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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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에서,   "詩" (112) 부분
 
 화제의 첫시집 [서른,잔치는 끝났다]에서 마지막 시를, "詩"로 등재했던 시인을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물론 그 사이 시인은 몇 권의 시집을 더 출간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첫 시집의 강렬함을 잊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하여 다시 만난 이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에는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녹록치 않은 경험이 녹아 있다. 
 
 순수와 열정의 불씨를 간직하고, //
 자유와 정의가 황금빛 신용카드보다 소중했던 / 시절은 갔다 
 - "10월의 교정"에서 (25)
 
 텔레비전에서 약속들이 쏟아질 때
 나는 책장의 먼지를 털었다. 
 - "내일을 위한 기도"에서 (28)
 
 친구와 수다를 즐기며 이탈리아 식당에서
 칼을 들고 연어의 생살을 갈랐다.
 입 안에 죄의식의 거품을 품지 않고
 - "2008년 6월, 서울"에서 (52)
 
 세월은 흘렀고 젊음도 저물었다. 시인도 나도, 우리도 이제는 세상속에서 묻혀 살아간다. 그렇게 모든 것에 적응하며 잊고 잊혀져 가는 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삶에는 이런 평범한 일상을 뚫고 일어나는 기적같은 일들이 있다. 그런 일들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한 번은 있는 법이고 그 일들이 남은 삶을 버팅기게 하는 법이다.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웟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그렇게 학대했는데도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 "중년의 기쁨" (17)
 
 이 시를 읽으며 나도 웃었다. 어쩌면 부끄럽다 생각할 수도 있을 생리 현상을 이처럼 맛깔나는 글로 표현할 수 있을만큼 시인의 연륜이 깊어졌다는 얘기리라. 물론 그 시를 즐길만큼 나도 늙어간다는 이야기일터이고…. 이 책에는 일상속에서 시인이 느끼는 소소한 감정들이 걸러져서 우리에게 전해져온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느끼고 곱씹으며 우리는 이 시집 속을 즐거이 헤엄칠 수 있으리라.
 
 시인이 전해주는 "일상의 법칙들"(56)은 '수저를 들기 전에 우리는 얼마나 배고픈지 모른다'에서부터 '내게 들어왔던,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 / 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라는 "지루하지 않은 풍경"(70)의 깨달음까지... '生을 위로해주는 음악이 필요없던 / 음악이  위로할 생활이 닥치지 않은' '그때가 좋았'(77)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시인과 비슷한 연배에 동시대를 살아가다보니 더욱 가깝게 여겨지나 보다. 이 시집의 시들이...
 
 하지만 시대가 여유없이 흘러가듯 시인의 생활도 우리의 시간들도 깔끔하게 정제되고 다듬어지기는 힘든가보다. 그만큼 읽어내려가며 예전처럼 가슴을 낚아채는 세련된 글들은 확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래도 물론 몇 편의 절창들은 여전히 이 시집에 있다. 시집이 나오자마가 가장 먼저 언론을 통하여 내게 다가온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 나는 잊었다' (16)로 시작되는 "어느새"는 다시 시작되는 사랑에 대한 설레임을 절절하게 읊어내고 있다. 꼭 한 번 만나들 보시기를…
 
 그러나 내 맘에 들어온 시는 따로 있다. 한 시대를 버팅기며 흘러가며 힘든 시간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살아남아야 함을,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가야 함을 더욱 절실히 깨닫는 오늘, 더욱 가슴에 와닿는 시가 있다.
 
 
 나무는 울지 않는다
 
 추운 날에도, 더운 날에도
 빛을 향해 팔 뻗으며
 나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백년 가뭄에 목이 마르고 등이 휘어도
 친구가 곁에 없어도
 나무는 울지 않는다
 눈 날리는 들판에 홀로 서 있거나
 막다른 골목에서 가슴까지 비에 젖어도
 외롭다 말하지 않는다
 
 지구의 뜨거운 중심에 가까이 뿌리를 내리며 
 나무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 않는다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
 빗물을 받아먹고
 흙을 받아 연명하는
 잎과 줄기와 뿌리가 한몸인 나무는…….
 세월의 나이테에 숨길 것도
 버릴 것도 없는
 - (40)
 
 
2009. 5.31. 이제는 울지 않으렵니다. 다시 일어서는 새벽입니다.
 
들풀처럼
*2009-13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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