 자신이다. 그것이 50년을 넘게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유주의를 통해 바라본 ‘자유주의 연대’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들은 완벽한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 속에는 시민운동가 경력을 내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참 내가 맘에 안 들게 자신들의 허명을 위하여 운동하는 것이 티가 너무 난 사람들도 있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권력을 탐하던 사람들도 보인다. 하여간 모두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다.




주사파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전향서를 쓴 사람이 주사파를 만들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은 북한에서 넘어와 조갑제와 꿍짝이 잘 맞고 있다. 가만 보면 학창 시절에 어설프게 주체사상 책 읽고 설쳐대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전향했는데, 우리 보고는 아직 전향 안했다고 개혁세력을 향하여 색깔론의 화살을 들이대고 있다. 말은 자유주의자처럼 하면서 행동은 완전히 군사독재에 수구 꼴통 세력이다.




지금 개혁세력은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있지도 않지만, 설사 마음 속으로 주체사상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양심의 자유에 반하게 솔직하게 고백을 강요할 권리는 국가를 비롯하여 지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자유주의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다.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없는 독재 정권은 민중들에게 자유를 허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유를 허락하는 순간에 자신들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정권은 민주 정권이고 이를 억압하는 정권은 독재 정권이 되는 것이다.




좌파 시각으로 자유주의를 보아도 민중들에게 정치적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그것이 유산자 계급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해치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 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이나미가 이야기한 ‘불확실한’ 자유주의자이자,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국민들의 참여를 보장할 정도로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낸다는 면에서 유시민이 이야기한 ‘진정한’ 자유주의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진 자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자유주의 연대’는 자신들이 재산권이 위협받을 때에만 자유를 부르짖는, 이나미가 이야기한 ‘확실한’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극대화가 최대 목표인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나미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을 끝내고자 한다. 글 속에 ‘재산권’이란 단어를 ‘권력’으로만 살짝 바꿔보면, 의사와 메이저 신문, 그리고 ‘자유주의 연대’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사들이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집회를 하고, 보수 언론이 ‘탄압’에 저항하여 ‘언론의 자유’를 외쳤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가 억압당한 시절에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부 이익 단체들이 보인 정치적 행동과 언론 재벌이 부르짖은 언론의 자유 역시 재산권에 대한 권리 주장과 탈세 조사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 모두 ‘자유’를 위해 정치적으로 떨치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자유가 억압당하던 시절에는 모두 침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재산권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해서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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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70년대는 누가 대통령 해도 고도 성장

"박정희 역대 집권자 중 내용상 4위"

1위 : 박정희 4,285명(28%)  
2위 : 광개토대왕 2,257명(14%)  
3위 : 세종대왕 1,93명 (11%)  
4위 : 이순신 1,303명 (8%)  
5위 : 김대중 807명 (5%) 


위의 통계는 월간조선(3월호) 실린 한국 역사상 최고 인물 인터넷 여론조사이다. 박정희이순신 장군보다 3배 이상 더 존경받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아예 명함도 못비치고 있다. 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투사를 토벌하는 일본군 장교가 됐다. 박정희는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데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하여 일본에 충성하였다. 이런 민족반역자 박정희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보다 몇 십 배 더 존경받는 나라. 이 참담하고 비극적인 현실 앞에 나 역시도 이러한 나라의 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박정희경제적 기여가 너무 커 친일, 남로당 가입, 유신독재, 인권탄압온갖 죄악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한다. (경제적 기여를 가지고 존경여부를 따진다면 건설, 자동자, 조선산업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이 더 존경받아야 함) 도대체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를 했길래 박정희가 지은 죄악을 덮고도 남는지 한 번 조사를 해 보았다.

먼저 역대 우리나라 집권자들의 경제분야 종합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을 분석해 보았다. 객관성을 높이기 기위해 경제성장률은 집권기간 연평균 실질성장률을 기준으로 했다. 통계청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실질성장률이 한 나라의 실제 성장정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라고 한다.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김대중 6.8%, 노태우 7.0%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그러나 각 집권자별 연평균성장률과 우리와 여건이 비슷하고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여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대만은 10.0%, 주요국은 5.2%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주요국의 성장률이 5.2%였다. 일반적으로 한나라의 경제개발에 시동이 걸리면 성장률이 일정수준까지는 급상승하나,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성장률이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로 선진국으로 인 주요국 성장률 5.2%는 대단히 높은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이 10%였다는 것은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호황기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8.5%의 성장에 그쳐 10.0%의 대만에 못 미쳤고 주요국보다 3.3% 높았다.

