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 - 우리는 통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
손정미 지음 / 샘터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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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없는 나라와 백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적군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해도 역사가 살아남으면 영원히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개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구!" -p, 304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인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수많은 사진들 중 유명한 사진이 있다. (사진을 올리고 싶은데 요즘 하도 저작권 문제가 심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오지 못했다.) 삭발 당한 여인들이 품에 아기를 안고 군중들에게 질타를 당하며 거리행진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인데, 당시 독일군에게 협력했던 프랑스 여인들이 해방 후 반역죄로 여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긴 머리가 빡빡 밀린 채 야유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연유로 이 여인들이 적군에게 협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에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에서 이 상황을 '혹시나 그게 사랑해서였다면'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그려냈다. 독일군을 사랑한 프랑스 여인. 서로가 적국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떳떳하지 못했고, 독일군이 죽자 이 여인은 가족들에 의해 감금을 당하게 된다.   

역사소설 《왕경》을 읽으며 이런 작품들을 떠올렸던 이유는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 때문이었다. ​

     

계림(신라)의 귀족이자 화랑인 김유, 고구려의 귀족이었지만 노비가 된 진수, 백제에서 온 영특한 소녀 정. 한 나라의 운명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던 그들은 고작 십대의 소녀, 소년들이었다. 《왕경》은 삼국통일 직전, 위에서 언급한 세 사람이 각자의 사정으로 왕경(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옛말)에서 모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가 서로를 언제 칠지 몰라 눈치를 보며 적으로 여기고 있던 때.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가까워질 수 없었고, 심지어 서로를 죽이기까지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늘 처음 자유를 맛본 갈매기처럼 보이는 정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처음 본 것 같은 낯설음이었다. 계림과 백제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정은 백제라는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p, 225​

아무리 공부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마는 역사바보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엔 신뢰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역사소설이라기엔 '실제로 저런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을 만큼 탄탄했다. 실제 일어났던 역사를 토대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이런 픽션을 그려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에 쉽게 읽어내려가는 내가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하루만에 독파해버릴 정도로 흡입력도 대단했고 쉬웠다! (역사는 아직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역사 소설에선 '쉬운게' 나에겐 중요하다!)

더 특이한 점은 손정미 작가님의 이력이었다. 역사관련 된 학과를 졸업하셨거나 그런 일을 하신 줄 알았는데 '연세대학교 영문과 졸업' 이라니. 내가 영문과여서 그런지 영문과를 졸업한 분들의 이력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과를 졸업하면 일반적으로 영문학 소설을 쓰거나, 번역가로 나가는 게 일반적. 역사 소설이라니 의외다 싶었다. 심지어 소설을 쓰기 위해 다니던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왕경》을 집필했다니. 문학 담당 기자 시절엔 故 박경리 작가님으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시니 일단 한 번 믿고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삼국 통일 직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 소설을 통해 엿보며, 현재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도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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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4.11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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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어요. 가을이라면서 눈만 안내렸지, 완전 초겨울이 따로 없죠. 

아직 따뜻한 옷을 못꺼내서 얇은 옷만 입고다녔더니 그 사이에 감기가 걸려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목이 따끔따끔한게... 멋 부리는 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진짜 따뜻하게 입고다녀야겠어요!

오늘은 집에서 전기장판 따뜻하게 틀어놓고 ​유자차 마시면서 가볍게 샘터 11월호를 봤답니다.

샘터 서평단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첫번째로 받아보는 샘터 잡지인데요, 그동안 은행이나 가게 같은 곳에서 자주 봐왔던건데 이렇게 내용을 찬찬히 읽어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이름과 표지에서 느껴지듯이 소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어떻게 샘터 잡지를 소개해야할까 생각하다가, 제가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들을 나누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비틀스 팬클럽 회장인 서강석 씨에 대한 이야기. 어렸을때부터 비틀스에게 푹 빠져 대학생이 되자마자 국내 최대 비틀스 팬클럽의 회장까지 맡게 된 분의 이야기인데요. 영국이나 미국에는 비틀스 관련 자료들이 수백 편씩 발표가 되지만 국내에는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는 걸 알고, 그가 직접 출판사를 차렸을 정도라고 해요. 이 출판사는 비틀스 멤버의 자서전, 비틀스 주변 인물의 회고담 등의 번역서를 내기 위해서래요.

