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옹"해 드리리다.
   - 정호승 시집 "포옹"(2007년)을 읽고
 
삶이 고달파질수록 사람들은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어지거나 스스로를 낮추게 됩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이후 3년만에 만난 시인은 후자의 길을 택한 듯 보입니다.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때가 언제이던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대 옆에 남아 무덤이 되고 싶던 날들은 가고
 - '흐르는 서울역'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년)에서
 
잔치는 사라지고 국수만 먹고 있다 
 - '잔치국수'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
 - '바닥에 대하여'
폭설이 내린 날 / 내 관을 끌고 올라가리라
 - '나의 수미산'
"이 짧은 시간 동안"(2004년)에서
 
예전의 시집들에서 이미 예감되었던 시인의 우울, '삶의 바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그러안으며 나아가는 그의 자세는 이번에도 변함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개인 신상에 큰 변화가 있었거나 어떤 계기가 있었던 듯 합니다만 시인의 마음을 다 알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사랑의 서정시인'으로 불리우던 그에게서 더 깊어진 절망의 노래를 듣는 일은 괴롭기까지 합니다.
 
기러기 한 마리 / 툭 /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 '빈틈'
가는 발목에 끈이 묶여
 - '끈'
내 눈물의 깊이는 재어보았니
 - '수표교'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 이제 알겠다
 - '스테인드 글라스'
더러운 내 손이 떠내려간다
 - '손'
 
"포옹"의 앞부분만 슬쩍 훑어 보아도 보이는 시어들, '떨어져 죽어 있는','묶여','눈물의 깊이','산산조각','더러운 내 손' …스스로에 대한 끝까지 가는 낮춤으로 보입니다.
이 바닥까지 가는 낮춤에서 그친다면 시인의 시는 한탄과 자조로만 끝날 것입니다.그러나 시인은 역시 시인,그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희망의 기운을 발견할 줄 압니다.
 
사람 사는 일 / 누구나 마음 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 다시 허물고 마는 일
 - '지하철을 탄 비구니'
내가 휘청거리면서 그래도 쓰러지지 않는 것은 
내 눈물에도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고
 - '마디'
나는 오늘도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내 죄의 감자를 한꺼번에 다 집어넣고 씻는다
내 사랑에 묻어 있는 죄의 흙을 제대로 씻기 위해서는
죄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게 해야 한다
 - '감자를 씻으며'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 지라도
 - '넘어짐에 대하여'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음에도 여러 편의, 시인다운, 멋진 시들을 보여줍니다. '유등','밤의 연못','포옹','집 없는 집','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등의 시에서 그만의 서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풍경화로도 아름답게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시 한 닢 띄워 올립니다.
 
등대는 인간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설악을 등지고 방파제에 앉아
허겁지겁 활어회를 먹는 인간들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외롭고 쓸쓸한 갈매기들에게 소주 한 잔 건네지 않고
저 혼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들이 마냥 미웠던 것은 아니다
바다의 상처가 섬이 된 줄 모르고
해가 지도록 바닷가에 앉아 모래를 헤아리다가
결국 모래가 되어버린 인간들이 결코 안타까웟던 것은 아니다
다만 평생 감동 없는 밥을 먹는 인간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을 뿐이다
속초항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어등을 끄고 코를 골며 자는
저 지친 오징어잡이배들을 설악으로 끌고 가 잠들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징어와 명태와 고등어와 또 넙치들이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정히 불을 밝히다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고요히 늙어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진정으로 살아보지도 않은 채 죽어간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등대는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인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 '무인등대'

얼마 안 있어 따뜻한 목소리로 부르는 시인의 노래를 들으리라는 희망으로

그를 뜨겁게 '포옹'합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부러진 나무젓가락과 먹다 만 단무지와 낡은 칫솔 하나뿐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2007. 11. 15. 흔들리는 서울, 지하철 3호선에서
 
들풀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