전두환은 집권기간(7년) 동안 연평균 9.3%의 성장률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를 기록하였다. 전두환의 성장률은 대만의 성장률 8.5%보다 약간 높았고 주요국보다 5.7%나 높았다.

노태우도 연평균 7.0%의 성장률은 기록 수치상으로는 전두환에 약간 못 미쳤으나 주변국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 전두환비슷한 수준이었다.

김대중의 집권시기는 대만이 연평균 3.1%, 주요국이 2.0%에 불과해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극심한 불황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기간동안 연평균 6.8%의 성장률은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1위의 전두환에  뒤졌으나 대만보다 3.7% 그리고 주요국보다 4.8% 앞서는 내용면에서 매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경제통계를 근거로 분석한 역대대통령의 경제성적표는 단순수치상으로 전두환 1위, 박정희 2위, 김대중 3위 순이다.

그러나 대외 여건을 감안한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한 결과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이다. 박정희가 “박정희가 대한민국 경제를 세우고 경제기적를 창조했다”라는 칭송을 듣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적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내세우는 논리가 박정희 이전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때부터 급성장했다고 한다. 이승만 때의 4.1%의 성장률이 낮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종전 후 잿더미 속에서 맨 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나아가 4.1%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역대 집권자의 재임기간 동안의 여건을 보면 이승만은 상상하기 힘든 전쟁피해 속에서 출발해야 했다.

 
전두환은 2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안았고, DJ도 IMF 환란을 극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노태우와 YS 시절도 민주화의 과도기여서 절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어떠했나. 우선 박정희는 이 전 정권의 전후복구와 빈약하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국가기간산업의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또 박정희 집권 초 우리 조상들의 흘린 피의 댓 가인 월남 파병으로 또 70년대에는 우리건설회사의 중동진출로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달러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했 듯이 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도 유례없는 장기간호황이 이어졌다. 또 박정희는 60-70년대 우리 군인들의 목숨의 댓가인 월남특수, 또 우리근로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실인 중동특수를 누릴 수가 있었다. 우리 군인들의 목숨과 우리 근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고스란히 박정희의 치적에 스며들었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오로지 박정희의 으로 둔갑되었다.

그리고 당시 군부, 관계, 언론계 등에 포진해 있던 과거 친일분자들이 박정희우상으로 모시다시피하여 박정희는 누구보다도 좋은 여건이었다.

지금까지의 박정희 추정자건 비판자건 경제성장에 관한 한 박정희가 독보적인 존재로 알아왔다. 나 역시도 통계치를 분석하기 전에는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계치에 의한 분석결과를 볼 때 지금까지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하나의 허상임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 추종자들에게 이와 같은 통계분석 결과를 들이 대면 이 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통계치에 논리가 궁색하면 박정희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도 박정희 덕이라고 한다. 그럼 왜 이승만 정권이 잿더미 속에서 거의 맨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열악한 여건 속에서 발전소, 시멘트공장, 비료공장을 짓는 등 최소한의 기간산업육성하여 훗날 경제개발발판을 마련한 것에는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포스터 등을 이용해 늘 국산품을 애용하는 마음을 고양시켰고 또 당시 이승만 박사는 늘 소비재 원조에 치중하는 미국에게 생산재를 원조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은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이승만과 장면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장시키고 우리를 세뇌시켰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써먹었던“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도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 속에는 상당한 과장과 왜곡이 있다. 마치 국민소득 80불은 지금 생각하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빈곤국을 연상시키고 이만큼 산다는 것은 지금의 국민소득 만 불을 연상시킨다. 보통 일반일은 경제학자나 전문가와는 달리 통계수치를 훤히 꿰차고 있지 않다.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늘상 박정희가 일으킨 경제를 YS와 DJ, 노무현이 말아먹었다는 것을 사실여부를 떠나 아예 기정사실화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가 죽은 79년 당시 국민소득은 지금의 1/8 정도인 1,600불 수준이었다. 또 박정희가 집권하던 61년 당시의 국민소득 82불은 당시 일본의 국민소득이 500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절대빈곤의 최빈국 수준아니었다. 이토록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실제보다 많이 과정되었다.

