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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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다."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덮을 때까지 마법에 걸린 것 처럼 1967년 영국 런던과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를 왔다갔다 했다. 이야기에 깊게 빠져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건을 따라 갔다. 1967년의 런던에서 오델과 함께 퀵에게 숨겨진 비밀을 추리했고, 1936년의 말라가에서는 올리브 가족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긴장감에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 했다. 

이렇게 몰입하면서 책을 읽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흠뻑 빠져서 후에, 이야기에서 현실로 돌아온 순간 어떤 희열감을 느꼈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의 이야기와 주인공에 동화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생각 났다. 한 동안 그 즐거움을 잊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책읽기가 '외부지향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오델은 자신의 글쓰기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적인 일이 되어버려서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외부지향적'이 되어 가는 자신의 글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런 오델에게 퀵은 자신을 위해 글을 쓰라고 충고했고, 오델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현실과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것뿐이었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같은 것이었다. 현실과 다른 가능성을 느끼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천재 소녀 올리브가 되고, 트리니나드에서 야망을 품고 런던으로 와 미술관 타이피스트를 하는 오델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상상의 즐거움을 다시 깨닫게 해 준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모든 여자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여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다. 작가는 여성을 뮤즈로 이용하며 여성의 이야기를 남성이 전해 왔던 예술계에 반발하며, 이 소설을 통해 "완전한 자유, 재정적 독립,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상태, 남성이 여성의 삶 무대 가운데에 서지 않는 세상, 여성이 섹스와 고독 둘 다 고를 수 있는 세상"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서문에서 작가는 오델에게 가장 많은 애정을 느낀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올리브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담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그것을 펼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이삭에 대한 사랑과 섹스에 대한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삭은 자신을 열어주는 뮤즈다. 이삭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고, 그만큼 재능도 발산하고 있지 못했다. 한마디로 웅크리고 있었다. 이삭을 통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성적 쾌감은 올리브를 화가로서 발전시켜준다. 그림을 그리는 것 뿐만이 아니다. 이삭은 올리브의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창구 역할도 한다. 그림 매매상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올리브는 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는다. 올리브가 가진 재능은 남자인 이삭의 이름을 빌려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올리브는 이삭의 이름을 빌려 이 안타까운 상황을 헤쳐나간다. 이런 방식은 정의롭지 않다. 그림을 판 돈으로 이삭의 정치 운동을 도울 수 있지만, 그것은 이삭의 이름을 빌리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내적 동기에 의해 썼지만, 오델이 글을 발표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올리브도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 열쇠는 이삭이지만, 열쇠를 올리브 손에 쥐어준 것은 작품을 바꾼 테레사였다. 창조부터 평가의 과정까지 이삭은 철저하게 올리브와 테레사에게 이용당한다.

책을 다 읽은 후, 퀵과 오델이 사실은 <루피나와 사자>를 그린 화가는 이삭 로블레스가 아니라 올리브 슐로스라는 사실을 왜 세상에 알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 누구도 올리브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남은 것은 그녀의 그림 뿐이다. 그리고 올리브가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에는 이삭이 필요했다. 그녀의 작품은 이삭의 이름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명성을 얻었다. 결국 퀵과 오델에게는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올리브의 전부인 그림이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여성인 '올리브'라는 이름으로는 그림을 보여줄 수가 없는 사회에서 진실은 묻혀 있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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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1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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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이 책을 골랐는가? '언어 천재'라는 말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아마 여러 방송을 통해 조승연이라는 사람을 아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독학으로 7개 국어를 배운 저자 조승연에게 언어 천재라는 별명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사실 나는 TV를 잘 보지 않아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조승연이라는 사람에 대해 몰랐다. 그래서 단순하게 책의 표지를 보고 '언어 천재'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생겨서 읽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대에서 외국어 능력이 중시되면서 빠르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느리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영어를 배우게 된다. 대부분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를 사용하는 직업을 갖지 않는다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어에 시달릴 것이다. 영어뿐만이 아니다. 중, 고등학교 때는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등 제 2외국어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거의 20년을 외국어를 학습한다. 하지만 자신이 배우고 싶어서 즐겁게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필요하다니까 배우고, 외우라고 하니까 외우면서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언어 공부가 취미"라고 말한다. 취미라고 하면 보통 영화 감상, 음악 듣기, 스포츠 등 즐거운 것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언어 공부가 즐거울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연극에서 '세상은 무대고, 모든 사람은 캐릭터다', 즉 '인생은 드라마다'라는 대사를 반복했다. 셰익스피어의 히트작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라는 상인이 친구 그라티아노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세상일 뿐이야, 그라티아노.
모든 사람에게 배역이 있는 하나의 무대지.
그런데 나는 슬픈 역을 맡았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희곡 <뜻대로 하세요>의 대사처럼 사람들은 '세상은 무대이고, 사람들은 배우일 뿐이어서, 모두가 적당할 때 입장하고 퇴장한다'라고 믿게 되었고, 연극 캐릭터가 연기할 때 얼굴에 쓰는 가면을 뜻하던 'persona'라는 단어는 진짜 사람을 뜻하는 'person'과, 그 사람의 캐릭터, 즉 개성을 뜻하는 'personality'라는 단어로 발전했다.

