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대문 2 : 노장과 병법 편 - 잃어버린 참나를 찾는 동양철학의 본모습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2
박재희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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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는 단어는 듣는 순간, 마음에 거북함이 생깁니다. 어려운 한자가 빼곡히 쓰인 두꺼운 책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고전 뒤에 소설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그나마 좀 나아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같은 소설은 도전에 성공해서 제 마음 속에 좋은 인상을 남긴 소설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동양의 고전은 거북하기만 합니다. 특히 공자, 노자, 장자 등 동양 철학은 말이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피할 수 만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부딪쳐 봐야지'하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번이 그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저처럼 동양 철학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입문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동양 고전 철학의 대문과 같습니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대문을 열어야 합니다. 보기에는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철문이지만, 실제로 밀어보니 의외로 쉽게 밀리는 문이었습니다.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어렵게 느끼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빠져듭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상황에 대입하게 됩니다. 그런 힘을 가진 고전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양한 시대에 그 시대의 요구에 맞춰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철학이나 사상이 보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보편성, 그것이 고전입니다. 잠깐 유행했다 사라지는 베스트셀러는 그런 보편성이 없기에 고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현실에 대한 보편성, 그것이 고전의 힘입니다.

  하지만 정작 글쓴 저자가 시대의 요구에 맞게 고전을 해석하지 않고 있다고 느낀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겠지만 이 구절을 읽다 보면 돌아가신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릅니다. 평생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신 어머니, 어디 제대로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인생을 바보처럼 사신 밥 퍼주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노자가 꿈꾸던 물처럼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노자는 그런 어머니 모습을 리더십으로 환원시킵니다. 간섭하고 강요하고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밥 퍼주는 천하의 어머니가 진정 위대한 리더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겠지만이라고 저자는 독자의 공감을 구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젊은 독자들이 과연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저자와 같은 시대를 공유한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 입니.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고, 더 이상 어머니라는 단어가 희생의 이미지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전의 해석은 읽는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노자의 <도덕경>을 밥 퍼주는 엄마의 리더십으로 비유하며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은 실패했으며, 신간을 읽는 신선함도 반감시키는 구식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전국시대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자나 노자, 장자와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은 제각각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그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장자가 이야기하는 소요유逍遙遊의 삶입니다.

소요逍遙는 아무런 의도나 생각 없이 노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니까 소요유逍遙遊는 아무런 의도나 생각 없이 노닐 듯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이유나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이유가 타당하고 목표가 분명할 때 행동의 동기가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와 목표는 나의 판단과 결정을 늘 긴장하게 합니다. (중략) 인생을 돌이켜볼 때 이런 의도 없는 삶이 바로 소요유의 삶입니다. 이런 삶은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근대 사회는 이유와 목적의 선명함을 강조하였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충분한 이유와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에도, 사람을 만나는 동기에도, 여행을 가는 목표에도 무언가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했습니다. 인생에서 뚜렷한 목표를 갖고 사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뚜렷한 목표 의식이 나를 피로하게 하고, 나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나의 자유를 저당 잡히게 한다면 이제 그 목표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장자의 철학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높은 자리, 강한 권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끊임 없이 노력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거친 경주에 지친 사람들에게 성공한 카운셀러들은 "잠깐 쉬어가도 된다"고 위로해줍니다. 하지만 휴식이 끝나면 다시 뛰어야 합니다. 결국 목표가 있는 한 경주는 영원합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매달린 나懸로부터의 해방解, 즉 현해懸解를 추구해야 합니다. 전도된 세상으로부터, 권력과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장자는 외로운 돼지, 고돈孤豚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의 자유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끝없는 경주와 목적주의에 질려버렸다면 장자의 충고에 귀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사회의 기준이나 윤리로부터 벗어나서 노니듯 살다 간다. 얼마 전 템플 스테이를 다녀왔는데, 스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걱정과 고민을 내려 놓고 소풍 온 듯 살다 가라. 걱정과 고민의 원인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사회로부터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감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은 소요유의 삶이 저의 마음 속 깊이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특히나 공감한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쓸모없는 나무가 오래 산다는 무용지용의 이야기는 <장자>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중략) 결국 그 나무는 재목으로 쓰지 못할 나무였기 때문에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모 있다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영혼을 팔거나 저당 잡혀야 얻을 수 있는 대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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