집권자별 실질경제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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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국내총생산(GDP)  한국연평균      비     교     대만연평균 주요국연평균
                                 집권시/퇴임시   성장률(%)   대만  주요국   성장률(%)   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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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53-'61     19,763/ 27,179        4.1       -3.2     -0.4         7.3             4.5 
    박정희    '61-'79     27,179/117,435       8.5       -1.5      3.3        10.0           5.2
    최규하    '79-'81    122,412/122,412      2.1        -4.6      0.1          6.7             2.0
    전두환    '81-'88    122,412/227,864      9.3          0.8      5.7          8.5             3.6
    노태우    '88-'93    227,864/320,044      7.0        -0.1      4.3          7.1             2.7
    김영삼    '93-'98    320,044/394,710      4.3        -1.9      1.3          6.2             3.0
    김대중    '98-'03    394,710/547,839      6.8        3.7      4.8          3.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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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http://kosis.nso.go.kr/ 에서, 'KOSIS > 자료출처별 검색(국제통계) > 국제금융통계,IMF > 국민계정' 순으로 선택한 후, 각종 경제지표를 나타내는 항목 중, 기준년도 불변가격 국내총생산으로 나라별, 기간별 경제성장률을 계산
2) 출처) 대만자료는
http://www.dgbas.gov.tw/, 行政院主計處 第三局
3) 국가선택-> 주요국 : 미국,카나다,독일,영국,프랑스,이태리,일본, 대만
4) 국내총생산(GDP)은 '95년도 불변가격임
5) 연평균성장율 = (집권년도불변가격수/퇴임년도불변가격)의 (1/집권기간(년))승


흔히들 달라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이 한나라의 경제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 우리정부와 언론은 늘 국민들에게 그렇게 주지시켜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환율 변동 때마다 그 폭이 너무 커 실제 소득수준과 경제성장 정도를 나타내는데 문제가 있다. 김영삼 재임기간 중 집권당시인 93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7,811불이었는데 퇴임시기인 98년에는 7,355불로 오히려 400불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불변가격을 기준으로 한 실질성장률은 연평균 4% 이상을 기록하여 재임기간 중 실제로 23%의 성장을 하였다.

 
박정희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82불로 시작하여 죽을 때인 79년 1636불을 기록하여 외형상 연평균 18%의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61년 130원으로 두 배 올랐다. 또 박정희가 죽을 때 환율이 485원이었는데 74년부터 6년간 지속되어온 이 환율이 두 달 후인 80년 1월에는 20% 상승한 580원이었고 연말에는 700원에 육박하였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집권 직전 2배의 환율 상승으로 저평가국민소득액($82)에서 출발하여 환율상승 전에 죽는 바람에(485원의 환율이 6년간 유지됨) 고평가국민소득액($1,636)을 유지한 상태에서 죽었다. 박정희는 집권종료환율변동을 잘 타는 바람에 외형상 성장률엄청나게 증폭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질성장율은 이 거품이 빠지는 바람에 8.5%에 그치고 주변국들과 비교할 때 내용상으로는 김대중, 전두환, 노태우보다 뒤지게 된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늘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도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로 상징조작에 성공한 것이다. 유신독재시절 박정희를 우상화시키는 일이 성공의 지름길이었고 박정희에 불리한 비판은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박정희가 죽은 후도 조선, 중앙, 매일신문 등에 의해(박정희 전기 연재를 통해) 박정희의 우상화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집권자별 명목국민소득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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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1인당국민소득 한국연평균    비     교      대만연평균  주요국연평균 
                  집권/퇴임                       증가률(%)   대만/주요국   증가률(%)   증가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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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67/     82       2.6           3.8    -2.1         -1.2            4.7 
     박정희     '61-'79         82/ 1,636      18.1          3.0      6.1         15.1          12.0
     최규하     '79-'81    1,636/ 1,749       3.4        -14.5    -3.0         17.9            6.4
     전두환     '81-'88    1,749/ 4,268      13.6           0.3      4.8         13.3            8.8
     노태우     '88-'93    4,268/ 7,811      12.8           1.4      7.6         11.4            5.2
     김영삼     '93-'98    7,811/ 7,355      -1.2         -3.6     -3.9          2.4            2.7
     김대중     '98-'03    7,355/12,646      11.4         10.1      9.5          1.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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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은행, IMF / http://climate.snu.ac.kr/wrms/DATA/econo_data/main.html
         재정경제부 /
http://home.hometer.com/GNP.htm
         재정경제부 / KOSIS > 온라인통계간행물 > 주요경제지표
         대만자료는
http://www.dgbas.gov.tw/, 行政院主計處 第三局
주1) 원칙적으로 1인당 GNI를 기준(GNI자료 수집이 불가한 경우 GNP)
주2) 국가선택-> 주요국 : 미국,카나다,독일,영국,프랑스,이태리,일본,대만
주3) 집권기간 연평균소득증가율 = (집권년도국민소득/퇴임년도국민소득)의 (1/집권기간(년))승