단순한 팬심을 넘어서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서강석 씨가 멋져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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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버려진 고양이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필리핀 출신 노동자 에릭 씨의 이야기.

제가 반려견과 같이 지내다보니 이렇게 버려진 동물들 이야기들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눈길이 한 번 더 가더라구요. 특히 이렇게 버려진 동물들을 데려와 가족처럼 돌봐준다는 건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에릭 씨는 필리핀 출신 노동자라 자신이 살아가기에도 벅찬 환경에서도 용돈을 조금씩 떼어 사료를 사서 고양이 별내를 돌보아왔다고 해요. "별내 밥 제일 조은 컷 주세요." 라고 써있는 부분을 보고선 코끝이 찡- 별내가 자궁 축농증이란 병으로 한국고양이보호협회로 오게 된 이후로 연락이 닿지않아 (에릭 씨는 아마 불법 이주 노동자였을거라고 해요.) 지금은 떨어져있지만, 에릭 씨가 별내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던 따뜻한 이야기였답니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최인호님의 1주기전에 대한 이야기.

2008년 침샘암이 발병해서 투병하던 도중에도 이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셨다고해요. 항암치료 때문에 손톱이 빠진 손가락에 고무 골무를 끼우고 글을 쓰셨을 정도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블로그에 간단하게 포스팅을 하는 것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는데 정말 대단하시죠.

그러고보니 전 아직 최인호 작가님의 작품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네요.​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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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 좀 떼지 뭐 - 제3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 수상작
양인자 지음, 박정인 그림 / 샘터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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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이 읽을법한 동화를 읽고나서 제가 큰 재미를 느꼈을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서평을 써야해 억지로 이런 책을 읽을때마다 요즘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재밌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꼭 챙겨보는 이유도 그래요. 어른들로 가득한 빡빡한 생활을 평일 내내 보내다 주말에 순수한 어린 아이들을 한시간 정도 엿보면 평일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곤 하거든요.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며 종종 놀랄때가 있는데 그건 아이들이 '어른인 나보다 낫네.'라는 말을 내뱉게하는 행동들을 할 때입니다. '사랑해요.', '좋아해요.', '슬퍼요.', '기뻐요.' 하는 감정 표현을 가감없이 하는 모습이나 '왜요?' 하며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되묻는 모습 등.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저는 질문이라도 할랍시면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게 부끄러워 입을 다물고, 좋아죽겠어도 내가 이 사람을 엄청 좋아한다는 걸 드러내면 날 얕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 좋아하는 척을 해대기 일쑤인데 말이지요. 

 

 

 

 

제3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양인자님의 이 동화집 《껌 좀 떼지 뭐》에도 어른들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학교에서 껌을 씹는 다른 아이를 데려와야 자기가 껌을 떼러 다니는 벌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자기가 살고자 친구들을 일러바치는 일을 할 수 없다며 '껌 좀 떼지 뭐!' 하는 모습이나 이렇게 친구를 일러바치게 하는 옳지않은 체벌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다 같이 껌을 씹어주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동화를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아이들을 위한 그 무엇보다 선하고 순수한 이야기를 이미 선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은 모습들을 너무나도 많이 눈에 담아버린 어른들이 쓴다는 점이 참 모순적이라는 점이에요. 아이들이 쓰는 동화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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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 -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실존의 문제 40가지에 답하다
김용전 지음 / 샘터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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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3주도 안남았다고 해요. 벌써 제가 수능을 본 게 4년 전이라니.

