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노무현 - 대한민국의 가시고기 아버지
장혜민 지음 / 미르북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Ⅰ.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신동엽 산문시 中  (185)
 
 그래. 이런 詩가 어울리는 대통령이 우리에게도 드디어 생겼다고 좋아하던 시간들이 있었지. 비록 이제는 멀리 떠나버린 꿈이 되어 버렸지만. 하지만 우린 그 꿈을 포기하거나 버린 것은 아닐거야. 언제 어디서든 그 꿈은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새롭게 다시 피어오를거야. 그렇지 않겠니.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남은 삶이란 또 무엇일까?
 
 
Ⅱ. 1987년 6월, 부산 남포동에서….
 저는 참 행복한 정치인입니다. 
 다들 선거에 지고 나면 옆에 있던 사람도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외면하는데, 저는 비록 떨어졌지만 더 많은 분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얻고 있으니 저처럼 행복한 정치인은 없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저 하나가 잘 되라는 것보다 나라 전체가 잘 되어야 한다는 기대들이 저에게 쏟아지는 것 같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66)
 
 1987년 6월 10일, 그 날 나도 거리에 있었다. 역사가 시작되는 그 시간에 다행히도 나 역시 그 거리에 있었다. 을지로, 퇴계로, 종로를 돌아 굽이치던 사람들의 물결 속에 나 역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 몫을 다한 대학생활을 보내었다고 생각할만한 자부심의 순간이었다. 
 
 아, 놀라지들 마시라. 그날 그때, 스물 둘, 대학 3학년의 대학생이던 젊은이가 거기 있는 것이 당연한 때였으니까, 그러니까 나 역시 거기 있었다. 삭발과 단식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거리를 내달렸다. 그렇게 1987년 6월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서울이었다. 
 
 그리고 방학, 부산에서 겨우 올라와 다니던 서울생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6월27일이던가. 평화대행진으로 6월항쟁이 절정에 다다르던 그 날, 나는 역시 거리에 있었다. 서면에서 남포동까지 이어지던 그 대열 속에 당연히 함께 있었다. 보도블럭을 깨다 만난 고교+대학동창들과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어쩌다보니 남포동 중심가 극장가 앞까지 나도 진출!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부산극장 앞으로는 전경들이 둘러써서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극장을 보호+포위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전경들의 장막사이에 단 두사람이 의연히 앉아있었다. 당시에 이름만 듣던 인권 변호사 두 사람, 노무현과 김광일로 기억되는 그 순간.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마치 단 둘이 만난듯 기억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팬이었다.
 
 
Ⅲ. 1992년 2월, 부산 국제시장에서….
 바르게 살 것이다
 절대 비겁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49)
 
 대학 4년을 바로 마치고 군에 다녀온 뒤 고교동창 녀석을 만나 남포동-광복동을 거쳐 국제시장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스산한 겨울 저녁무렵이었다. 어디선가 김영삼의 야합, 3당합당 뉴스를 들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지켜온 가치가 쓰레기처럼 내팽겨쳐지고 목표를 위해서 과정은, 수단과 방법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국제시장 골목 어딘가에서 녀석과 나는 굵은 눈물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그날이었던가?  3당합당에 대한 안건이 통과된다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 TV화면에서 만난 믿을 수 없던 그 장면,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62)
 
 라고 외치는 단 한 사람,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정파와 개인의 이익을 쉽게 뛰어넘는 제대로된 정치인 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Ⅳ. 2009년 5월 26일, 새벽, 김해 봉하마을에서….
 도전은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안전한 자리가 되돌아 보이면 도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뛰어라, 도전해라, 뛰어내려라.
 물론 날개짓은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것을 버리면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자기 것을 버려라. 버리면 성공한다. 과감하게 포기하면 성공의 기회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행정자치부 공무원과의 대화 (2003. 8.11) (135)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봉하마을에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김해의 동쪽.  부끄럽다. 좀 더 자리를 잡으면 찾아가 뵈오리라던 다짐은 무엇이었던가?  이제서야 돌이켜보니 더욱 부끄럽다.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이름으로만 가입해 놓았던 노사모 활동의 빈약함에서부터 암울한 요즈음의 정국에 이르기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시간들이 더해진다. 참으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는 순간이었다.
 
 이제서야, 이렇게 되고서야, 아내랑 아이랑 서너시간 기다려 조문을 하는 고작, 이런 행동이라니. 이것이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한 사람에 대한 나의 행동의 전부라니. 더욱 참담한 시간들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여태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정치사적인 의미를 담기보다는, '바보 노무현'이 '바보 노무현 대통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이다. (6) 
 
 이 책을 통해 인간 노무현이나 대통령 노무현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7)
 
 지은이는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나처럼 이런 반성을 할 것임을 알았나보다. 그래, 이제서야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날 이후 살아가는 하루하루 조심스럽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큰사람의 손을 놓아버린 듯한 시간들. 앞으로 어찌 살아야 그 분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어갈 수 있을지…. 
 
 그래도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벌써 한 달이 흘러갔다. 겨우 눈물을 그친 것 말고 내가 달라진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곧 49제가 다가오고 또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은 무심히 흘러갈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쯤 조금은 달라질까?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 시간들, 그 속에서 헤매인다.
 
 하지만 우리는 마침내 일어나 걸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결코 머무르거나 안주하거나 하지말고. 어제보다 한걸음 더, 오늘보다 더 멀리,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터/벅/터/벅    뚜/벅/뚜/벅
2009. 7.4. '이제 다시는 울지 말자!' 고 스스로 다짐하는 밤입니다.
 
들풀처럼
*2009-15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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