언어는 사람 공부다. 사람들은 언어를 그냥 사용하지 않는다. 언어는 동물처럼 단순한 소리를 내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학습해서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반드시 배경이라는 게 있다. 

저자가 '언어 천재'가 된 비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말의 배경을 알면 배우기가 즐거워지고 쉬워진다는 것이다. 보통은 단어장을 보며 무작정 암기한다. "person은 사람"을 반복해서 외운다. 그리고 "personality는 성격, 개성" 도 반복해가며 암기한다. 이렇게 무작정 반복해서 외우고, 단어 시험을 보고, 며칠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이런 학습은 재미도 없고 정말로 배움이 되지도 않는다. 반면에, person이 연극 캐릭터가 연기할 때 얼굴에 쓰는 가면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personality가 그 사람의 캐릭터를 말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배경을 알면 이 단어들은 안 잊어버리게 된다. 더구나 셰익스피어의 희곡까지 알게 되니, 말그대로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 것이다. 언어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언어를 공부하는 목적은 눈 앞의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잊고 그저 암기에만 매진한다. 단순히 언어를 아는 게 아니라 쓸 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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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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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 인상은 좋지는 않았다. 일단 제목부터가 길고 어려웠다. '리얼리스트'에 '유토피아', '플랜' 까지. 외래어가 많이 사용된 데에다가 리얼리스트와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서로 모순적이다. 이렇게 비판적인 태도로 투덜대면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가 된다. 리얼리스트와 유토피아는 양립할 수 있는 단어다. 그리고 좀 더 '투덜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내가 마주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글을 열어보려고 한다.
  
어제(2017년 9월 22일) 하루종일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를 차지했던 단어는 '경기도 일하는 청년통장'이다. 경기도에 거주하면서 일하는 청년이 매월 10만원을 저축하면 3년후 경기도 예산과 민간기부금으로 약 1,000만원이 적립되는 제도다. 명칭은 다르지만 서울시에서도 '희망두배 청년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근로하고 있다는 사실과 저소득을 확인시켜주면 국가에서 돈을 모을 수 있게 해 준다니, 좋은 정책이다. 이외에도 열악한 거주 환경 문제, 비싼 대학 등록금, 취업난 등과 관련한 청년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국가에서는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LH전세임대주택, 한국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국가장학금 등 잘 알아보고 신청만 한다면 국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정책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는 좋은 '복지국가'다. 그리고 우리는 '혜택 받은 세대'다. 그런데 나 개인의 생활을 보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다.

한 달 전, 그러니까 9월 초에 개강을 앞두고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자취방을 구해야 했다. 이리저리 방을 알아보다가 내가 가진 돈으로는 비싼 서울 원룸의 보증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저렴한 쉐어하우스에서 살기로 했다. 내가 알아본 곳은 정부 지원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쉐어하우스여서 입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했다. 제출해야하는 서류 중에는 소득확인증명서가 있었다. 그래서 전자민원센터를 이용해 편리하게 소득확인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처음으로 발급받은 소득확인증명서에 나의 근로소득, 사업소득, 그 외의 소득은 모두 무(無)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직장이 없는 학생이다. 하지만 지난 해 나는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일에는 학교의 근로장학생으로 일했고, 주말에는 이태원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서빙을 했다. 그렇게 일해서 한 달에 약 60만원을 벌었다. 그런데 나의 지난 해 근로소득은 0원이다. '근로소득이 0원이라면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좋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경기도 일하는 청년통장의 가입 조건은 다음과 같다. 