■ 박정희 18년간 무역적자 233억불 (수출 638억불 수입 871억불)

다음에 박정희와 추종자들이 그토록 내세우는 수출입국 건설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기간 매년 38%의 매우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두환16%, 김대중 때는 6%정도로 수출증가율이 둔화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자료입수 가능기간인 57년 이후부터 61년까지 연평균 15%의 수출증가율을 나타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57년 2천3백만불이었던 수출액이 58년에는 천4백만불로 감소하다가 이후 집권종료 전 1년간 3천7백만불을 기록하여 연평균 48%의 수출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박정희38%능가하는 수치로서 박정희 집권이전부터 이미 급격한 수출증가의 기미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수출에 관한한 전두환씨가 지금도 큰 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기간 중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총 638억불을 수출하고 871억불을 수입하여 수출이 급격히 늘었지만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났다. 집권기간 중 무려 233억불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집권종료시기인 79년는 150억불 수출에 203억불을 수입하여 한 해에만 53억불 적자를 기록하였다. 70년대 후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지금도의 1/10수준임을 감안하면 79년 한해의 무역적자만 지금의 500억불 적자규모와 같다고 볼 수가 있다. 박정희 집권기간 무역적자 233억불지금2000억불 이상무역적자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니 집권기간 중 8억불무역흑자를 기록한 전두환씨가 자랑할 만도 했다.

후임 집권자 중 노태우132억불 적자, 김영삼366억불 적자를 기록했고 김대중은 불과 5년 동안에 846억불흑자를 기록하여 지금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리하여 보면 이승만 정권 때는 수출신장의 싹이 보였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높은 수출증가를 이룩했으나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나 당시 경제규모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규모의 무역적자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박정희때 외형은 크게 늘었지만 결국 크게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운을 타고난 박정희는 대일청구권 자금, 월남특수, 중동특수 등으로 무역에서 펑크 나는 것을 메웠고 이것도 부족하여 매년 많은 차관을 도입해야 했다. 이 은 결국 후임정권짊어져야 했다.

최초로 흑자를 기록한 전두환은 남는 장사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또 흑자규모를 늘리고 지속적으로 유지한 김대중은 크게 남는 장사를 하여 현재는 1500억불이 넘는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박정희외형만 키웠고 실제적으로는 적자 투성이었다. 그러나 항상 수출이 늘어난 것만 보도되고 또 이 것이 전적으로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홍보되었다.

무역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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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수출액(100만$) 연평균수출    집권기간       적자/흑자      집권기간 
                집권/퇴임  증가률(%)                       총수출/총수입      누계         국민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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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57-'61       23/        37     14.5          107/   1,644     -15억$적      67->     82
     박정희   '61-'79       37/  15,057     38.4     63,809/  87,122   -233억$적      82-> 1,636
     전두환   '80-'88  18,369/ 50,670     15.6    217,241/216,427       8억$흑  1,749-> 4,268
     노태우   '88-'93  50,670/ 77,845      9.0    341,939/355,218   -132억$적  4,268-> 7,811
     김영삼   '93-'98  77,845/138,673   12.2    583,240/619,917   -366억$적  7,811-> 7,355
     김대중   '98-'03 138,673/169,850    4.1    771,981/687,309    846억$흑  7,355->1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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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출처: KOSIS > 자료출처별 검색(국제통계) > 국제금융통계,IMF(International Financial Statistics) > 무역
2) 수출/수입액 : 집권연월이 속한 분기를 기준으로 1년간 실적
3) 총수출/수입액 : 집권연월에 따른 분기별 실적을 감안하여 계산


■ 경제개발 치적은 박정희만의 전유물 아니다.