 

지금 고3 수험생 동생이 있어서 "난 수능 끝나면 뭐뭐할거야." 라며 여러가지 망상을 꿈꾸고 있는 동생을 볼 수 있는데요 (그거 다 못 이루고 마냥 놀다가 시간은 훅간단다. 동생아.) 그러고보니 전 수험생 시절 멋진 여대생을 꿈꾸며, 가지고 있었던 로망 중 한가지는 자신있게 이뤄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바로 '예쁜 카페 유니폼 입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기!' 수능이 끝나자마자 운 좋게도 동네에 있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요, 그 이후 처음으로 직접 벌어보는 돈에 맛들려 하루에도 아르바이트를 2~3개씩 다니는 사태가 발생. 그 재밌다던 새내기 대학생 시절을 제대로 못 즐긴게 한 가지 흠이지만요. 

이번에 샘터에서 출간된 김용전,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을 읽으며 제가 아르바이트 하던 때를 많이 떠올렸어요. 아직 평생 업으로 삼을 직장을 아직 구하지 못했으니 제가 경험해 본 작은 조직사회인 아르바이트에 대입해보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달까요. 편의점, 프렌차이즈 카페, 개인카페, 시험감독 아르바이트, 학과 사무실 아르바이트, 학회 도우미, 월드컵 경기장 단기아르바이트 등 정말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며 '사회란 이런거구나.' 라고 점점 깨달아갔죠. 물론 아르바이트로 잠깐 몸 담았던 곳보다 직장은 더하겠죠? 

실수를 하면 혼자 웃고 넘길 수 있었던 학생 때와는 달리 일을 하면서는 그 실수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배우게 됐고, 일하는 데에 있어서 내 부족한 실력이 남에게 큰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됐고, 가끔은 자존심도 버려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됐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배우게 됐죠. 이렇게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어디가서 적응은 기똥차게 잘해내는 제가 됐네요. 

하지만 이렇게 배운 게 많았다면 그만큼 상처받은 일도 많았어요. 자꾸 자존심을 긁어대는 윗사람 덕분에 당장 그만둘까 생각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늘지 않는 실력 때문에 울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전 아직도 우유 스팀이 정말 어려워요...), 어린 제가 봐도 융통성이 없어보이는 업무 방식에 '이걸 말해, 말아?' 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거든요.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은 저자가 실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보낸 사연들을 통해 직장인들이 겪는 문제들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그걸 통해 살아가면서 필요한 깨달음을 주는 책이에요. 예를 들면 '아부는 나쁜 것인가?', '상사의 개인 심부름을 해주어야 하는가?', '높은 연봉인가, 여유 있는 삶인가?', '너무 좋은 기회가 동시에 왔다면?' 등등. 정말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이 책을 읽고나니 아직 전 직장인은 아니지만, 직장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시뮬레이션 해 본 기분이었달까요.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렸을 때보다 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특히 평균 30대부터는 직장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겠죠? 그럴 때 혼자만 끙끙 앓고있기보단 이런 책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울산에 있는 장생포 고래 박물관에 가보면 옛날 포경선을 통째로 전시해놓은 것이 있는데 그 포경선의 앞쪽에 있는 작살포에 장착된 고래 잡는 작살을 한번 살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작살과는 끝이 전혀 달랐다. 즉 날카롭게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니라 끝이 뭉툭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 이유는 큰 고래의 껍질은 아주 두꺼울 뿐만 아니라 지방질이 많아서 미끄럽고 질기기 때문에 끝이 날카로운 작살로는 웬만해서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끝이 날카로우면 무게가 가벼울 뿐만 아니라 각도가 조금만 빗나가도 튕겨져 나가고 만다. 그러나 끝이 뭉툭하면 무겁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껍질에 닿는 면적이 넓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명중시킬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우직함은 얼핏 보기에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잽싸게 계산을 잘하는 것은 상당히 똑똑해 보이지만,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보다 우직하고 질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큰 고래를 잡는 데 가볍고 날카로운 작살보다 묵직하며 끝이 뭉툭한 작살이 필요했음을 아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p,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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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황소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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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그가 말했다.

"그래, 말해봐." 선장이 말했다.

"한 사람만으로는." 해리 모건은 아주 느릿느릿 말했다. "안 돼 아니 못해 아무것도 힘들어 출구가 없어."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계속해, 해리. 누가 그랬는지 말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

"한 사람." 광대뼈가 도드라진 넓적한 그의 얼굴은 실눈을 뜨고 선장을 쳐다보며 말하려고 애썼다.

