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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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의 마음가짐이 필요함은 예나 지금이나 필요한 일이거늘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자주 잊어버린다. 부닥치는 일들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짜증을 내곤 한다. 그리고 곧 뉘우친다. 여기 그러한 긍정의 힘만으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던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출신성분 하나때문에 양반인 듯 하면서도 아닌, 그렇다고 평민들처럼 편하게? 생활하지도 못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서출,서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많은 슬픈 이야기도 충분히 알고 있다. 홍길동 前부터 시작되어 정조시대까지 이어지는 사람이고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기 조금은 달라진, 다른 세상의 그들이 있다. 세상을 등지지도 뒤엎지도 못하였지만 스스로 일어서 빛이 되어갔던 사람들, 우리들은 그들을 '백탑파'라 부른다. 
 
 먼저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글쓴이가 궁금해진다. 청장관 이덕무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가 된듯 한 시대를 찬찬히 출어내는 글솜씨는 만만치 않은 필력을 보여주기에 겉표지의 약력을 살피니 허걱, 겨우 마흔도 되기 전 쓴 책이 아닌가. 처음엔 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소소한 마음가짐의 살펴봄에서부터 말을 하고 표현하는 문체나 말투까지 오롯이 그 시대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 읽는 내내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그리고 부럽고 고마웠다. 책 자체에 대한 이덕무의 소중한 느낌들을 만나게 해 주는 대목부터.
 
 오래된 책들에 스며 있는 은은한 묵향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고, 보풀이 인 낡은 책장들은 내 손실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아니, 스스로 나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1792년 12월 20일'에서) (13)
 
 비록 아직은 내가 '책만 보는 바보'는 아니지만 나도 가끔 경험하는 일이 아니던가. 샇아놓고 바라보기만 하는데 어느덧 내 곁에 벗처럼 다가와 나를 불러내던 그런 책들의 경험을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한두 번은 경험하였으리라. 나도 여러 번 경험한 바이지만 '책이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달콤하다.비록 간혹 내가 여러가지 일을 핑계로 매몰차게 뿌리치곤 하지만…….
 
 책과 책을 펼쳐 든 내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쯤 될까. 기껏해야 내 앉은 키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과 내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다 담고 있다 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 번쩍번쩍 섬광이 비치고 때로는 우르르 천둥소리가 들리는듯하였다. ('나는 책만 보는 바보'에서) (21)
 
 책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눈과 귀,코,입 등 내 몸의 모든 감각은 깨어나 살아 움직인다. 자신과 연결된 신경과 핏줄을 건드리고, 피가 도는 그 흐름은 심장까지 전해져, 마침내 두근두근 뛰게 한다. 감격에 겨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우주가 다시 깨어 일어나기도 한다. ('백탑 아래서 벗들과'에서) (55) 
 
 고백컨대 나도 이런 적이 몇 번 있다, 비록 요즘은 시간들에 쫓겨 읽고 지나쳐 가기에 바빠 제대로 두근거리지조차 못하지만. 이 책에는 이러한 책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이 있다. 느껴본 사람은 알 수 있는 책과의 하나됨이 있다. 그것은 이덕무가 스스로 일컫은 바대로 "책만 보는 바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나도 그처럼 "책만 보는 바보"가되고 싶지만 그처럼 겸허한 생활을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그만두기로 한다. 그리고 무어보다 나에겐 그처럼 함께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가꿔온 '백탑 아래'의 '벗들'이 없기에?
 
 얼버무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세심하게 바라보고 관찰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오래도록 관찰하고 연구하였기에 박제가는 결코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그의 말은 단호하고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내 마음의 벗들'에서) (77)
 
 자기로부터 '서출'의 설움이 시작되는, 1대 서자인 박제가의 설움과 분노는 그만큼 더 많고 깊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출신성분이 그를 더욱 더 단련시키고 강하게 만들었든 것은 아니었을까?
 
(유득공이 등잔을 넘어뜨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님의 치맛감이 엉망이 되었을 때) "이왕 엎질러진 것,어쩌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잘못을 저지른  그를 감싸주며 다독이던 그날 밤 어머니의 목소리.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핏줄은 서러웠지만, 사랑이 담긴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에 따스한 피를 돌게 했다. 나의 벗,유득공은 그러한 따스함을 세상과 벗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내 마음의 벗들'에서) (89)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늘 다른 이들에게 따스함을 전해주었다는 유득공의 그 마음씀은 위 얘기같은 어머님의 통 큰 사랑으로 피어날 수 있었으리라. 그래, 이미 엎질러진 것, 어쩌겠느냐? 서출로 태어난 것만 한탄한다고 달라질게 있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만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런 마음가짐을 어머니께서는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하셨으리라. 다행히도 자식들은 제대로 그 가름침을 받아들였고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은 연암과 담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깨어나면서 새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견뎌 내리라, 저렇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벌통에서 밀랍으로 묵묵히 견뎌야 하는 고통, 말간 액체가 될 때까지 활활 타는 불길에 온몸을 녹여야 하는 고통도 기꺼지 견뎌 내리라. 우리들의 삶도 저렇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백탑 아래서 벗들과'에서) (59)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덕무가 스스로에게, 벗들에게 한 말들이리라. 지은이는 참으로 적절하게 이덕무와 벗들의 이야기를 이 책속에 풀어놓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내고 자신들의 시대를 뚜벅뚜벅 열어나갔던 것이다. 이 책에는 그 이야기도 재미나게 나와 있으나 오늘 나의 관심은 그 시대를 살다간 '백탑파'의 발걸음보다는 책에대한 이덕무의 사랑이야기이다.
 
 새로운 책을 구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책장을 펼치면 바람결에 와삭거리는 아득한 풀밭이 그 속에는 들어 있을 것만 같다. 서늘한 풀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나는 가보지 않은 길, 내 발자국으로 인해 새로워지는 길을 떠나려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풀잎들을 꼭꼭 다지며 걷는 것도 좋겠지. 아니면 그만의 길을 위해 내가 눕힌 풀잎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놓거나. ('내 마음의 벗들'에서) (127)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올 해, 2008년 독서의 목표를 [열하일기]완역본으로 정하였던 것이 순전한 우연이던가? 이 책을 이즈음에 만나다니……. 이제, 서서히 나는 '백탑파'와 그들의 시대,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열하]를 건너련다.
 
2008. 4. 6. [열하], 이제 그 강물에 한 발 담그다
 
들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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