다음으로 도로 및 발전설비 등 건설부문을 살펴보자. 박정희 정권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과거 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도하고 마치 모든 경제개발5.16 이후에 이루어진 것처럼 졌다고 선전해 왔다. 과연 그런가? 생각해 보라! 이 좁은 땅에 2차 대전 때보다도 더 많고 가공할 포탄과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또 남북을 막론하고 완전히 초토화된 이 땅을 다시 복구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가를. 이승만 정권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37만 Kw의 발전량(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지만)을 확보하고 충주비료공장 및 문경시멘트 공장, 인천판유리 공장, 방직시설 등을 건설하여 국가기간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박정희 집권 이전 정권에서도 경제개발의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전후복구와 위와 같은 국가기간산업의 육성이 훗날 박정희의 경제개발에 귀중한 발판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 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 했어야 했다.

이제 박정희 추종자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치적인 고속도로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단 동안 총 1,225Km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이 가운데 경부선 428Km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거의 제한속도가 시속 70Km인 2차선이었다. 그리고 후임정권은 24년간 1,566Km(2002년 기준)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이 시기 건설된 도로는 대부분 4차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전 간을 8차선으로 또 호남선을 4차선으로 확장하는 등 많은 고속도로를 넓혔다.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하면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보다 2.5배 이상 고속도로를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발전설비는 어떤가? 이승만 정권 때 37만Kw,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766만Kw의 발전설비를 증설하였다. 그리고 후임정권은 무려 4,795만Kw의 발전설비 증설하였다. 발전소를 짓는데 수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의 발전설비는 다소 늘어나리라 짐작된다. 그렇더라도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정권에비해 무려 5배의 발전시설을 건설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국가기간산업 건설 측면에 있어서도 박정희가 유독 두드러지는 면이 없다. 집권기간을 감안했을 때 후임정권 때보다도 훨씬 부진했다. 다만 통계수치상 이승만 정권 때가 박정희정권 때보다 낮게 나왔으나 이승만정부가 전쟁 후 최악의 여건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정권도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집권자별 건설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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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고속도로신규건설(Km)    2차선환산시(Km)     발전량(신규,만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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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0                                0                               37
     박정희    '61-'79           1,225                          1,643                             766
     전두환    '80-'88              305                                                            1,010
     노태우    '88-'93                57                                                               771
     김영삼    '93-'98              389                                                             1,576
     김대중    '98-'03              815                          4,66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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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선환산시 4,668Km는 전두환부터 김대중까지 22년간의 합계임
출처) 한국도로공사
출처) 한국전력
출처) 통계청,「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각년도
출처) 통계정보시스템(KOSIS)
 

■ 추종자들이 그토록 향수를 느끼는 70년대의 생활수준

이제 마직막으로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유신독재, 인권탄압 등의 박정권의 죄악상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70년대 말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우리 집 세 식구가 살았다. 그 작은 방 옆에 손바닥만한 부엌이 있었고, 건너편에 냄새가 풀 풀 나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당시 만해도 연탄을 땠는데 윗목은 온기가 가지 않아 겨울이면 걸레가 얼어붙곤 했다. 연탄불에 겨우 물 한바가지 정도 데워 그것으로 세수하고 머리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때려 한참 말려야 했다. 동네에서 차 가진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같은 학년의 친구 중 열명에 한두 명 꼴로 대학엘 갔는데 그나마 아버지가 은행원이나 고급공무원인 경우에나 가능했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취직하거나 직업하사관으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따끔 9급공무원이나 은행 등에 취직하면 동네에서 부러워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잘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손톱이 빠지도록 벌고 안 먹고 안 쓰고 하여 막내인 나는 형의 희생덕분에 (일찍 취직하여 내 학비를 댐) 70년도에 대학문턱에 가보는 행운을 누렸다. 78년도에 취직하여 받은 초봉이 15만원 이듬해 17만원으로 13%올라 좋아했는데 그 해에 정부에서 발표하는 소비자물가가 18%였다. 70년대에는 물가20% 이상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도 TV는 물론 조선, 중앙 등 신문도 외형적인 성장강조할 뿐 급격한 물가상승 등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못했다. 아마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물가가 10%만 상승했다면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온갖 선동으로 무능한 대통령으로 뒤집어 씌워 끌어내렸을 것이다.

