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공책의 비밀 - 오달지기 풍물굿 이야기 눈높이 어린이 문고 19
윤미숙 글, 박지훈 그림 / 대교출판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풍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의 즐거운 마음을 위해서, 풍물이 있을 뿐이다.  단 한 번의 굿판이 마당에 벌어지려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했다. 상쇠에서부터 굿패들, 먹거리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심지어 길 가는 구경꾼까지도 흥에 겨워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날의 햇살도, 지나가는 바람도, 마당의 풀 한 포기까지도 서로 다른 마음으로 굿판에 뛰어들 순 없었다. (136)
 
 짧은 몇 줄로 우리 풍물굿을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글이 또 있을까. "제16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마춤한 문장이다. '오달지기 마을'의 풍물굿과 그 내림,전승에 관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면서도 전혀 낯설거나 어색함이 없이 한 판 굿거리장단처럼 우리를 이끌고간다. 이 책, 거/두/절/미, 무조건 만나보시기를….
 먹이가 없어지면 좋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먹이진성이에게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함께 즐겁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122)
 
 오달지기 마을의 '상쇠'자리를 둘러싼 주인공 진성이 아버지의 마음씀- 자신의 아들 진성이를 다음세대의 상쇠로 키우려는 - 과 아이들의 자라남, 주인공 진성이와 마을의 업동이 먹이의 꽹과리 소리, 친구 금옥이판동이까지…. 마을 전체가 풍물굿판으로 어우러지는 흐뭇한 풍경들…그 속에서 오가는 자리를 둘러싼 약간의 해프닝조차 함께 어우러져 넘어가는 가락처럼 들려온다.
 
 분위기가 오르자 할아버지도 웃으셨다. 기운이 없어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바로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힘으로 살아오셨다. 그 힘은 농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 주었다. (27)
 
 우리 풍물의 가락에 한번쯤 빠져본 경험이 있거나 곁에서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그 소리가, 그 가락이 우리네 가슴을 흔들어 어깨를 들썩이게 하거나 함께 손 내밀어 더덩실 춤을 추게 하는지 알 것이다. 어울려 노는 놀이를 통한 즐거움이 집단의 '신명'으로 표출되는 순간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서나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되는 것이다.
 
 "진성아, 풍물은 하늘이 내린 음악이여. 온 마음을 다했을 때, 비로소 곧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겨." (30)
 
 진성이 할아버지가 진성이에게 들려주는 말씀이다. 다른 일도 그러하듯이 풍물 역시 '온 마음을 다했을 때, 비로소 곧은 소리'로 내게 다가 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는 바로 그 때가 득음하는 순간이며 진성이가 친구와의 경쟁심을 뛰어넘어 풍물 자체에 매혹되는 순간인 것이다. 소리는 그처럼 온마음을 다해야만 만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귀가 막혔어도 먹이처럼 듣는 아이도 있다. 들으려고 하면 어떻게든 듣는 것이다. 진정으로 듣는 것은 마음으로 듣는 것이지 귀로 듣는 게 아니었다. (170)
 
 책에 등장하는 진성이의 친구, 진성이보다 꽹가리 가락을 더 잘하던 친구 먹이는 어릴적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소리를 낼 줄 안다. 여럿이 어우러지는 풍물 속의 어려운 꽹가리 가락까지 똑같이 다룰 줄 아는데 그 비밀이 풍물굿의 장면 장면을 하나하나 그려놓은 '소리 공책'에 있었다는 사실, 함부로 따라하거나 어설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한 박자 한 박자까지 느끼고 체현할 수 있도록 그려놓은 공책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노력하는 사람을 쉬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 끝내 진성이의 아버지까지 먹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 아이에겐 혼이 담겨 있어. 저 아이가 들을 수 있는 것은 풍물을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이야. 먹이에겐 소리를 지켜 나가려는 혼이 담겨 있어. 혼은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있는게 아니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절실함에서 그 혼 또한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지.' (179)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이야기의 소재가 우리 것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방식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진성이의 마음과 아버지와의 갈등, 먹이를 이해하고 보듬어 나가는 진성이의 자라남 등이 따듯하게 펼쳐지고 있다. 게다가 함께하는 그림이 이야기의 장면들을 제대로 받쳐주며 살갑게 어울리고, 다루어지는 우리말도 무척이나 풍요롭다. 풍물굿 자체가 우리네 옛선조들로부터 이어져오는 오랜 풍습이기도 하거니와 풍물 자체와 관련된 낱말들도 이 책을 통하여 두루 만날 수 있어 더 좋다. 끝부분에 그 낱말들만 따로 정리가 된다면 더 더욱 좋으리라.
 
 먹이 집으로 가는 길에, 반달이었던 달 몸에 살이 오르고 있었다. (128)
 
 '달 몸에 살이 오르고 있었다'는 표현이 너무 멋지고 맘에 든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노니, 이 책, 얼른 만나보시기를….
 
2009. 3. 16. 우리네 이야기에도 '살이 오르고 있'는 기쁜 밤입니다.
 
들풀처럼
*2009-08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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