공고일(2017.08.29) 기준 경기도 거주 만 18세 이상 ~ 만 34세 이하 일하는 청년
(1982년 8월 30일~1999년 8월 29일 출생)
소득 인정액이 중위소득 100% 이하인 가구
(소득+재산을 일정한 비율로 환산한 금액)


그리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다음과 같다. 

① 사회보장급여 제공(변경)신청서(제4호 서식)
② 근로확인서류(재직증명서, 근로계약서, 고용보험가입증명서 중 1가지), 발급 불가시 [고용·임금 확인서로 대체 가능(제5호 서식)
③ 거주지 임대차 계약서 또는 사용대차확인서 (제6호 서식)
④ 주민등록 초본(신청자 본인 기준, 주민등록번호 및 과거 주소 변동내역 포함)
⑤ 가족관계증명서(신청자 본인 기준으로 '상세'발급, 주민등록번호 포함)
⑥ 가구특성 확인서류(해당자)- 장애인, 다문화, 북한이탈주민은 관련 증빙서류 제출
⑦ 기타 가산점 및 부채증명서 적용대상자는 해당 증빙서류 추가 제출(해당자)


그러니까 작년의 나는 근로 사실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경기도 일하는 청년통장을 신청하려 했다면 자격 미달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청년도 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한다면 신청 가능하다. 작년에 이 정책이 있었다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근로 확인서를 받아서 신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돈을 받고 기뻐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내년에 서울시의 희망두배 청년통장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근로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근무처의 사장님에게 근로 확인서를 요구해야 한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던 문제였기 때문에 내년이 되기 전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자고 말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근로계약서 작성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 책을 읽고 증명 절차를 밟아야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이 생겼다. 그냥 모든 사람에게 돈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국가장학금은 소득분위에 따라 차등 지원되고, 청년통장은 '적은 임금으로 일하는 청년'을 격려하기 위한 정책이라서 임금과 일하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정부 지원 프로그램은 자격 심사 절차가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이전에는 그래야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의 저자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기본 소득에 관한 주장을 듣는다면 차등 복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저자는 누구나에게 조건 없는 무상 현금지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즉,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선별적 복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빈곤층만을 지원하는 제도는 빈곤층과 나머지 인구 사이에 더욱 깊은 골을 남긴다. 영국을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이론가 리처드 티트머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책은 가난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계획과 공제, 혜택을 소득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좌파들의 인식에 새겨져 있는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그러한 경향이 역효과를 낳는다는 데 있다.
1990년대 말 출간돼 지금은 유명해진 글에서 두 스웨덴 사회학자는 가장 보편적인 정부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국가가 가장 성공적으로 빈곤을 퇴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국민은 개인에게 이익이 될 때 결속에 더욱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자신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복지국가에서 혜택을 많이 받을수록 더욱 기꺼이 결속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지지기반을 훨씬 넓힐 수 있다. 결국 누구나 자신에게 이로운 계획을 지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중략)
통제와 굴욕이라는 사악한 괴물에게 빈곤층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복지제도이다. 관리들은 페이스북을 사용해 공공부조 수혜자를 주시하면서 지원금을 현명하게 쓰는지 감시한다. 자격, 신청, 승인, 자격 회복 등의 절차를 밟으려면 빈곤층을 안내해줄 사회 서비스 복지사 집단이 필요하고, 서류들을 정밀하게 조사해 자격 여부를 가려내려면 조사관 집단이 있어야 한다.
국민의 안전 의식과 자부심을 북돋워야 하는 복지국가가 국민을 의심하고 수치를 안기는 체제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가 맺은 끔찍한 협정의 결과이다. 캐나다 마니토바대학교 교수 에블린 포르제는 이렇게 탄식했다. “정치권은 국민이 더 이상 일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한다. 좌파는 국민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기본소득 제도가 더욱 바람직한 타협안이 될 수 있다. 소득 재분배를 실시하면 좌파가 요구하는 공정성을 충족할 것이다. 간섭하고 수치를 안기는 정권은 어느 때보다 편협한 정부에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관료주의가 요구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실제로 의존성을 키워 사람들을 계속 빈곤의 덫에 가둔다. 고용인은 강점을 발휘해야 하는데 사회복지기관은 오히려 청구인이 결점을 드러내기를 기대한다. 예를 들어 병이 깊어 건강이 나쁘고, 우울증이 심각하고,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을 거듭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은 수혜자는 복지 혜택을 빼앗긴다. 양식과 인터뷰, 조사, 탄원, 평가, 상담 등 지원을 받으려고 신청할 때는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세금을 엄청나게 집어삼키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중략)
