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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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두 해가 지나갔다. 2007년 2월에 만났던 시인의 [바람의 사생활]은 넘쳐나는 이별노래로 나를 얼마나 먹먹하게 하였던지….  그 이별의 절정이던 "견인"에서 함께 '서서히 식어가던' 사랑도 이제는 '견인'되었으리라. 그럼 이제 돌아와 우리 앞에 선 시인은 어떤  [찬란] 한 노래를 들려주려나, 자못 궁금한 시집이었다.
 시인의 말 
  불편하지 않은 것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마음에 
  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2010년 2월 
  이병률 
 
 그러나 기대도 잠시, 시집을 열고 들어가는 입구에 떡하니 놓인 '시인의 말'은 아직도 그때, 그 '눈발'이 그치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다시 이어지는 먹먹한 사랑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새롭지 못하리라 걱정하며 시집을 펼쳐든다.  다행히 넘쳐나던 이별 이야기는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말이 나를 기다린다. 
 
 그 산을 파내고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 '기억의 집'에서 (9)
 
 첫 번째 詩에서 '산을 파내고 동굴을 만들고' '깊숙한 움' 속으로 들어가더니 시인은 이제 '밤'거리를 헤매인다. 눈에 띄는 '밤'에 관한 이야기들을 우선 만나보자.
 
 한밤중에 끝도 없이 ~ / 걸레에 물기를 적시어 먼지를 간섭하고 있는 몇몇 밤들은  - '햄스터는 달린다'에서  (13)
 
 밤 늦게 산책을 나갔다가 - '못'에서  (14)
 
 어둠이 소금처럼 짠 밤에  - '자상한 시간'에서  (16)
 
 개벽한다는 말이 혀처럼 귀를 핥으니 / 더 잠들 수 없는 밤  - '새날'에서  (27)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 /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 -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에서  (47)
 
 좀처럼 흰 허리가 펴지지 않는 어슬한 밤  -  '다리'에서  (50)
 
 낮이 있는 만큼 밤이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시인은 자주 '밤'의 이야기를 읊조리더니 급기야 이렇게 고백까지 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밤이었다  -  '밤의 힘살'에서  (60)
 
 시인은 '밤'을 힘겨워한다. '어둠이 소금처럼 짜'기도 하고 '더 잠들 수 없는 밤'이 되기도 한다. 뒤척이는 그 '밤'들이 이윽고 시인에게는 '힘'이 되고 '삶'이 되나 보다.
 
 삶이 여기에 있으라 했다  - '이 안'에서  (25)
 
 그리고 길고 긴 '슬픔'과 '밤'의 고단함이 부딪히고 닳아지며 "창문의 완성" 같은 詩가 탄생한다. 이 시집에서 만난 맘에 드는 몇 편의 詩중 하나이다. 일부만 옮겨본다.
 
 나중에 오는 것은 적잖이 새로운 것
 네가 먼저 온다 시간은 나중에 온다
 슬프게 뭉친 것은 나중까지 오는 것이다
 희부연 가로등 밑으로도 휑한 나뭇가지로도 온다
 한번 온 것은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시험도 결심도 않는다
 시간은 나중 오는 것이다 네가 먼저 오는 것이다  - '창문의 완성'에서  (39)
 
 하지만 아무래도 [바람의 사생활]에서 만나던 강렬함은 모자란 듯 하다. 하긴 헤어지고 이별하는 충격적인 일이 늘 있다면 어찌 하루하루를 견뎌내랴.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한 시절을 넘어 우리에게 '찬란'의 결을 보여준다. '겨우 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로 시작되는 詩 "찬란"은 이름 그대로 '찬란'하다. 그렇지만 이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가며 읊조린 듯한 시집에서 나의 가슴에 제일 깊숙이 와 닿은 노래는 이 봄에 맞는 "삼월"이다.
 
 첫눈이 나무의 아래를 덮고
 그 눈 위로 나무의 잎들이 내려앉고
 다시 그 위로 흰 눈이 덮여
 그 위로 하얀 새의 발자국이 돋고
 
 덮이면서도 지우지 않으려 애쓰는
 말이며 손등이며 흉터 
 
 밖에는 또다시 눈이 오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지요
 
 밖에는 천국이 지나가며 말을 거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눈 속에 파묻히는 줄도 모르고
 
 당신이 모르는 것은 하나가 아니었지요 
  - "삼월" 부분  (57)
 
 "견인"에 이어지는 연작으로도 다가오는 "삼월"은 여전한 시인의 감성을 드러낸다. '설산을 넘는 밤길'(120)을 걷고 또 걸어, 우리는 또 어느 고개쯤에서 '파묻히는 줄도 모르고' 함께 잠이 들 수 있을 것인지…. 그래도 '함께'라서 '행복'하고 '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시인의 말을 빌려 이 시집을 덮는다. 이렇게….
 
 '설레이'지 않은 것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마음에
 휘몰아치는 '설레임'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2010. 3. 8. 이른 새벽,  그대는 오늘도 설레이며 살아갑니까? 
 
 
들풀처럼
*2010-028-03-04
 
 
*책에서 옮겨 둡니다.
 어젯밤 구걸하던 이를 찾습니다 / ~ / 어둔 밤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인데  -  '불편'에서  (76)
 
 아찔하지만 그래도 괜찮단다
 지나가는 것은 아픈 것이 아니란다  -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에서  (101)
 
 고파서 손이 가는 것이 있지요 / 사랑이지요  -  '봉지밥'에서  (118)
 
 
 
 견인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고갯길, 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속, 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붓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바라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항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견인차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니었던가 싶었다고 한다  
 기억으로는 삼십 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 폭설처럼 먹먹하던 사랑도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잦은 기침을 하던 옆자리의 당신  
 그 쪽으로 내 마음을 다 쏟아버리고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  
 
[바람의 사생활] http://blog.daum.net/mrblue/1090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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