"네 사람이겠지." 선장이 도와주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수건을 짜서 물을 몇 방울 해리의 입술 사이에 떨어뜨려 적셔주었다.

"한 사람으로는." 해리는 선장의 말을 고치고는 말을 멈췄다.

"그래, 한 사람으로는." 선장이 말했다.

"한 사람으로는." 해리는 마른 입으로 아주 단조롭고 느릿느릿 다시 말했다.  "세상일이 그런 거고 그렇게들 가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불가능해."

선장은 항해사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그랬어, 해리?" 항해사가 물었다.

해리는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속이지 마." 해리가 말했다.

선장과 항해사는 둘 다 해리 위로 몸을 숙였다. 이제 제대로 말하려나 보군.

"언덕 꼭대기에서 차들을 지나칠 때처럼. 쿠바의 그 길에서. 어느 길이든. 어디든. 다 똑같아. 세상일이 그렇단 말이지. 세상 사람들이 그렇단 말이지. 잠깐은 그래 괜찮아. 행운이 따라준다면. 한 사람으로는." 그는 말을 멈추었다.

선장은 다시 항해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해리 모건은 덤덤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선장은 해리의 입술을 다시 적셨다. 수건에 핏자국이 묻었다.

"한 사람으로는." 해리 모건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한 사람으로는 안 돼. 이제 혼자로는 안 돼."

그는 말을 멈추었다.

"한 사람만으로는 아무리 발광해도 기회가 없어." 그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을 배우기까지 평생이 걸렸다. -p, 250~252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 그 기회를 의미없이 흘려보낸 것을 이 책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영문도 모르게 영문학과에 들어왔어!' 라는 말을 장난식으로 내뱉으며 점수에 맞춰서 오다보니 영문학과에 오게 됐다고 말하던 나였고 그걸 핑계삼아 학점을 위한 겉핥기식 공부를 해왔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보니 그 누구보다 문학을 좋아하고 내가 더 많은 문학작품을 접하지 못함에 아쉬워하고 있다. 남들이 보는 나는 '책을 많이 읽으니까 멋지다. 아는 게 많을거야.' 라는 식인데 사실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많은 걸 알고 있지 못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이 책을 읽으며 나름 영문학과라면서도 헤밍웨이에 대해 풀어낼 수 있는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아닐까. (정말 창피하다. 분명 시험 답안으로 헤밍웨이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나였는데!! 시험장에서 나오자마자 그걸 싸그리 다 잊어버리다니.)

국내에 77년 만에 최초로 출간 된 책이라고 하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해야만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돈이 너무 많아 걱정한다. 주인공 해리 모건은 낚시배를 이용해 손님들을 태우며 돈을 받는 일을 하며 살아왔지만 못된 손님을 만나 낚시용품도 모두 잃게 되고, 받아야 할 돈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동안 거절해왔던 '밀수업'과 '쿠바 중국인 밀항'을 시작하기로 한다.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는 그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당시는 경제 불황기로 평범한 일로는 큰 돈을 벌 수 없었던 때였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되고 결국엔 그 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하는 빈자들이 있는 반면에 호화로운 요트에서 도박으로 돈을 펑펑 날리며 그마저도 따분해하는 부자가 있다. 물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놀랐던 건 1930년대에 외국에서 출간된 소설임에도 지금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똑 닮아있어서였다. 어제오늘일이 아닌 빈부격차, 어느 한 곳에선 못 먹어서 죽어가고 어느 한 곳에선 너무 많이 먹어 죽어가는 지금 이 현실을 1930년대 쓰여진 이 작품을 통해서도 공감할 수 있다니. 이래서 사람들이 '고전 고전' 하는 것이며 '헤밍웨이 헤밍웨이' 하는 것임을 부끄럽지만 이제서야 깨달았다.

요즘 좋은 기회들로 그동안 멀리했던 고전들, 명작들을 많이 접하고 있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더 늦기 전에 헤밍웨이의 명작들도 얼른 읽어보는걸로.