자본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결국 두 가지 유형의 빈곤을 무의미하게 구별하고, 40여 년 전에 거의 떨쳐버렸던 잘못된 생각을 고집한다. 즉, 빈곤 없는 삶은 모든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기보다는 일해서 획득해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복지를 실시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한 논쟁은 식상하다 못해 진부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조건없는 무상 현금지원이 가능한 사회에서 자격을 증명해야하고 심사를 거쳐서 지원을 받는 것에 내가 의문을 품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작년부터 핀란드는 기본 소득제도를 실시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성남시의 청년 배당을 기점으로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본 소득'이나 '무상 현금 지원'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거나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실현 불가능 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기본 소득이라는 단어에 펄쩍 뛰며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거나, 개념 자체를 모를 때보다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더 진보했다. 이러한 진보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민주주의나 여타 많은 우리 사회의 진보들이 그랬듯이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대안을 논의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내년 초 핀란드의 기본소득실험의 결과가 발표된다면 무상 현금 지원은 더욱 구체적이고 활발한 논의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저자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위한 다른 플랜들, 
주 15시간 노동이나 국경 없는 세계도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곧 리얼real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더 나은 길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앞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것이 유토피아다. 이것이 우리가 유토피아를 꿈꿔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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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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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행동의 근원을 설명하고 싶어했다.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밑바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철학이 발달했고, 그로부터 다양한 학문들의 갈래가 생겨났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그렇게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고, 그것을 '동기'라고 부른다. 심리학의 목적은 인간 행동의 동기를 규명하고, 그로부터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할 지 예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는 인간의 '동기'를 두 가지 전제로 설명했다. 첫 번째 설명은 홉스의 "호모 호미니 루푸스(인간은 인간에게 늑대가 된다)"라는 격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이 탐욕적이고 경쟁적이라는 것이다. 끊임 없는 전쟁이 명백한 증거다. 두 번째 설명은 사회 다윈주의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른 진화론에 바탕을 둔 사회 다윈주의는 근대사회의 계급 불평등이나 빈부격차, 개인주의를 정당화했다. 좀 더 최근의 말로 바꾸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영장류 동물과 인간 사이의 유사점을 찾는 다양한 실험 연구를 진행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을 다시 검토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이기적 본성이 있지만 행동은 '자율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 본능 못지 않게 사회적 본성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프란스 드 발이 인간의 이기적임과 잔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DNA는 보상을 얻기 위해 작동할 뿐 아니라 공감에 의해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저자의 입장은 <이기적 유전자>를 집필한 리처드 도킨스와의 만남에 대한 언급으로 대변된다.

