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제서야 여행자를 따라나섭니다. 오랜전 여행자가 걸었던 그 길을, 그 멀고도 험하고 어려웠던 길을, 저는 책상에 앉아 편안하게 장군도 만나고 여행자도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면서 길을 나섭니다. 아니 길은 진즉에 나섰던 길입니다.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시간까지 누천년, 그 긴 시간동안 지나온 길에 어찌 여행자 외에 다녀간 이들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그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엿을뿐 이야기는 길마다 차고 넘쳐 흐릅니다. 지금 이 곳에도 그 길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때, 가장 먼저 그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 여행자의 이야기로부터 아득한 시간입니다. 저같은 또 다른 여행자들이 길을 나서곤 있지만 이제는 변해버린 시공간속에 그때의 흔적들을 찾는다는 것은 당연히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오히려, 그러하기에 저같은 또 다른 사람들이 먼저 길을 가신 여행자를 따라 나섭니다. 전해주신 이야기에서 사라져버린 여행자와 장군의 이야기도 오늘날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돌아오거늘 우리가 나서는 이 길에서 또 다른 어떤 이야기들을 찾아와 이웃들에게,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바입니다. 하여 저는 이 밤도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저를 출가로 이끈 것은 지극한 불심이라기보다는 멈춰 있지 않겠다는 의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가겠다는 바람입니다. (31)
 
 그 의지, 그 뜻이 저를 자꾸만 머나먼 그 곳으로 이끌어갑니다. 아는 바가 모자라고 준비된 바도 없지만 그 뜻 하나만 바라보고 따라 나섭니다.
 
 여행이란 마을을 떠나 마을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마을을 벗어나지 않으면 다음 마을로 들어갈 수 없지요. 하나의 문장을 마치지 않고는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여행기처럼. (35)
 
 그 '과정'을 모르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사진 두어장 찍고 훌쩍 돌아서 떠나던 길, 그 길을 여행이라 여기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외도가 고개 숙여 제 시커먼 맨발을 내려다봅니다. "당신은 도를 구하는 삶이 부끄럽습니까? 내 알몸은 당신의 맨발과 같습니다." (40)
 
 책을 읽으며 지나온 시간들이 부끄러워지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옛사람의 발길을 따가가는 것조차 힘겨워지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머무는 곳은 바람 속입니다. 길 위에서 목숨이 다한 이들에게 뜨거운 우애를 느끼고 그들의 발바닥에 합장합니다.  바람의 시간입니다. (98)
 
 길을 따라 걸으며 스스로를 정리하는 시간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여 그 길의 이야기들을 제 이야기처럼 느끼며 다시 걸음을 옮겨봅니다.
 
 제가 싫어도 만날 불행은 닥치고 제가 좋아서 기대하는 행복은 비켜가는 법입니다. 첫 만남의 설렘은 여전하지만 거기에 전부를 걸진 않습니다. 사람에도 사물에도. (179) /  벽이 완성되자 남자는 양손으로 힘껏 벽을 밀어 무너뜨립니다. 다시 처음부터 노래가 시작됩니다.  망자들을 부릅니다. (181)
 
 이 길, 따라가는 길이지만 너무 멀고 아득합니다. 이야기는 비켜가고 여행자는 기억을 잃고 헤메이고 믿었던 장군도 죄인으로 몰리고 역병에 걸려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고 어디로 따라가야 새 길이 열릴런지요?
 
 많은 여행자들이 길 위에서 죽거나 사라지는 이유는 단 하나, 호기심 때문이란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습니다. 처음 세운 여행의 목표와는 무관한  일인데도, 그곳 그 자리에서는 그 일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여행자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탓입니다.  짧게 줄여  '호,기,심'이겠지만 그 마음은 삼만 근보다 무겁고 삼천 리보다 멉니다. (316)
 
 저 또한 그러합니다. 그 많은 길들을 다 뒤로하고 이 길에 여행자를 따라나섰던 것도 '호기심'때문이고 하루 일 마치고 집에 들어와 피곤한 몸으로도 악착같이 책을 손에 들고 따라 걸은 까닭도 '호기심'때문입니다. 저도 여행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잃었으니 가엾고 가엾다, 여행자는 웁니다. ~  글로는, 이야기로는 당장 자비심을 천하에 비출 듯 굴지만 제 앞에 닥친 불행 때문에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원망하는, 원망은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는 욕심쟁이,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제가 아닌 사람이 되리라,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걸으리라 맹세했지만 제 안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채 머물렀습니다. ~ 울음이 멈추자 빛이 쏟아집니다. (325)
 
 저 역시 그러합니다. 여행자가 울면 함께 웃고 여행자가 울음을 멈추면 같이 멈춥니다. 제게도 빛이 쏟아질까요?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자마자 새로운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옵니다. (2권, 38) 
 
  이 길에서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대체 '그까짓 이야기가 무엇이기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겁니까?' ~ '이야기는 욕심을 삼키고, 비겁을 삼키고, 마을을 삼키며 부풉니다'(2권,284) 
 
 드디어 여행자는 자신이 손수 기록한 그 양피지들을 태웁니다. '양피지가 없으면 온전한 여행기를 완성할 수 없'(2권,3366)다는 걸 알지만 '죽음보다 더한 집착을 털어 내'(2권,337)고 '기록보다 먼저 죽은 이들에게 편안한 잠을 선사하'(2권,337)기 위하여 양피지를 스스로의 손으로 태웁니다.
 
 하지만 '주민들이 모두 떠나 폐허로 남더라도, 그곳이 마을일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끔 그 마을에서의 한 시절을 추억하는 동안, 마을은 아직 마을이지요. 마을에 대한 기록이 오래 남아 전해진다면, 영원한 사라짐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2권,276)  하여 그 머나먼 시간의 이야기들을 여행자가 전하지 아니하여도 다른 누군가가, 이야기꾼인 이 지은이처럼 자상하게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따라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서는 겁니다.
 
 걷고 또 걷고, 따라가는 길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여행자를 따라 나섭니다. 제 곁을 보니 저뿐만이 아닙니다. 여행자의 노래를,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길을 나선 이 사람들, 우리는 길 위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네 삶이 아름다우면 그네들 삶도 아름답고, 우리네 삶이 비루하면 그네들 삶도 비루하고, 우리네 삶이 영악하면 그네들 삶도 영악하고, 우리네 삶이 힘겨우면 그네들 삶도 힘겹습니다. (2권,370)
 
 
2008.9.28. 그럼요,사람사는 곳 어디나 똑같아야지요. 다시 배웁니다.
 
들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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