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카민스키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3
다니엘 켈만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비는 왔다가 가는 것이지요." 보고비치가 말했다. "그게 비가 하는 일입니다." (36)
 
Ⅰ.
 "이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 모두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는 통에 정신이 없어. 게다가 몇몇 이야기는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엇갈리는 부분은 또 얼마나 많은지. 어떻게 해야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거지?" (205)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이지. '진실'은 늘 곁에 있는 듯 하지만 쉽게 손에 잡히거나 내게 스스로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지. 그런데 우리는 이런 평범한 진리를 알면서도 늘 그냥 안다고만 생각하지.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인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지.
 
Ⅱ.
 젊고 명민한 작가가 들려주는, 유쾌한 반전이 있는 예술과 삶에 대한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은 마누엘 카민스키라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의 전기를 집필하여 성공을 꿈꾸는 예술사가 세바스티안 쵤너의 좌충우돌 여행기?이다. 심리소설처럼 때로는 스릴러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예술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치를 한껏 비웃고 뒤틀어서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눈이 멀어가며 은둔하는 老화가의 생활 속에 난데없이 뛰어든 주인공 '나', '쵤너'의 고군분투는 찻잔 속 태풍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살아있는 화가의 전기를 써두었다가 사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보겠다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우스워보이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랴. 주인공 쵤너는 애인에게서도 헤어질 것을 통보받고 있는 열악한 상황에다가 진행하는 이 일조차 뜻한바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죽도록 어려운 일입니다. 한 마디로 나는 눈이 멀어 가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49)
 
 " ~  쵤너 씨, 세상 모든 일에는 갖가지 사연과 이유가 깃들어 있기 마련이오. 하지만 진실은 항상 가장 진부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라.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의 생각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 " (69)
 
 "어떤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건 간에 나는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네. 자네도 그럴거야. 안 그런가? 인생이란게 뿌린 대로 거두기 나름 아닌가?" (173)
 
 화가 카민스키가 쵤너에게 들려주는 몇마디 이야기들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면서도 평상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런 말들이다. 지역도 다르고 세대는 달라도 사람 사는 속내는 같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여기서 느낀다. 
 
 그런 삶, 그러니까, 좌충우돌,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쵤너의 삶은 우리네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다. 하여 카민스키와 쵤너의 동행중 일어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우리를 웃기게도 하고 안타깝게도 만들면서 삶의 진실에 가깝게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늙은 - 아니 늙었지만 주인공보다 훨씬 똑똑하고 현명한 카민스키의 입을 통하여 우리가 듣는 이런 이야기는 삶의 지표로 삶아도 좋을 만한 선언같은 것이다.
 
 "나는 위대한 화가는 못 돼. 벨라스케스, 고야, 렘브란트와 같은 급의 화가는 못 된다는 뜻일세. 하지만 때때로 나는 매우 뛰어난 그림들을 그렸지. 이건 그리 작은 일이 아닐세. 그 모든 것이 바로 그 닷새 덕분이었어." "그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쵤너, 자네가 해야 일은 인용이 아니라 느끼는 것일세! " ~ "우리는 도약을 통해서만 인생의 중요한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네." (176)
 
 그런 것이다. 우리는, 특히 나는,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재단하고 비평하는데만 몰두해왔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서는 길이라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삶이란, 삶의 진실이란 아는만큼 움직이고 실천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카민스키의 지적처럼 명확하게 '인용이 아니라 느끼는 것'만이 '도약'을 이뤄낼 수 있는 바른 길이자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도약'은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약은 순간, 어느 순간 훌쩍 이뤄진다. 마치 물이 끓는 것처럼 말이다. 물은 빗금으로 사다리처럼 끓어 오르지 않는다. 99.9℃에서 100℃로 가며 어느 순간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것이다. 80℃에서 30%, 90℃에서 50%..... 이런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필요한 것은 뭐? 끓어오를 때까지 풀무질을 하는 것이다. 책에는 그 정답까지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소." 카민스키가 말했다. "그리는 게 중요하지." (189)
 
 이처럼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명성이나 명예, 옛날에 잘 나가던 추억이 아닌 것이다. 카민스키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로 그 것,  '그리는' 것, 그래, 그리는 사람이 화가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여기에 물을 끊게 하는 원칙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일, 자기가 하는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그 일이 어떠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Ⅲ.
 참, 잊지 마시라. 어쩌다보니 마치 자기계발서를 읽은 듯하지만 이 책은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다. 그림과 화가에 얽힌 이야기들, 전시회, 주인공과 화가의 탈출?, 수 십년 전 사랑을 찾아가는 여행, 휴게소에서 도난당하는 BMW, 옛사랑과의 만남,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동굴 속 헤매임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가 이어지기에 실제 읽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지난 번에 만난 [엉덩이에 입맞춤을]과는 또 다른 모습의 웃음과 함께 만날 수 있는 이야기, 자신있게 권해드린다. 마지막 반전은 각자 즐기시기를….
 
 "진실은 오로지 분위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려진 형태가 아니라 색채 속에서. 정확하게 포착된 소실점은 진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 " (167)
 
 
2009. 3.21. 깊은밤, "나도 어딘가로 향해 가야만 한다." (210) 
 
들풀처럼
*2009-085-03-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