(이 작품은 미국과 쿠바의 역사를 알면 좀 더 멋지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랬던가. 이 작품 뒤에 있는 부가적인 설명이 없었다면 이렇게 시대적, 사회적 문제를 멋지게 꼬집는 작품을 한낱 소설로만 치부해버릴 뻔 했다. 이 점도 반성. )​

 

 

 

 

 

 

 

 

 

그는 과거에 자기가 남들에게 어떤 짓을 했든, 그로 인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든, 그들이 어떻게 파국을 맞이했든 개의치 않았다. 누가 레이크쇼의 집을 팔고 오스틴으로 이사한 뒤 하숙생들을 차에 태우고 외출을 하든 말든, 상류층 사교계에 진출했던 딸들이 일자리가 필요해 치과에서 보조원으로 일하게 됐든 말든, 예순셋의 나이에 궁지에 몰려 야간 경비원으로 전락했든 말든, 식전 이른 아침에 권총 자살을 하든 말든, 그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발견하든 말든, 그 현장이 얼마나 참혹하든 말든. 간신히 일감을 얻은 누군가가 버윈에서 차를 타고 레이크쇼를 지나든 말든. 그가 처음에는 채권을 팔다가 그 다음엔 자동차로, 그 다음엔 방문판매용 잡동사니와 특산품을 팔게 되었고('잡상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나가요.' 그의 면전에서 문이 쾅 닫힌다) 그러다 결국 42층에서 떨어진 자기 아버지의 전철을 다른 방식으로 밟게 되든 말든. 그가 한 마리 독수리가 하강하듯 서두르지 않고 세 번째 선로로 한 걸음 내밀어 오로라엘진 기차 앞에 서든 말든. 절대 팔리지 않을 달걀 거품기와 과일즙 짜는 기구 들이 그의 외투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든 말든. '한번만 구경이라도 하시죠, 부인. 이걸 여기에 대고 이 기구의 나사를 조이세요. 자 보십시오.' '아뇨, 필요 없어요.' '한번 해보세요.'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나가요.' 그래서 그는 목조 주택과 텅 빈 마당, 줘도 안 가져갈 헐벗은 개오동나무 들이 있는 거리로 나가 오로라엘진 기차선로로 내려갔던 것이다.

어떤 이는 아파트나 사무실 창문에서 한참을 추락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자동차 두 대용 차고에서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조용히 떠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전통에 따라 콜트나 스미스앤드웨슨 총을 택하기도 했다. 잘 만들어진 그 도구는 불면증을 끝냈고 후회를 몰아냈으며 암을 치료했고 파산을 물리쳤다. 손가락 하나로 당기기만 하면 궁지에서 탈출구가 열렸다. 그 훌륭한 미국의 도구는 휴대도 대단히 간편하고 효과도 대단히 탁월해서 악몽으로 변질된 '아메리칸드림'을 끝장내기에 그만이었지만 친척들이 지저분한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유일한 단점이 있었다.

그가 파산으로 내몬 사람들은 이런 다양한 탈출구를 선택했지만 그는 한 번도 그들을 걱정한 적 없었다. 누군가는 패배해야 했고 걱정은 호구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아무렴. 그는 그 사람들도 성공적인 투기의 부작용도 고려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내가 이기면 누군가는 져야 하고 걱정은 호구들이나 하는 거니까. -p, 263~265

잠이 안 오는 데 밤을 어떻게 견디지? 남편을 잃어봐야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나 봐. 그때야 알게 되나 봐. 이 지랄 같은 인생은 모든 걸 그렇게 알게 되나 봐. 그래, 그런 것 같아. 나도 지금 알아가는 거겠지. 마음이 죽으면 모든 게 쉬워. 그냥 그렇게 죽어가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 세상살이가 그런 거 같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아. 나는 출발은 좋았어. 출발은 좋았어. 그러는 게 맞는 거라면. 그러는 게 맞는 거겠지. 바로 그거야. 그게 요점이야. 괜찮아. 나는 출발은 좋았으니까. 지금은 남들보다 앞서 가고 있어. -p, 290,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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