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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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다."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덮을 때까지 마법에 걸린 것 처럼 1967년 영국 런던과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를 왔다갔다 했다. 이야기에 깊게 빠져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건을 따라 갔다. 1967년의 런던에서 오델과 함께 퀵에게 숨겨진 비밀을 추리했고, 1936년의 말라가에서는 올리브 가족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긴장감에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 했다. 

이렇게 몰입하면서 책을 읽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흠뻑 빠져서 후에, 이야기에서 현실로 돌아온 순간 어떤 희열감을 느꼈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의 이야기와 주인공에 동화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생각 났다. 한 동안 그 즐거움을 잊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책읽기가 '외부지향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오델은 자신의 글쓰기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적인 일이 되어버려서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외부지향적'이 되어 가는 자신의 글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런 오델에게 퀵은 자신을 위해 글을 쓰라고 충고했고, 오델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현실과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것뿐이었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같은 것이었다. 현실과 다른 가능성을 느끼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천재 소녀 올리브가 되고, 트리니나드에서 야망을 품고 런던으로 와 미술관 타이피스트를 하는 오델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상상의 즐거움을 다시 깨닫게 해 준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모든 여자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여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다. 작가는 여성을 뮤즈로 이용하며 여성의 이야기를 남성이 전해 왔던 예술계에 반발하며, 이 소설을 통해 "완전한 자유, 재정적 독립,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상태, 남성이 여성의 삶 무대 가운데에 서지 않는 세상, 여성이 섹스와 고독 둘 다 고를 수 있는 세상"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서문에서 작가는 오델에게 가장 많은 애정을 느낀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올리브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담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그것을 펼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이삭에 대한 사랑과 섹스에 대한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삭은 자신을 열어주는 뮤즈다. 이삭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고, 그만큼 재능도 발산하고 있지 못했다. 한마디로 웅크리고 있었다. 이삭을 통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성적 쾌감은 올리브를 화가로서 발전시켜준다. 그림을 그리는 것 뿐만이 아니다. 이삭은 올리브의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창구 역할도 한다. 그림 매매상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올리브는 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는다. 올리브가 가진 재능은 남자인 이삭의 이름을 빌려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올리브는 이삭의 이름을 빌려 이 안타까운 상황을 헤쳐나간다. 이런 방식은 정의롭지 않다. 그림을 판 돈으로 이삭의 정치 운동을 도울 수 있지만, 그것은 이삭의 이름을 빌리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내적 동기에 의해 썼지만, 오델이 글을 발표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올리브도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 열쇠는 이삭이지만, 열쇠를 올리브 손에 쥐어준 것은 작품을 바꾼 테레사였다. 창조부터 평가의 과정까지 이삭은 철저하게 올리브와 테레사에게 이용당한다.

책을 다 읽은 후, 퀵과 오델이 사실은 <루피나와 사자>를 그린 화가는 이삭 로블레스가 아니라 올리브 슐로스라는 사실을 왜 세상에 알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 누구도 올리브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남은 것은 그녀의 그림 뿐이다. 그리고 올리브가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에는 이삭이 필요했다. 그녀의 작품은 이삭의 이름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명성을 얻었다. 결국 퀵과 오델에게는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올리브의 전부인 그림이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여성인 '올리브'라는 이름으로는 그림을 보여줄 수가 없는 사회에서 진실은 묻혀 있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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