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서야 여행자를 따라나섭니다. 오랜전 여행자가 걸었던 그 길을, 그 멀고도 험하고 어려웠던 길을, 저는 책상에 앉아 편안하게 장군도 만나고 여행자도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면서 길을 나섭니다. 아니 길은 진즉에 나섰던 길입니다.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시간까지 누천년, 그 긴 시간동안 지나온 길에 어찌 여행자 외에 다녀간 이들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그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엿을뿐 이야기는 길마다 차고 넘쳐 흐릅니다. 지금 이 곳에도 그 길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때, 가장 먼저 그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 여행자의 이야기로부터 아득한 시간입니다. 저같은 또 다른 여행자들이 길을 나서곤 있지만 이제는 변해버린 시공간속에 그때의 흔적들을 찾는다는 것은 당연히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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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오히려, 그러하기에 저같은 또 다른 사람들이 먼저 길을 가신 여행자를 따라 나섭니다. 전해주신 이야기에서 사라져버린 여행자와 장군의 이야기도 오늘날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돌아오거늘 우리가 나서는 이 길에서 또 다른 어떤 이야기들을 찾아와 이웃들에게,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바입니다. 하여 저는 이 밤도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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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를 출가로 이끈 것은 지극한 불심이라기보다는 멈춰 있지 않겠다는 의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가겠다는 바람입니다.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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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의지, 그 뜻이 저를 자꾸만 머나먼 그 곳으로 이끌어갑니다. 아는 바가 모자라고 준비된 바도 없지만 그 뜻 하나만 바라보고 따라 나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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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란 마을을 떠나 마을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마을을 벗어나지 않으면 다음 마을로 들어갈 수 없지요. 하나의 문장을 마치지 않고는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여행기처럼.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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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과정'을 모르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사진 두어장 찍고 훌쩍 돌아서 떠나던 길, 그 길을 여행이라 여기던 시간들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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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지 않습니까?" 외도가 고개 숙여 제 시커먼 맨발을 내려다봅니다. "당신은 도를 구하는 삶이 부끄럽습니까? 내 알몸은 당신의 맨발과 같습니다."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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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며 지나온 시간들이 부끄러워지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옛사람의 발길을 따가가는 것조차 힘겨워지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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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머무는 곳은 바람 속입니다. 길 위에서 목숨이 다한 이들에게 뜨거운 우애를 느끼고 그들의 발바닥에 합장합니다. 바람의 시간입니다.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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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따라 걸으며 스스로를 정리하는 시간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여 그 길의 이야기들을 제 이야기처럼 느끼며 다시 걸음을 옮겨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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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싫어도 만날 불행은 닥치고 제가 좋아서 기대하는 행복은 비켜가는 법입니다. 첫 만남의 설렘은 여전하지만 거기에 전부를 걸진 않습니다. 사람에도 사물에도. (179) / 벽이 완성되자 남자는 양손으로 힘껏 벽을 밀어 무너뜨립니다. 다시 처음부터 노래가 시작됩니다. 망자들을 부릅니다. (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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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 따라가는 길이지만 너무 멀고 아득합니다. 이야기는 비켜가고 여행자는 기억을 잃고 헤메이고 믿었던 장군도 죄인으로 몰리고 역병에 걸려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고 어디로 따라가야 새 길이 열릴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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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여행자들이 길 위에서 죽거나 사라지는 이유는 단 하나, 호기심 때문이란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습니다. 처음 세운 여행의 목표와는 무관한 일인데도, 그곳 그 자리에서는 그 일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여행자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탓입니다. 짧게 줄여 '호,기,심'이겠지만 그 마음은 삼만 근보다 무겁고 삼천 리보다 멉니다. (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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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또한 그러합니다. 그 많은 길들을 다 뒤로하고 이 길에 여행자를 따라나섰던 것도 '호기심'때문이고 하루 일 마치고 집에 들어와 피곤한 몸으로도 악착같이 책을 손에 들고 따라 걸은 까닭도 '호기심'때문입니다. 저도 여행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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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신을 잃었으니 가엾고 가엾다, 여행자는 웁니다. ~ 글로는, 이야기로는 당장 자비심을 천하에 비출 듯 굴지만 제 앞에 닥친 불행 때문에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원망하는, 원망은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는 욕심쟁이,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제가 아닌 사람이 되리라,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걸으리라 맹세했지만 제 안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채 머물렀습니다. ~ 울음이 멈추자 빛이 쏟아집니다. (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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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역시 그러합니다. 여행자가 울면 함께 웃고 여행자가 울음을 멈추면 같이 멈춥니다. 제게도 빛이 쏟아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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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자마자 새로운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옵니다. (2권,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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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에서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대체 '그까짓 이야기가 무엇이기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겁니까?' ~ '이야기는 욕심을 삼키고, 비겁을 삼키고, 마을을 삼키며 부풉니다'(2권,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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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여행자는 자신이 손수 기록한 그 양피지들을 태웁니다. '양피지가 없으면 온전한 여행기를 완성할 수 없'(2권,3366)다는 걸 알지만 '죽음보다 더한 집착을 털어 내'(2권,337)고 '기록보다 먼저 죽은 이들에게 편안한 잠을 선사하'(2권,337)기 위하여 양피지를 스스로의 손으로 태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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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주민들이 모두 떠나 폐허로 남더라도, 그곳이 마을일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끔 그 마을에서의 한 시절을 추억하는 동안, 마을은 아직 마을이지요. 마을에 대한 기록이 오래 남아 전해진다면, 영원한 사라짐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2권,276) 하여 그 머나먼 시간의 이야기들을 여행자가 전하지 아니하여도 다른 누군가가, 이야기꾼인 이 지은이처럼 자상하게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따라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서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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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고 또 걷고, 따라가는 길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여행자를 따라 나섭니다. 제 곁을 보니 저뿐만이 아닙니다. 여행자의 노래를,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길을 나선 이 사람들, 우리는 길 위에서 하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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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삶이 아름다우면 그네들 삶도 아름답고, 우리네 삶이 비루하면 그네들 삶도 비루하고, 우리네 삶이 영악하면 그네들 삶도 영악하고, 우리네 삶이 힘겨우면 그네들 삶도 힘겹습니다. (2권,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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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9.28. 그럼요,사람사는 곳 어디나 똑같아야지요. 다시 배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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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풀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