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Ⅰ.
 두어 달전 사무실 회식때의 한 장면.
 
 1차로 고기집에서 고기랑 술을 먹고 당연한 듯이 근처 소주집으로 2차를 하러 11명의 직원들이 자리를 옮겼다. 늘 그렇듯이 2차는 끼리끼리, 알아서 이야기들이 날아다니는 시간, 적당히 술이 오른 나는 다른 직원과 함께 바깥의 나무아래 의자에 앉아 담배피는 총각 녀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체인점의 간판, 우리가 술을 먹고 있는 바로 옆집이었다. 나는 시원하고 맛있는 냉커피 한 잔씩 하려다 전체의 의견을 물었고 여차저차하여 예닐곱잔의 냉커피를 구매하여 술자리로 가져왔다.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이다.
 
 '뭐라, 커피 한 잔에 4~5천원씩이나 한다고', '요즘은 다 그리 합니다.','자판기 커피나 이 커피나 뭐 그리 차이가 잇을까','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아무튼 커피 몇 잔에 3만원정도는 너무 과한 것이다 등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문제의 시작에 발동을 걸었던 나는 한걸음 물러나 조용히 깔깔하고 쌉쌀한 에스프레소 더블샷 블랙 냉커피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Ⅱ.
 더 오래전, 동창생 녀석들과, 부부 4쌍+아이들 동반 저녁 식사 뒤 풍경.
 
 어른 8 + 아이 6이 모인 저녁 식사였다. 아껴서? 먹었기에 식사대가 10만원을 채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2차는 동네에 드물게 존재하는 정통 커피전문점, 동네 분위기랑은 어울리지 않지만 커피 맛이 좋아 가끔 들르는 곳에 다들 모시고 갔다. 기본 커피 한 잔이 5천원이었지만 특별한 날이었으므로 마님들에겐 블루마운틴 오리지널을 한 잔씩 권해드렸다. 잔당 1만2천원. 마님들은 너무 비싸다, 이런 걸 어찌 마시노, 하면서도 조용히 블루마운틴의 향과 맛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 쥬스 포함하여 후식 커피 값만 7~8만원 나왔던 밤이었다. 아주 특별한 밤.
 
 
Ⅲ.
 러시아 커피 - 노서아 가비에 얽힌 사연들로 이처럼 날고 기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역시 김탁환은 갈수록 전진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책을 들자마자 커피향에 묻어오는 이야기들을 설레며 따라가느라 마음이 바쁘다.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 그것이 비로 커피라고. (14)
 
 녹차로 커피의 침입을 막으려고지금도 노력중이지만 씁쓸한 블랙커피가 주는 감흥과 달콤한 설탕 커피가 넘어갈 때의 달짝찌근함을 놎차로서는 아직 당해낼 재간이 없다. 게다가 점점 더 편해지는 원두커피형 인스턴트 커피라니…. 두 브랜드에서 선전해대는 제품들을 나는 지금도 아낌없이 즐기고 있다. 도대체 커피가 무엇이길래….
 
 매일 새벽, 나는 한 남자를 위해 내가 만드는 한 잔의 커피 오직 이것으로부터만 자극 받았다. 이 검은 액체가 전하의 혀끝에 닿는 순간을 상상하며 내 모든 감각을 깨우고 또 깨웠다. 사랑보다도 더 짙은…… 어떤 '지극함'을 배우고 익히는 나날이었다. (131)
 
 나는 이 책에 실린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한 잔의 술잔을 기울인듯 여기며 그저 눈으로 책을 훑고 지나갈 뿐이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이야기는 그저 커피에서 샘솟은 '상상의 나래'일 뿐이거늘….
 
 하지만 러시아의 초원을 달리던 사기꾼에서 고종의 측근에서 커피를 따르는 비범한 위치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는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도 솔깃할만하다.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는 주인공과 한 남자의 야망과 거짓말, 그리고 그들을 이어주는 진한 노서아 가비의 이야기. 아마 나처럼 진작에 커피맛을 즐기지 않던 이들이라도 이 책을 읽다보면 커피 한 잔쯤은 손에 들고 음미하였으리라.
 
 말을 못하는 것도 힘들지만 달콤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도 맛을 모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커피 맛도 모르는 입이 어디 입인가. (29)
 
 그래, 아직도 눈치보며 이야기하곤 하지만 '커피 맛도 모르는 입이 어디 입인가' ㅎㅎㅎ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태 버리지 못한 자격지심 같은게 있으니 커피는 남의 나라 음식이라는 것, 5천원짜리 커피가 2백원짜리 커피보다 맛있기는 하지만 25배의 가치를 지닌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별다방,콩다방을 들락거리는 젊은이들을 나무라는 듯한 글들은 또 얼마나 넘쳐나던가. 나 역시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처지이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이 던져주는 삶에 대한 향기와 위로는 적지 않은 돈만큼의 값어치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무심코 마셔버리는 식후 자판기 커피 같은 것 말고 말이다. 하여 소설 속 임금, 고종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전하께서는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스스로 답하셨다. 
 내가 노서아 가비를 좋아하는 좋아하는 이유는 말이다……. 이 쓴맛이 꼭 내 마음을 닮아서이니라. (123)
 
 문득, 그 '마음을 닮아서' 좋아한다는 '노서아 가비'의 '쓴맛'에 담겨 있는 당시의 굴욕적인 상황까지 떠오른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씁슬한 커피 한 잔을 들이키는 것 뿐이었던 그 시절들…. 작가는 그런 감정들까지 스며들도록 커피에 묻어놓았다.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 격동의 시대이지만 마치 신세대 소설처럼 빠른 호흡으로 읽히는 글들 속에서도 언뜻언뜻 묻어나는 노서아 가비의 향,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한 아쉬움 같은 것이다.
 