내 말이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되었다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 통계치를 조사해 보았다. 박정희 시절 1000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6.4대, 1인당 주거 면적이 2.5평,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 진학자수가 18만명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김대중 집권 말인 2003년에 1000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204대, 1인당 주거 면적이 6.1평,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 진학자수가 60만 명이었다.

나는 70년대 초반 군대생활을 했는데 훈련소에서 동초근무를 선 후 새벽 2-3시경 잠자리에 들어서도 너무나 배가고파 뜬 눈으로 잠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당시 쌀과 보리를 합쳐 1인당 하루 규정량이 732gr이었지만 정작 배식되는 밥은 몹시 적었고 부식이래야 콩나물국에 김치 몇 쪽이었다. 1주일에 한 번 돼지고기 국이 나왔는데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비계덩이만 몇 개 떠 있곤 했다. 실무에 가서도 오히려 훈련소 생각이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전방 오지일수록 정도는 더욱 심했다. 요즘 군대에서 배곯는 병사가 있는가? 요즘 우리생활 수준이 어떤가? 물론 요즘 취직이 안 되어 고통을 당하고 아직도 달동네에서 적은 수입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웬만한 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차를 2대 이상 가진 집이 많고, 조금만 덥거나 추워도 냉난방시설 틀어놓고, 웬만한 가정에는 컴퓨터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식구마다 휴대폰을 차고 다니는 세상이 아닌가? 만약 요즘 소득수준으로 13평짜리 연탄 아파트에 차도 안 굴리고 휴대폰 대신 공중전화를 이용한다면 얼마나 풍족하고 여유로울가?

 
박정희 시절 작은 집에서 살고 차도 안 굴리고 밤낮으로 일만 하고 살았으니 먹고, 입고, 애들 학비 외에는 돈 들어 갈 일없었으니 불편만 감수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편했던 것 뿐이지 박정희 시절이 결코 잘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역대 집권시기 생활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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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권 자       기  간     조사년     1인당주거면적(평)    조사년    대학/전문대진학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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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통계무              1961                 통계무
     박정희       '61-'79     1975                2.5                  1979                178,289
     전두환       '80-'88     1985                3.4                  1988                305,109
     노태우       '88-'93     1990                4.2                  1993                400,039
     김영삼       '93-'98     1995                5.2                  1998                621,583
     김대중       '98-'03     2000                6.1                  2003                601,600
---------------------------------------------------------------------------

출처) 통계청,「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각년도
출처) 통계정보시스템(KOSIS)
* 이승만/장면 집권시 통계수집 불가


 

<출처 : 조인스닷컴 핫이슈 토론광장 j222jw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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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atta 2009-02-1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날카롭게 지적하셨군요...시원합니다.ㅋ

333 2011-05-25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대 예비역입니다. 글은 잘 안보고 스크롤 내린후 관심댓글만 답니다.
이거 글쓴 사람 정말 할일 없어보인다. 먹고 살만한가봐 ^^

hoon 2011-07-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좋은 분석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제 친구들 중 한 명도 박정희 이야기만 나오면 무슨 구국의 영웅처럼 말하고는 합니다. 대화할때마다 너무나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안스러운 마음까지 들기도 했는데, 이 정리된 글이 박정희가 진정으로 어떤 인간이었는지 깨닫게하고 친구를 납득시키는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HOONSSI 2011-08-18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훈씨 좋은 친구분께 당신의 무식을 자랑하지 마시길..

후니 2011-08-19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그동안 비난하던 좌파측에서조차 박정희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도저히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비난할 수 없으니 이런식의 카더라 식의 비판을 할 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나 혹할 내용이지, 학문적으로 공개하면 개망신 당할 내용이지요.

hoon 2011-08-1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oonssi/왜 무식을 자랑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의견은 없군요. 본문에 대한 반박의견이 없는 근거없는 단순주장 감사합니다.
후니/왜 위의 주장이 ~카더라인지 모르겠네요. 저렇게 통계를 통해서 객관화시켜봤는데 말이죠. 위의 내용이 어째서 학문적으로 공개하면 개망신 당할 내용인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적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그리고 위 글의 요지는 누가 대통령직을 맡아도 60~70년대에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그것이 아니란 것을 입증해줄만한 반박글을 부탁합니다.

저기요 2012-01-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oon님 그렇게 말이 통했으면 이미 예전에 모든것이 바르게 돌아갔겠죠...괜한고생 하지 마세요 에휴..
 

