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는 지난 한 해동안 발표된 시들중 가려뽑은 작품들로 이 책 한 권이면 우리 시단의 흐름을 일별(一瞥)할 수 있다. 음악으로 치면 모음집에 해당하는 풍성한 시의 향연인 셈이다. 그럼 우리 시의 흐름을 만나러 가보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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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 시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주제나 제제별로 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나눔은 사실상 힘이 들기에 여기서는 그냥 시인의 이름에 따른 책의 분류를 따라 시를 만난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왜 시인의 이름에 따른 나눔인가? 굳이 분류기준이 필요하다면 시인의 이름보다는 발표된 시점 - 시집이나 문학지의 출간일 - 에 따른 구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계절에 따른 향취라도 조금이나마 더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시의 제목에 따라 정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쨋거나 모처럼 시를 만나며 여러가지 생각이 오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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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봄이라 그런지 만나는 시들 가운데 봄처럼 밝고 환한 시어(詩語)들이 먼저 눈속으로 달려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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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백미러가 환해지도록 - 강형철, '이슬비 사용법' 에서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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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탕탕탕 망치질하는 봄 - 길상호,'적선'에서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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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 김선태, '말들의 후광'에서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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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그릇이 되어 눈부셨다 - 박라연, '상황그릇'에서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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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 양문규, '그늘 속에는'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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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환한' 시간들 속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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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운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 누군가가 부쳐온 시집 펼쳐놓는다 - 이재무, '낮잠'에서 (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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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봄날,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시집'을 읽을 수 있는 날들만 넘쳐난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환한' 봄날만큼 우리를 다잡는 시련의 날들도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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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서워서 자꾸만 자꾸만 술을 마시는 것 - 김사인, '박영근'에서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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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설칠 때 / 들녘에 집 잃고 헤매는 - 김완하, '외로워하지 마라'에서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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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해 / 나의 발은 하루 종일 바빴다 - 맹문재,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에서 (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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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이 오가는 뻔한 삶, 이 지리멸렬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 '이 생은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는 것일까,' (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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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 장석주, '몽해夢海 항로' 에서 (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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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천양희, '사라진 것들의 목록' 에서 (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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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 - 황동규, '삶을 살아낸다는 건' 에서 (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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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말들, 그 너머로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이러한 시어(詩語)들의 출렁거림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세상을 만나고 뒤척인다. 그리고 시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향취로 또 하루를, 나날을 버팅기는 것이다. 하여 이렇던 저렇던 우리는 시를 부둥켜안고 함께 이 봄을 건너면 되리라. 한 뼘도 아니고 딱 '반뼘'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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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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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록 가수가 주인인 |
모 라이브 카페 구석진 자리엔 |
닿기만 해도 심하게 뒤뚱거려 |
술 쏟는 일 다반사인 원탁이 놓여있다 |
기울기가 현저하게 차이지는 거기 |
누가 앉을까 싶지만 |
손님 없어 파리 날리는 날이나 월세날 |
은퇴한 록밴드 출신들 귀신같이 찾아와 |
아이코 어이쿠 술병 엎질러가며 |
작정하고 매상 올려준다는데 |
꿈의 반뼘을 상실한 이들이 |
발목 반뼘 잘려나간 짝다리 탁자에 앉아 |
서로를 부축해 온뼘을 이루는 |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
반뼘쯤 모자란 시를 써야겠다 생각한다 |
생의 의지를 반뼘쯤 놓아버린 누군가 |
행간으로 걸어들어와 온뼘을 이루는 |
그런 |
*손세실리아, <월간중앙 8월호>에서, 다시 옮김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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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4. 한줌 빗줄기 그리운 가문 새벽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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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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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6-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