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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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기사에서 '일년 단위 계약직 보일러공'(75)이라는 시인의 약력을 눈여겨 보고 시집의 제목이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라고 할 때 이 시집에 거는 기대치는 [노동의 새벽]에서 느끼던 그 불같은 뜨거움과 헛헛한 가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이 시집은 읽어나갈수록 삶의 진정성을 조용하고 나긋나긋하게 만나게 해주었다. 평범하다 못해 어쩌면 초라한 시인의 일상에 때론 밋밋한 느낌마저 드는 이 시들이 왜 나에게 절절히 다가오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시 시라는 것은 읽고 되새기고 읊조리는 동안 노래가 되는 법, 이 시집에도 시인의 노래들이 넘쳐난다.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 "거미"에서 (11)
 
 목련꽃 피면 겨울 하나 또 갔다, 가 아니라
 남자가 일할 수 없다면 목련꽃 펴도 봄은 온 게 아니라는 거다
 세상은 꽃과 일이 함께 있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법 - "목련 유감"에서 (36)
 
 겨우 두 편의 시에서 뽑아본 구절들이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보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구절들, 그 '필사'의 낱말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가장'인 내가, 남자가 '일할 수 없다면'  어찌 봄을 봄이라 부르랴. 일자리를 잃어 본 사람들은 안다. 그 막막한 어둠을…. 시인은 그 막막함과 답답함을 그저 불평하지 않는다. 이처럼 몇 줄, 몇 마디의 말로 우리에게 그 심정을 절절히 보여준다.
 
 "생의 북쪽"이라는 시에는 좀 더 구체적인 지은이의 일상이 드러난다. 나는 그가 '이력서'를 쓰고 잠든 아내, '여편네보다 먼저 눈뜨는 깊은 밤'을 안다. '그렇다 이스탄불, 베이징, 신의주, 상 파울로에도 잠 못 이루는 사내들이 있어 꺼진 불씨를 되살려내려 애쓰는 중일 거다 어둠 속에서 잠든 가족의 얼굴을 오래오래 응시할 거다 그렇다'  그는 '지금 세상의 북쪽이 아니라 생의 북쪽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52) 하여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61)는 것이다.
 
  나 역시 십 여년 전 잠시 일자리를 잃고 헤매이던 날들이 있었다. 그 밤마다 쏟아지던 후회와 좌절감, 앞날에 대한 두려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울먹이던 시간들, 어떠한 일이든 일을 하는 것만이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노력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 시간, 그 일은 다가 오는 것이다.
 
 마른 나무 톱질은 상쾌하기도 한 것이다
 이건 나무야 단순히 나무일 뿐이라구, 다짐해도
 먼저 넘어뜨려야 할 건 두려움 - "나무 베기"에서 (22)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 "손공구"에서 (57)
 
 그렇다, 먼저 '두려움'을 던져버려야 일을 할 수 있는 법, 일이 곧 삶임을 지은이를 따라 나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일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시집을 뒤적거리니 뜻밖에 밑줄그은 구절들과 동그라미로 좋다고 표시한 시들이 넘쳐난다. 아마도 일상에서 건져올린 시어들과 구절들이 내게 선뜻 다가온 탓이리라. 많은 시편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거나 옮길 수는 없으니 꼭 한 번 만나 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당연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시 한 편, 옮겨드린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갈 것'이니까.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진 않지만 때로는 저녁 식탁의 젓갈질이 늘어지는 걸 본다
 그렇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나는 엄숙히 선언한다
 통조림을 믿지 말라, 그 속엔 아직 정체가 안 밝혀진
 맹독이 숨어 있어 언제 뛰쳐나와 우리를 꺼꾸러뜨릴지 몰라
 그래 마늘과 고춧가루를 뿌려 펄펄 끓여먹는 거다 일순
 섬광이 번쩍 지나가고 짧은 탄식처럼 따듯한 저녁식사는 끝났다
 모두 평온하고 통조림처럼 무사한 저녁이 슈퍼에 많다
 삶에 지치지 않은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전문 (74)
 
 
2009. 7.29. '아무도 웃지 않는 밤'도 없으면 좋겠습니다.
 
들풀처럼
*2009-172-07-24
 
 
*책에서 옮겨두다
 술 끊고 한 열달 지나 꿈속에서 술 마시고
 아이고 십년계획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엉엉 울다 깼다
 깨어 꿈인 걸 알고 기뻐서 방바닥을 쳤다 - "꿈에 크게 취함"에서 (21)
 
 나무 되고 싶은 날은
 저녁 숲처럼 술렁이는 노천시장 간다
 거기 나무 되어 성성대는 이들 많다 - "노천시장"에서 (26)
 
 사람들이 울지 않으니까
 분하고 억울해도 문 닫고 에어켠 켜놓고 TV보며
 울어도 소리없이 우니까
 
 요렇게 우는 거라도
 목숨이 울 때는 한데 모여
 숨 끊어질락 말락 질펀히 울어젓히는 거라고 - "매미들"에서 (34)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 "미인"에서 (39)
 
 섬뜩 무언가 베고 지나가는 아픔 - "십년 뒤에도 호수에 가을비"에서 (59)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에서 (61)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도는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 "오늘 쉰이 되었다"에서 (68)
 
 툭 터진 쪽에서 바람이 서늘히 불어왔다 산을 내려가기 전
 한 사내, 잊었던 시 한구절 소리내어 외워본다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 - "이천년 숲"에서 (73)
 
 세상의 처음, 혹은 마지막처럼 누군가
 하늘을 헐어내서라도 악착같이 가야 하는 쪽
 샛노란 성냥불빛 서넛 크게 떨며 번지다 - "천수만, 석양"에서 (82)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 "화염 경배"에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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