역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즉 구체적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백화점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름지기 역사는 자기 민족에 있어 가치 있는 내용을 모아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그것을 기술하는 주체자의 몫이어야 한다.
특정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에 바탕을
둔 주체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8월 15일을 우리 나라는 '광복절'이라 하지만,
일본은 '패전 기념일'이라 명명하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사를 살펴보면
과연 이러한 역사적 진술이 이루어졌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아니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면,
1884년 일본군이 '개화당'이라는 무리들을 이끌고
궁궐을 난입한 사건을 '갑신정변'(갑신년의 정치 변혁)이라 하고,

1894년 일제가 3천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궁성을 허물고
고종을 위협하여 일제 앞잡이 내각을 수립, 우리 나라를
빼앗는 기틀을  마련한 사건인데도 '갑오경장'
(갑오년에 르네상스를 이룸)이라 했고,
 
이듬해, 일제는 자국군과 자객단을 구성하고, 일제 앞잡이가 된
훈련대 대대장 3인을 이용해서 훈련대 병사를 동원,
궁궐로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시해'란 용어는 범인이 자국민일
경우)했던  일을 '을미사변'(을미년의 변고)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명백히 '갑신왜란','갑오왜란','을미왜란'(굳이 양보해도 '~일란') 이었는데, 나라를 빼앗기다 보니,일제가 명명했던
용어를  그대로 빌려 쓰고 있는 실정이다.

 
오도되고 왜곡된 것이 비단 역사 용어에 그치지 않고 있다.
 
광복 이후 우리의 '국사' 교과서가 이른바 '병도학파'(이병도 중심 학자군)의  손에 의해 제작되고 보니, 일제 앞잡이들이 각 분야에서 이른바   '개혁','선각자' 세력으로 기술되고 말았다.
 
'이병도'가 누구인가? 그는 '이완용'의 동생이자,합방 때 '남작' 작위를  받았던 '이윤용'의 친증손자가 아니었던가!
 
매국노의 후손이 중심이 된 국사 교과서가 올바르게 기술되었으리라고  믿을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독립유공자 공훈록'(1986.국가보훈처)의 내용도
자신이나 가족의 삶보다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국한 순국선열보다는, 일제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인사나  국내의 몇몇 지식인들이 학당을 세워 학동들을
가르친 것을  더 높이 평가하여,
 
책의 전반부에 수록하고 있는,  실로 후손들을 대하기가
부끄러운 모습이 오늘날의 실정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어 버렸기에 정리하지 못한 우리의 과거사는,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올곧은 삶'
무엇이었으며,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은 어떤 분이며,
어떤 무리가 매국한 대가로  일본 귀족의 작위(76명 받음)를 받았고, 은사금을 받아 치부했는지를  광범위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의병을 "비도(匪徒)", 의병장(義兵長)을 "비도수괴(匪徒首魁)"라  호칭하면서,의병 토벌을 했던 일본군을 칭찬했는가 하면,
"일본 화폐를 사용하자"
"조선 최고의 정치가는 이완용이다"
"동양 최대의 정치가는 '이등박문'이다"
등을 외친 일제 앞잡이 신문, "독립신문"(필립 제이슨 ㅡ서재필의
귀화명)과  일제 앞잡이 단체였던 "독립협회"도 거짓의 탈을
벗길 때가 왔으며,

 
진실을 왜곡한 학자들(?)도 양심 선언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1916년 매국노 부호들과 일본 유력자들의 단체였던
 '대정친목회'(회장 조중응)의 기관지로 창간되고,
 '백작 송병준'이  사장이었던 "조선일보", 이완용보다
높은 작위를 받았던  민족 반역자 -'박영효 후작'
(이등박문이 통감 시절 후작이었음)이  창간한 "동아일보"의
내용도 검토 대상이 되어야 한다.
 
 
물론,일제가 말한 "대동아 공영"이란 것에서 따온 "동아"라는
의미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는 자국민의 올곧은 삶이 녹아 있는 응결체여야 한다.
역사를 하나의 집에 비유한다면, 지붕이 새고, 기둥이 비틀어진
집을  지붕만 고치고 페인트 칠로 단장한다고 보금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매국노의 후손을 처벌하거나 차별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따라서 한말의 역사,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 민족의 삶을
포괄적으로  살펴 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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