 민대감의 어개가 가늘게 떨렸다. 낮게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둥 뒤에서 안아주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의 최선만으론 되지 않는 일이 적지 않았다. (79)
 
 나라를 위한 한 대신의 충절이 좌절되는 장면의 포착이다. '낮게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나도 붙잡아 위로해주고 싶어진다. 글내용의 안타까움과는 또 다른, 글 자체의 아련함이 베어나오기 시작한다. 게다가 아래 글은 또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이에 왜 그런 거리를 두느냐고 묻는 이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 습성은 습성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큰 방에 홀로 누워 긴 시간을 보내기 싫었고 이왕이면 나만의 비밀을 두고 싶었다. 연인 사이도 비밀은 있는 법이며, 비밀이 많다고 사랑이 변한 것도 아니다. (116)
 
 그래, '사랑은 사랑, 습성은 습성'일 뿐이다. 커피도 마찬가지이다. 사연은 사연, 커피는 커피일 뿐, 우리는 커피 한 잔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그저 식후 입가심으로 마셔버릴 수도 있다. 하여 다시 커피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발자크에게, 뿌쉬킨에게, 고종에게, 하여 당신에게 커피는 무엇인지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곳에서부터 전부라는 곳까지, [노서아 가비]는 그 답을 찾아가는 소설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쉬운 듯 어려운 질문 하나 부여잡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236)
 
 "작가의 말"에서 지은이는 이 소설이 태어나게된 뿌리부터 과정까지 남김없이 들려준다. 옛사료에 남아 있는 일화 한 자락으로 펼쳐지는 상상의 세계라니….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러시아를, 대한제국을 오가며 발검음을 바삐한다. 그리하여 지은이가 마침내 들려주는 '커피에 관한 단 한 줄의 깨달음'을 듣게된다. '내가 아닌 것들이 들어와서 나를 바꾸려 한다.(91)는 지은이의 고백은 커피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지은이가 들려주는 커피와 역사 이야기에 흠뻑 빠져 즐기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될지니 무릇 커피 타임이란 술판과 비슷함이 있는 까닭이다.
 
 술판에서 떠도는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으리. 마찬가지로 커피 타임에 오가는 이야기 역시 절반은 거짓이다. 전하와 나는 커피 타임에만 만났으니 우리가 나눈 대화도 절반은 의심스럽다. (188)
 
 
Ⅳ.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다. 각설하고, '끊을 건 과감히 끊고 버릴 건 과감히 버리는 것이 옳다.'(193)  읽던 책을 잠시 놓아 두고 갓끊인 커피 한 잔으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련다. 비록 '노서아 가비'는 아닐지라도….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 그것이 비로 커피라고. (14)
 
 
2009. 7.16. 그렇지요.'매혹의 순간을 망각하기란 불가능하'(20)지요.
 
들풀처럼
*2009-164-07-16
 
 
*책에서 옮겨두다
 
 너무 아껴 뒤로 미루다가 영원히 작별한 다음 후회하는 일들. (21)
 
 '먼 훗날'로 시작하는 약속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약속할 땐 두 사람 모두 진심이더라도, 세월은 둘 사이에 많은 틈을 만든다. 변하지 않는 과거를 붙잡고 살기엔 지금 이 순간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어지럽다. (95)
 
 겨루기 힘든, 전혀 '다른' 상황일 때는 영영 달아나든지 일단 품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중간하게 맞붙었다가는 말만 꼬이고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102)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돌다리를 열 번 백 번 아니 천번이라도 두드릴 것! (118)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칭찬보다 더 값싸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120)
 
 한 굽이를 지나면 또 다른 굽이가 오고, 그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기다린다. 단숨에 돌파할 생각은 버려라. 삶도 사랑도 사기 치는 짓까지도 언제나 첩첩疊疊하다. (121)
 
 보이지 않는 적 때문에 겁을 먹고 숨는다면 평생 마음의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 (147)
 
 황현 선생님의 [매천야록]에 실린 김홍륙의 일화가 [노서아 가비]를 구상하는 데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재주 하나만으로 아관파천 시절 엄청난 부와 권력을 움켜쥐었다가 몰락한, 그 몰락을 견디지 못해 왕이 마시는 노서아 가비에 치사량의 아편을 넣은 사내! 다양한 문헌을 통해 김홍륙의 행적을 검토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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