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미술사 -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이진숙 지음 / 민음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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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12세기 이콘화부터 21세기 현대 미술까지',  '이야기가 있는 러시아 그림 여행'… 모두 책 표지 안팎에 쓰여 있는 글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그대로다. 독문학을 전공하던 지은이가 러시아 여행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에 크게 감명받아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어 삶의 항로를 바꾸고서 써게 된 이 책은 그의 말처럼 '이야기의 힘'을 전해주고 그가 느낀 감동과 열광을 고스란히 만나게 한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말과 행동이 크게 울리고 불꽃처럼 튀는 나라, 이 나라의 '격렬한 삶'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왔다. ~ 천 년의 러시아 문화사는 ~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하게 사는 것 혹은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에서 진실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이었다. ('서문'에서) (11)
 
 그림에 대한 지은이의 상세하고 자상한 설명은 그림, 특히 러시아 미술에 문외한인 나같은 이에게도 그들의 삶과 역사를 오롯이 만나게 해주는데 이는 전적으로 지은이의 글솜씨이다. 잔잔하면서도 짚어줄 곳은 다 짚어가며 그림 속으로 혹은 그림이 창작되었던 시대적인 배경에서부터 작가가 고뇌하는 현장까지 마치 눈 앞에서 보듯 선명하게 그려낸다. 너무 상세하다 보니 스스로 다른 생각을 갖는다는게 오히려 힘들 정도이다.
 
 농민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땅에 발을 딛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생활하며 자연과 하나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서 자연 외광의 중요성을 발견한 최초의 러시아 화가였다. ~ 봄이 오는 하늘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새털구름이 가득하다. 이 아늑하고 따뜻한 봄 하늘은 아직 메마른 땅을 보드랍게 감싸고 있다.~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의 <경작지,봄>을 설명하는 글에서) (105)
 
 너무 길어 다 옮겨보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의 그림들에 대하여 이처럼 상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는 그냥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여도 러시아 미술사, 1000년의 문화, 그 정수를 느끼고 즐길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러시아 문화를 미술사적인 입장에서 시대순, 그리고 각 그룹-유파,사조의 전개에 따라 서술하고 있어 미술사를 공부하는 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책이다. 그림과 이야기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화보집이기도 하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이콘화(이콘=아이콘=중세 미술에서 예수와 성모,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형상) 가운데서도 드러나는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세 미술을 감상하는 묘미다. ('슬픈 눈의 성모'와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35) - 1장 <러시아 이콘화> 에서
 
 중세 미술의 기반 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구원과 희망을 바라는 민중들의 삶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삶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우선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초상화의 황금시대') (81) - 2장 <표트르 대제와 미술의 근대화> 에서
 
 그리고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변해가는 러시아의 근대화 물결 위에서 새로운 사조의 작품들이 쏟아지지만 아직 지은이의 지적처럼 '삶에 대한 태도'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삶 자체는 아직 고난의 시대인 것이다. 
 
 '상황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138) 
 그런 모순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이 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웃음이 생겨난다. 웃고 있지만 단순히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러시아 민중들의 삶이었다. ~ 예술가가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곧 그가 부도덕한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시대가 되었다. (139)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덜 힘들 것이다. ~ 지금 그들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쉽게 절망하지  않으면서 땅에 발을 굳건히 딛고 서 있다.  (145) ('세계 최고의 스토리 텔러들')  - 3장 <이동파의 시대> 에서
 
  작품의 이동전시를 통한 예술의 공유를 내세운 새로운 물결인 "이동파"의 등장을 통하여 우리는 양적인 단계에서 질적인 변화로 성숙해져가는 그림들을 본다. 특히 이반 크람스코이,니콜라이 게,바실리 폴레노프,일랴 레핀 등이 눈길을 끄는데 특히 레핀의 그림은 '화가 네스테로프의 말처럼 "레핀의 모든 그림은 레핀 개인만의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미술 전체의 진보였다. 그의 모든 그림은 사건이었다."(222) 리얼리즘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가 던져주는 묵직한 느낌에 휘청거리기도 하였다. 과연 나는 어떠한지...... 먼길을 돌아 찾아온 집에서 일어나는 순간의 장면포착을 통하여 우리는 삶이란, 그리고 가족이란, 남편이란, 혁명이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민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그림 속에 없다. 이것이 '레핀의 위대함'이며 '매혹당하는 폭넒음'이다.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조심스러움이 한꺼번에 표현되어 있는 그의 표정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228) 
 
 그림도 이야기도 역사도 계속된다. 4장 <상징주의 미술과 모더니즘> - 5장 <러시아 아방가르드> - 6장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개혁 이후 현대 미술>로 이어지는 러시아 미술사의 유장한 이야기는 직접 책에서 만나보시라. 그 시기마다 등장하는 대표작가의 당대 사회적인 위치에서부터 대표작품의 도판,설명,해설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400여쪽의 이야기로는 오히려 모자란 느낌이 들 정도로 친절하게 우리를 끌어당긴다.
 
 책을 읽은 내내 부러웠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그들의 자긍심이었다. 거상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예술작품을 사서 모으고 기증하고 그 작품들은 만인의 공유가 되며 덕분에 예술가들은 생계를 유지하며 작품활동을 하게 되고 민중들은 예술을 즐기며 또 다른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순환고리의 세팅이 그들은 이미 18세기부터 다 끝나 있었다는 사실이 다만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아직도 개인 사유물로서만 예술작품을 생각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작품들이 그렇게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문화를 얼마나 아끼고 보존하고 물려주고 있는지 돌이켜보면 참담해진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결코 민중의 삶과 떨어지지 않고 진실을 추구하던 예술가들이 있듯 우리에게도 그런 이들은  분명 있으니 좀 더 우리 문화, 우리 예술에 애정을 가지고 다가서야겠다. 나부터 한 발짝.
 
 책을 덮으며 드는 마지막 생각 하나, '가보지 않고도 그리워하는 도시'가 또 늘었다는 사실. 행복한 씁쓸함이다.
 
2008. 4.27. 새벽, 끝내 우리에게 오고야마는……
 
들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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