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고생하고 고생하여 이룬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이 알량한 정치 현실 앞에서, 옛이야기를 그것도 독일 옛이야기를 들춰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32)
 
 이 독일 이야기를 나도 위와 같이 생각하며 만난다. 그래, 도대체 '신데렐라''재투성이' 혹은 '부엌데기'라고 하여 뭐가 다를까? 라는 생각에 덤벼든 책이었다. 결과는 지은이의 전작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 만나보았던 장점이 고스란히 옮겨온 책에 현실적인 이야기가 덧대어져 더욱 만족스러운 책이 되었다.
 
 <우리말 풀이 + 독일 원전 + 영역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도 같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다시 한 번 곱씹는 과정도 똑같다. 여전히 하나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풀어 시와 소설, 철학으로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지은이의 해박함과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알아듣기 쉽도록 자세히 풀어 말해주는 솜씨도 여전하다. 아래에 넉넉한 여백을 두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충분히 적을 수 있게 해 둔 편집도 맘에 든다. 그래서 이어지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책들에, 그리고 지은이에 대하여, 더욱 믿음이 간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한참을 읽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꺼내어 다시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그 까닭을 알았다. 예전의 지은이가 쓴 두 책 [백설공주는 공주는 아니다?!] 와 [공부를 잘해서 도덕적 인간에 이르는 길]은 말투가 존댓말이었는데 이번엔 아니다. 그러니까 존댓말이 주는 어떤 부드러움과 떠먹여 주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대신, 읽는이가 스스로 판 때리기하고 찾아가며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늘어난 듯하다. 아마 지은이는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며 말투를 바꾸었으리라.
 
 신데렐라라고 하면 우리는 이른바 '한방 블루스!'로 표현되는 한탕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이는 동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서 오는 착각임을 이번 이야기에서도 깨닫는다. '재투성이'라는 존재감, 그리고 그 가 전해주는 빛깔과 정체성이 오롯이 살아나 '부활'과 '다시 피어남'의 바탕이 되는 , 그리고 스스로 일어서는 의 역할을 만난다. 그리하여 재투성이 아가씨는 마침내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그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
 
 분노와 굴욕 사이를, 열광과 냉소 사이를 그 아가씨는 살았던 것이다. (133)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사실은 요즘의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지방 강연에서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앞에 있는 어떤 특정한 길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함께 같은 방향을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 뒤에 길이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 TV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께서도 이와 비슷한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리라. 재투성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렇게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엄마 무덤 위에 나무가 자라고, 나무가 불러들인 새들의 도움을 받고, 그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가능해진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신데렐라를 통하여 만나야 하는 진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인생 한방'이라는 허상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 나가는 길에 답이 있다고 일러주고 있다. 삶은 살아가고, 살아 내고, 버팅기는 것, 그리하여 살아남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진정으로, 치열하게 살아 꿈틀대리라. 
 
 삶이 따르지 않는 말은 쓰잘 데 없는 말일 것이다.  (137)
 
 
2009. 11. 21. 가을, 가족 나들이로 들뜬 새벽을 깨웁니다. -.-;
 
들풀처럼
*2009-241-11-10
 
 
 
*책에서 옮겨 둡니다.
 영어 씬데르스Cinders - 프랑스어 쌍드리옹Cendrillon (그을음) / 독일어 원어 Aschnputtel = '재투성이' = (의역) '부엌데기' - 영어 씬데뤨라Cinderella - 우리말 '신데렐라'   (11)
 
 따라서 '신데렐라 = 재투성이' (11) 라는 뜻
 
 한 사람의 삶이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의 버무려짐이기 때문이다. (120)
 
 활자가 탁, 일어나서 걸어나오는 것 같은 감동 - 김제동
 
 재는 덧없음, 슬픔, 그리고 속죄의 상징이다. (122)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다시 솟구쳐 오르는 생명이기에, 불사조라고 한다. 이 새는 크리스천에겐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24)
 
  '재'는 슬픔, 죽음, 회개의 자리다. 그렇지만 '피닉스'에 비추면, 재는 부활의 바탕이다. (124)
 
 사람이건 낱말이건 간에, 그 사람 그 낱말과 어긋나 있는 것을 그것에 맞세울 때에야, 그것들은 또렷이 드러난다. 아무리 존엄성을 내세우고 절대성을 내세우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은 인연 속에 있고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과의 인연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간에, 읽히지 않고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1)
 
 남보다 천하게 태어난 사람도 없고 남보다 귀하게 태어난 사람도 없다. 이거야말로 모든 종교가 알려주는 복음이다. 이 복음 때문에, 태어남은 이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문제는 삶이다. 거룩하고 영웅적인 삶을 사는가 못사는가가 있을 뿐이다. (153)
 
 그렇긴 하지만, 날씨가 아무리 험상궂더라도 길을 내면서 제 갈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진흙탕 속에 있는 맑은 물줄기를 기어이 찾아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 같은 사람들이다.  맹자가 말한 대장부이고, 우리 옛 분들의 이상이었던 군자이고, 오늘날의 선비다. 이분들 마음에는 '우주 나무'가 자라고 있음에 틀림없다. (154)
 
 저 땅을 딛고 선 재투성이는, "적은 年輪으로 이스라엘의 二千年을 헤아려" (정지용, <나무>에서) 아름드리 개암나무가 되었는데, 이 땅을 딛고 선 재투성이는, 반 만 년을 헤아리지 못한, 아직도 안쓰러운 나뭇가지일 뿐이다.  (158)
 
 이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이나 침대가 많은데, 그것을 모르고 제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침대만 알았던 보수꼴통과 극좌파가 프로크루스테스가 아닌가? 프로크루스테스는 큰일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이다. 이념에 매몰되기 쉬운 게 젊은이이기 때문이다. (166)
 
 하이데거 지음, 박정자의 책, <빈센트의 구두>에 대한 설명 (171)
 
 다른 나라 왕에게 제 나라의 젊은이를 넘겨주는 사람도 왕이라 할 수 있는가?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왕이 못난이이면 백성은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172)
 
 왜, 한 짝은 벗고 한 짝은 신어야 할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잊어야 할 것과 찾아야 할 것, 그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운명 때문일까? 
 우리의 왼쪽 신발은 무엇일까? 여럿일 것이다. 재투성이와 테세우스가 벗었던 신발은, 어릴 적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설 때 신었던 것이다. 이 신발을 벗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벗어야 한다. 벗지 않으면, 신발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177)
 
 온 세상에 스며들어 '비어 있음'을 보여준 관음보살도, 신발 하나는 따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땅을 딛고 산 삶이기에, 땅 위에 새겨진 흔적은 보살도 어찌할 수 없다는 속삭임이었으리라. (184)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 즉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플라톤)는 말했다. (192)
 
 이제 예수의 각시들이 말을 받을 차례다. '예수의 신부들이 사는 모습'은 어떤가를,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는가를 세상에 알려줄 차례인 것이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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