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다.
틀림없이 갔다.
모든 것을 걸고라도 확언컨대 장준하가 대통령이었다면 그분도 어김없이 그 위험천만한 곳에 갔을 것이다.
왜정 말기 조선놈들 목숨으로 방패를 삼으려던 왜놈들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간 장준하는 중국에서 결사적인 탈출을 감행하여 거친 황야에서 돌베개를 베면서도 마침내 광복군을 찾아간다.
광복군으로 조국 진공을 준비하던 중 맞이한 때 이른 통탄의 해방 후 귀국한 장준하 앞에 펼쳐지는 조국은, 왜놈들 앞잡이 하던 수괴 박정희가 왜놈식 스탈린식 폭력적 압축성장으로 기층민중을 희생시켜 극소수 윗대가리부터 배불리고 쓰레기 같은 찌꺼기가 남으면,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의 수백 수천분의 일조차 마치 은혜라도 베풀 듯 희생자들에게 던져주는 곳이었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왜놈이 가니 그 왜놈의 떨거지가 수괴가 되어 다시 민중을 뜯어먹는 꼴이라니.
그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너무나도 정의롭고 옳은 것이었다.
옥중에서 출마한 그를 민중들은 국회로 밀어 넣었고 그는 국방위원회에 들어갔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나라에서 제일 힘센 놈이 누구겠는가.
그 나라의 의원이란 또 얼마나 약한 것인가.
그러나 그 기세등등하고 국회의원 알기를 개똥으로도 여기지 않던 군부의 장성들도 장준하에게만은 꼼짝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였을까.
그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왜놈들에 질식당해 꼼짝못하던 그때, 그는 이미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광복군의 자랑스런 군인이었고 왜군에서 군인질이라도 하여 먹고살려던 자기 선배들과는 전혀 다른 존개감이 압도해오는,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참된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군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사업을 위해 국방 예산을 깎으려 들 때 장준하 의원은 오히려 국방비 예산 증액을 주장했다.
나라가 있고서야 지역이 있고 나라가 있으려면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정치에 물들어 썪어빠진 정치군인의 마음에까지 울렸기에 그들은 기꺼이 장준하 의원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그런 장준하도 월남 파병을 반대했다. 극렬히 반대했다.
그럴 수밖에.
그 더러운 미제의 전쟁에 어찌하여 우리 청년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얻어지는 몇 푼돈으로 조국의 이념이 훼손되어 당연하단 말인가.
그러나 파병이 의결되고 실제로 파병이 이루어지자 장준하는 자기부터 아들을 월남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들이 부상하여 돌아오자 아들이 누워 있는 병실을 찾아와 보고는 아무 말없이 나가버렸다.
옥중에 갇힌 장준하를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한개씩 나누어 주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그의 아내는 그것이 그렇게도 야속했단다. 아마 전사라도 했으면 기뻐했을 사람이련가 했을지도 모르겠다.
장준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당한 파병에는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일단 그것이 결정된 다음에는 자기부터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이다.
그런 분이 대통령이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히틀러의 침략보다 더 역겨운 미제의 침략 전쟁에 어거지로 쑤셔넣은 우리 청년들에 어떻게라도 힘을 주고 격려해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맑은 눈동자를 대하고 돌아오는 길에 느낄 그 쓰라림과 묵직함을 예견했다 하여도 그는 갔을 것이다.
대통령께서 자이툰 부대를 방문한 것에 대하여 자칭 진보라는 것들이 싸질러대는 더러운 정론(正論)은 나를 역겹게 한다. 이라크 전쟁이 부도덕하고 그래서 노무현이 학살 도우미라는 그들 주장이 비록 옳다 하여도, 나는 그 옳음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순간 이미 한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지 진보만의, 개혁만의 대통령이 아닌 것이다. 수많은 생령들이 바라보고 있는 대통령이고 그들이 자기를 개구리로 부르건 말건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의 대통령으로 국가의 명운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으로 그분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오고 있다.
젊은 병사를 껴안은 국군 최고통수권자의 환한 얼굴 뒤편에서 나는 조국을 위하여 흘리는 맑은 눈물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