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첫사랑을 이뤘어요........
당신이 내게 첫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지.
내 몸과 내 마음의 모든 기쁨이 당신에게만 열려 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당신뿐이지.
그날, 당신의 숨소리가 기억나네.
그 가쁘던 숨소리..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 하던, 그 거센 숨소리가...
윤이 알프스 근방으로 되돌아온 것은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밤 늦은 시간, 모텔 바깥에서 바라보는 러브호텔 밀집지역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동네처럼 보였다.
건물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기교들을 뽐내 고풍적이거나 초현대적으로 지어져 있었고
하나같이 다 밝은 네온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밝은 네온빛 사이로, 멀리 언덕 위 알프스의 간판도 보였다.
1년 전 건물 개축을 하면서 사장은 엄청난 돈을 들였으나, 아무래도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먼 사장은 네온도 꼬마전구가 반짝이는 것 정도로만 만족했다.
그러나 윤에게는 언덕 위 그 간판이 정겨웠다.
윤은 언덕 아래에서 그 정겨운 간판을 올려다보며 한동안을 망설였다.
아직은 사장을 면대할 용기가 나지 않는 듯싶었다.
윤은 한숨 끝에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포장마차가 보였고 윤은 저녁을 거른 것을 그때서야 생각해 냈다.
갈 곳이 생긴 것이 다행이라는 듯 윤은 서둘러 포장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기를 하면서 사장에게 빌 용서의 말을 궁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포장마차 안은 이제 곧 러브호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될 쌍쌍의 남녀들이 마시는
술 냄새와 안주 냄새로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윤은 포장을 들추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빈자리에 앉아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 포장마차 안에 혼자인 손님은 윤과, 안주 진열대 앞에 의자 하나만 차지하고 앉아
바쁜 주인에게 자꾸만 술을 권하고 있는 늙은 남자 한 사람뿐이었다.
늙은 남자는 가뜩이나 바빠서 단무지 한 접시 더 달라는 소리조차 성가실 판인 주인에게,
듣거나 말거나 장광설을 늘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웅엉거리듯 울려오는 그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찢어질 듯한 배고픔에 관한 이야기이다가
난데없이 연애 시절의 어떤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불효하는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이다가 정치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윤이 가락국수 한 그릇을 다 먹고 지갑에서 돈을 꺼낼 즈음에,
그 늙은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돈을 꺼내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양반...... 그럼........ 사랑은.........도대체 사랑은 어디 가서 하라는 거요?"
그 늙은 남자가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윤은 그 남자가 바로 사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은 지갑에서 꺼낸 지폐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서둘러 사장의 뒤를 쫓아 포장마차를 나섰다.
어쩌면 잘못을 빌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사장님. 저 잘못했어요..
사장의 뒤를 쫓는 바쁜 걸음과 함께 윤의 입술도 바쁘게 달싹 거렸다.
당장 갈 데가 없어요. 그러니 일하게 해주세요...
웃은 건 정말 잘못했어요....
사장은 취한 사람 특유의 걸음걸이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러나 윤은 마음과는 다르게, 선뜻 사장을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정도의 말로는 사장의 화를 풀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내게는 병든 남편이 있어요.
그러나 한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청년이었지요.
그의 어깨와 등은 늘 까맣게 타 있고, 또 늘 꺼풀이 일어나 있었지요.
나는 그의 어깨에 일어난 꺼풀을 가만가만 뜯어내며,
그의 비린 땀냄새를 맡던 것을 기억한답니다.
그때 나는 그를 사랑했지요. 그는 내 첫사랑이었거든요..
그러나 이제 나는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어요.
돌아가는 순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거든요.
나는 지쳤어요. 3년이면 돌부처도 돌아앉을 만한 시간이에요.
내가 그의 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이제 노동에 지쳐 있던 그의 검붉은 어깨 위에
일어나 있던 꺼풀 정도거든요.
매일매일 내가 벗겨내면 또 새살로 돋아 오르던..
그러나 이제는 아주 사라져버린,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사장님........ 날 알프스에 있게 해주세요.
그를 아주 버릴 수 있게, 사장님, 내게 좀더 시간을 주세요.
사장은 대취한 것 같았다.
그의 뒤를 쫓고 있는 한 여자의 마음속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든 간에,
그는 흔들흔들 걸으며 홀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가서 하냐구........도대체 어디 가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길 한복판에 서서, 주먹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 지르기도 했다.
"뭐가 문제라는 거야? 딴 데도 아니고 꼭 내 집에서 새끼를 까는 것들도 있는데!
딴 데도 아니고 꼭 내 집이어야만 한다는데!
그놈들은 그럼 어디로 가라는 거야. 도대체 어디로!"
윤은 더 이상 사장의 뒤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사장은 길을 건너고 있었고, 사장과 윤 사이로 승용차 두 대가 연거푸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사장은 이미 차도를 다 건너 언덕 위의 알프스 가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또 무엇이 복받치는가.
느닷없이 허공으로 주먹을 흔들어대기도 하면서.
사장의 뒷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윤은 그 뒷모습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사장하고만 마주치면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곤 하던 웃음은,
슬픔으로 인해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윤은 처음으로,
자신이 어쩌면 저 사람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다.
다음번에 최종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