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정진규 외 지음 / 작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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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는 지난 한 해동안 발표된 시들중 가려뽑은 작품들로 이 책 한 권이면 우리 시단의 흐름을 일별(一瞥)할 수 있다. 음악으로 치면 모음집에 해당하는 풍성한 시의 향연인 셈이다. 그럼 우리 시의 흐름을 만나러 가보는데….
 
 가려 뽑은 시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주제나 제제별로 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나눔은 사실상 힘이 들기에 여기서는 그냥 시인의 이름에 따른 책의 분류를 따라 시를 만난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왜 시인의 이름에 따른 나눔인가? 굳이 분류기준이 필요하다면 시인의 이름보다는 발표된 시점 - 시집이나 문학지의 출간일 - 에 따른 구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계절에 따른 향취라도 조금이나마 더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시의 제목에 따라 정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쨋거나 모처럼 시를 만나며 여러가지 생각이 오간다.
 
 때가 봄이라 그런지 만나는 시들 가운데 봄처럼 밝고 환한 시어(詩語)들이 먼저 눈속으로 달려든다.
 
 오토바이 백미러가 환해지도록 - 강형철, '이슬비 사용법' 에서 (12)
 
 심장이 탕탕탕 망치질하는 봄 - 길상호,'적선'에서 (21)
 
 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 김선태, '말들의 후광'에서 (29)
 
 뿌리 깊은 그릇이 되어 눈부셨다 - 박라연, '상황그릇'에서 (64)
 
 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 양문규, '그늘 속에는' (101)
 
 이처럼 '환한' 시간들 속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꽃 피운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 누군가가 부쳐온 시집 펼쳐놓는다 - 이재무, '낮잠'에서 (142)
 
 이처럼 봄날,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시집'을 읽을 수 있는 날들만 넘쳐난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환한' 봄날만큼 우리를 다잡는 시련의 날들도 있는 것이다.
 
 너무 무서워서 자꾸만 자꾸만 술을 마시는 것 - 김사인, '박영근'에서 (28)
 
 깊은 잠을 설칠 때 / 들녘에 집 잃고 헤매는 - 김완하, '외로워하지 마라'에서 (40)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해 / 나의 발은 하루 종일 바빴다 - 맹문재,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에서 (58)
 
 희망과 절망이 오가는 뻔한 삶, 이 지리멸렬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 '이 생은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는 것일까,' (127)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 장석주, '몽해夢海 항로' 에서 (158)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천양희, '사라진 것들의 목록' 에서 (176)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 - 황동규, '삶을 살아낸다는 건' 에서 (187)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말들, 그 너머로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이러한 시어(詩語)들의 출렁거림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세상을 만나고 뒤척인다. 그리고 시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향취로 또 하루를, 나날을 버팅기는 것이다. 하여 이렇던 저렇던 우리는 시를 부둥켜안고 함께 이 봄을 건너면 되리라. 한 뼘도 아니고 딱 '반뼘'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반뼘
 무명 록 가수가 주인인
 모 라이브 카페 구석진 자리엔
 닿기만 해도 심하게 뒤뚱거려
 술 쏟는 일 다반사인 원탁이 놓여있다
 기울기가 현저하게 차이지는 거기
 누가 앉을까 싶지만 
 손님 없어 파리 날리는 날이나 월세날
 은퇴한 록밴드 출신들 귀신같이 찾아와
 아이코 어이쿠 술병 엎질러가며
 작정하고 매상 올려준다는데
 꿈의 반뼘을 상실한 이들이
 발목 반뼘 잘려나간 짝다리 탁자에 앉아
 서로를 부축해 온뼘을 이루는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반뼘쯤 모자란 시를 써야겠다 생각한다
 생의 의지를 반뼘쯤 놓아버린 누군가
 행간으로 걸어들어와 온뼘을 이루는
 그런
       *손세실리아, <월간중앙 8월호>에서, 다시 옮김 (83)
 
2009. 4.4. 한줌 빗줄기 그리운 가문 새벽입니다.
 
들풀처럼
*2009-09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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