자연이라는 책은 <성경>과 같다. 즉 인내에서 무자비함까지, 이타주의에서 탐욕까지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부여하며 읽는다. 그렇다 해도 알아두면 좋을 것은 생물학자들이 끊임없이 경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경쟁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며,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유전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이 성나거나 햇살이 다정할 수 없는 것처럼 유전자도 ‘이기적’일 수 없다. 유전자는 작은 DNA 덩어리일 뿐이다. 기껏해야 ‘자기를 내세우는’ 정도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유전자라면 자신의 운반체가 자신을 더 많이 복제해 퍼뜨리는 걸 돕기 때문이다.
스킬링은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기적 유전자의 비유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 우리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면 우리도 이기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도킨스가 의미한 바는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략)
나는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이 동물이나 인간의 실제 동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만 제대로 이해된다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도킨스는 순수한 친절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행동이 자기 운반체를 이롭게 하기 위해 선택된 유전자에 의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동의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진화를 이끄는 것과 실제 행동을 이끄는 것을 분리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가진 이 사회적 본성, 즉 '공감 능력'을 통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 연구를 포함하고 있어서 책이 두꺼워졌지만,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맞다. 인간은 늑대같은 존재다. 하지만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늑대다.

  아래에 첨부된 영상은 프란스 드 발의 TED 강연이다. 책이 두꺼워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지만, 인간의 본성이 궁금하다면 단 16분 짜리 이 강연만 봐도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강연에서는 공정성, 공감, 유대 등의 감정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실험 연구 영상도 볼 수 있는데, 몇 개는 보다가 웃음이 터질 정도로 재미있어서 꼭 추천한다.


https://youtu.be/GcJxRqTs5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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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대문 2 : 노장과 병법 편 - 잃어버린 참나를 찾는 동양철학의 본모습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2
박재희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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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는 단어는 듣는 순간, 마음에 거북함이 생깁니다. 어려운 한자가 빼곡히 쓰인 두꺼운 책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고전 뒤에 소설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그나마 좀 나아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같은 소설은 도전에 성공해서 제 마음 속에 좋은 인상을 남긴 소설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동양의 고전은 거북하기만 합니다. 특히 공자, 노자, 장자 등 동양 철학은 말이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피할 수 만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부딪쳐 봐야지'하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번이 그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저처럼 동양 철학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입문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동양 고전 철학의 대문과 같습니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대문을 열어야 합니다. 보기에는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철문이지만, 실제로 밀어보니 의외로 쉽게 밀리는 문이었습니다.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어렵게 느끼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빠져듭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상황에 대입하게 됩니다. 그런 힘을 가진 고전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양한 시대에 그 시대의 요구에 맞춰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철학이나 사상이 보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보편성, 그것이 고전입니다. 잠깐 유행했다 사라지는 베스트셀러는 그런 보편성이 없기에 고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현실에 대한 보편성, 그것이 고전의 힘입니다.

  하지만 정작 글쓴 저자가 시대의 요구에 맞게 고전을 해석하지 않고 있다고 느낀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겠지만 이 구절을 읽다 보면 돌아가신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릅니다. 평생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신 어머니, 어디 제대로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인생을 바보처럼 사신 밥 퍼주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노자가 꿈꾸던 물처럼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노자는 그런 어머니 모습을 리더십으로 환원시킵니다. 간섭하고 강요하고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밥 퍼주는 천하의 어머니가 진정 위대한 리더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겠지만이라고 저자는 독자의 공감을 구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젊은 독자들이 과연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저자와 같은 시대를 공유한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 입니.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고, 더 이상 어머니라는 단어가 희생의 이미지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전의 해석은 읽는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노자의 <도덕경>을 밥 퍼주는 엄마의 리더십으로 비유하며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은 실패했으며, 신간을 읽는 신선함도 반감시키는 구식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전국시대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자나 노자, 장자와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은 제각각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그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장자가 이야기하는 소요유逍遙遊의 삶입니다.

소요逍遙는 아무런 의도나 생각 없이 노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니까 소요유逍遙遊는 아무런 의도나 생각 없이 노닐 듯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이유나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이유가 타당하고 목표가 분명할 때 행동의 동기가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와 목표는 나의 판단과 결정을 늘 긴장하게 합니다. (중략) 인생을 돌이켜볼 때 이런 의도 없는 삶이 바로 소요유의 삶입니다. 이런 삶은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근대 사회는 이유와 목적의 선명함을 강조하였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충분한 이유와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에도, 사람을 만나는 동기에도, 여행을 가는 목표에도 무언가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했습니다. 인생에서 뚜렷한 목표를 갖고 사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뚜렷한 목표 의식이 나를 피로하게 하고,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나의 자유를 저당 잡히게 한다면 이제 그 목표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장자의 철학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높은 자리, 강한 권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끊임 없이 노력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거친 경주에 지친 사람들에게 성공한 카운셀러들은 "잠깐 쉬어가도 된다"고 위로해줍니다. 하지만 휴식이 끝나면 다시 뛰어야 합니다. 결국 목표가 있는 한 경주는 영원합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매달린 나懸로부터의 해방解, 즉 현해懸解를 추구해야 합니다. 전도된 세상으로부터, 권력과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장자는 외로운 돼지, 고돈孤豚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의 자유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끝없는 경주와 목적주의에 질려버렸다면 장자의 충고에 귀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사회의 기준이나 윤리로부터 벗어나서 노니듯 살다 간다. 얼마 전 템플 스테이를 다녀왔는데, 스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걱정과 고민을 내려 놓고 소풍 온 듯 살다 가라. 걱정과 고민의 원인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사회로부터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감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은 소요유의 삶이 저의 마음 속 깊이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특히나 공감한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쓸모없는 나무가 오래 산다는 무용지용의 이야기는 <장자>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중략) 결국 그 나무는 재목으로 쓰지 못할 나무였기 때문에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모 있다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영혼을 팔거나 저당 잡혀야 얻을 수 있는 대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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