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만남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때마다 주어지는 밥이 사슬이지 않더냐. 굶주림을 두려워하면 들판의 이리가 되지 못한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먹으면 되는데 날마다 너무 많이 퍼먹기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을 쓰고 있구나. 그러다 인생이 끝나고 마는구나. 
 
 삶이란 흔들리는 것이고 균형을 잃었다가 이내 다시 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되돌아 오는 불안정한 체계인 것이다. 오직 죽은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삶의 원칙이다. 
 
 마흔 여섯 살에 매일 아침 짐을 꾸려 여관 문을 나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날마다 두려움 속을 걸었던 그곳들이었다.
 - 이상 "개정판 서문"에서 
 
 오직 버리기 위해 떠난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 매일 걸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배낭 하나도 무거운 짐이다. 무엇을 더 담아 올 수 있겠는가? 
 - "초판 서문"에서
 
 책을 들고 "서문"을 읽어내려가자마자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지난날 나를 괴롭히던 질문들을 나는 용케도 피해다녔는데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도전하여 그 답을 찾아내었구나, 아, 내가 그때 나에게 좀 더 진실되게 묻고 돌아보고 하였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읽는 순간순간이 여러가지 까닭으로 '떠님과 만남, 그리고 돌아봄'의 시간이 되는 것이었다.
 
 남도여행일지이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나섰던 중년의 사내 이야기가 진솔되고 맛깔지게 버무러져 읽는 이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지은이의 글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국'같은 솜씨이다. 부럽고 또 부럽다.'
 
 섬진강, 강진, 다산초당, 하동 쌍계사 등은 최근에 다 다녀본 곳이건만 나는 그 곳에서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돌이킴을 안고 돌아왔던지…. 물론 혼자 떠난 여행들이 아니었기에 깊은 사색의 시간은 힘들었을지라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만나보는 순간은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지은이와 내가 갈라지는구나. 떠날 줄만 알았지 돌아볼 줄은 몰랐었구나.

 



 
            - 2007봄, 섬진강 - 방생중인 어르신들
 

 

 이 고운 곳에도 술병들이 깨져 뒹굴고 있다. 세상의 망나니들도 섬진강 예쁜 줄은 안다. 빡빡한 세상살이 어려우면 여기 섬진강 둑에 앉아 소주 한 병 벌컥거리며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자신을 버리고 갔을 것이다. 나뒹구는 소주병을 보며 그날 그 어줍짢은 사람이 처진 어깨로 떠난 뒷모습을 본다. 어느 날 다시 돌아오너라. 그래서 섬진강둑에 버리고 간 자신을 되찾아 가거라. 소주병도 함께. ( '매화 향 가득하니, 봄이다!'에서) (28)
 
 섬진강가의 깨진 술병을 두고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내게는 '절창'으로 들린다.  '그런 치유의 은밀한 장소와 시간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는가?'(163) 문득 내게는 그런 장소가 있던가, 돌이켜보니 바로 이 곳, 책과 글 속이다. 내 한 몸 누일 물리적 공간보다 나는 책 자체로 휴양을 즐겼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내 나이도 불혹을 넘어 종반으로 달려가고 있고 지은이처럼 '몸'자체를 혼자 누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대가 다가오나보다. 가끔씩 혼자있고 싶은 시간들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일을 하며 마음의 공부를 해야 한다'(184)는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얼마나 공부를, 특히 마음공부를 하는지 돌이켜보아야 할 때이다. 따라잡기 힘든 변화의 물결속에서도 자신의 마음하나만 제대로 중심을 잡고 있다면 그 변화 속을 헤쳐나갈 등불을 밝히는 셈이리라.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그런 불빛중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글과 아름다운 풍경 사진, 그리고 생각할 거리. 한 번 보고 던져두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휴식은 자신에게 선사한 따뜻한 시간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겠는가?'(322) 이 책을 읽는 시간 자체가 내게는 휴식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 천천히 음미하듯이 글을 읽었던 것이리라.  '바라는 대로 되는 세상은 아니지만 세상이 만들어주는 대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312) 그가 그랬듯이, 나 역시도….
 
 책 속에 등장하는 남도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혼자 두고 보련다. 그의 발길을 따라 다녀온 이야기들도 넘쳐나고 나만의 추억들도 갈무리해야겠기에…다만 그에게서 배운 여행을 바라보는 관점하나는 꼭 함께 익히고 가야할 것이다. 앞으로의 여행을 위하여서도….
 
 오늘 산을 타고 넘으려던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아쉬움은 없다. 나는 오늘 하루를 아주 잘 보냈다. 내가 오늘계획한 것은 산을 넘는 데 있다기보다는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행복했고, 더 바랄 것이 없다. ('아무 계획 없이, 아무 목적 없이'에서) (209)
 
 
2008. 8. 3. '취해 자다 또 일어나 읽고 버리고 기록한다'(168).  나도 ^^
 
들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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