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일요일 저녁이면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았던 깨끗한 시트로 침대보를 간다.

나는 새로 간 시트 중에서도 겨울 북풍이 두드려 빳빳해진, 때로는 바짝 언 시트를, 이 휘몰아치는 북풍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모포의 하얗고 오톨도톨한 표면을 더 까칠까칠하게 만들어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과 얼음 같은 것을 담고 있는 시트를 가장 좋아한다.

혼자 잠드는 것은 정말 싫다. 어린아이였지만 또 다른 육체가 필요하다. 그 따뜻함, 힘, 부드러움, 따스한 입김, 두근대는 심장 소리.

 

(중략)

 

얼굴을 시트에 묻고 침대맡 탁자의 등을 끄면 나는 프로이센, 러시아, 만주, 몽골, 시베리아의 향기를, 나의 에고이스트적인 행복을 위해 모두 함께 묶여 붙잡혀 있는 이 향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내가 들이마시는 것은 깨끗이 빤 천 냄새만이 아니다. 야생적이고 광대한, 대지와 바람의 지형도, 내가 읽고 보았던 이야기와 우화와 노래와 이미지의 무한한 연장의 냄새, 지붕 아래, 할머니들과 이모할머니들이 옛날에 참을성 있는 바느질로 꽃과 곡선과 아라베스크로 장식했던 새 시트가 팽팽히 당겨져 씌워진 이 침대, 잠의 첫걸음 속에서 안심하고 쉬는 천상의 여행자.

적어도 한순간은 보호받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냄새다. -p, 98~100 (새 시트 中)

 

 

 

 

 

 

 

 

 

 

 

 

 

 

 

 

 

필립 클로델의 《향기》라는 산문집을 읽었습니다. 

 

뭐랄까, 《향기》라는 제목 때문인지 비슷한 제목의 《향수》라는 소설을 떠올리며 책을 펼쳤는데요. 제 예상과는 전혀 달리 작가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향기'에 대한 단상을 적어내려간 책이었던지라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답니다. 역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네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닌 '향기'에 대한 느낌(?)을 적어내린 작가 필립 클로델의 문장 하나 하나가 어찌나 생생하고 예쁜지 그의 문장력엔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과장을 조금 더해서 마치 그 시간, 그 장소에 가서 그 향기를 직접 맡고 있는 듯 했달까요. 

 

 

 

 

이 책에 '애프터셰이브'에 대한 글이 종종 등장해 버스커버스커의 '향수'라는 노래의 가사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사랑이라는 한 소녀가 향수를 바르고

또 한 소년이 애프터쉐이브를 바르고 만나서

서로의 향기를 맡는 거예요 서로의 향기를 맡는 거예요


 

라는 노래 가사. 참 멋진 가사였지만, 지금까지 이 가사에 대해 막연한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써야할지 생각하다가 이 가사를 보니 어떤 느낌인지 딱 알 수 있게 되었답니다.  

 

남자친구와 정식으로 사귀기 전, 제대로 된 첫 데이트를 할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처음으로 남자친구의 차에 올라타서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남자친구한테 풍기던 향을 (오빠의 향수 향과 차에서 나던 향이 섞인) 맡게되었을 때. 그때서야 우리가 정말 가까워졌구나. 거리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가까워졌구나 하던 걸 느꼈거든요. 서로의 향기를 대놓고 맡을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게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까요?

 

 

 

《향기》라는 이 책 덕분에 이렇게 잊고있던 기분 좋은 추억 속의 '향기'에 대해 헤아려볼 수 있게 되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의 삶을 특정지었던 모든 것을 가지고서 떠났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의 향기도 동시에 죽었다. 

춥다. 여기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러 해 만에 처음이다. 아마 30년도 넘은 듯싶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곧 집은 팔려서 새로 칠해지고 개조될 것이다. 여기에서 살 존재들은 그들의 삶, 꿈, 고통, 불안, 평안을 이곳에 가져 올 것이다. 잠을 자고, 사랑하고, 먹고, 씻고, 화장실에 가고, 목공일을 하고, 울고, 웃고, 아이들을 키울 것이다. 늘어나는 양초처럼 집은 조금씩 그들에게 순응해가면서 그들의 향기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p, 162 (어린 시절의 집 中)

 

 

옷은 입었던 사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사물이라는 표지로 돌연히 떨어져 나간다.

물질의 배반은 인간들의 잘못보다 더 지독하다. 우리는 가장 내밀하게 우리를 알고 우리의 체취를 맡으며 우리와 유사한 리넨, 모직, 모피를 몸에 걸쳐 그 속에 우리 피부의 향기, 후각의 흔적과 호흡을 남긴다.

이렇게 나는 데데 삼촌이 우리 집에 일하러 왔을 때 입었던 낡은 스웨터를 간직하고 있다. 하루 열 시간 꼬박, 먼지와 석고 덩어리, 회반죽, 모르타르, 골루아즈 블루 담배, 함께 마시는 맥주 한가운데서. 

(중략)

삼촌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전날 밤에 돌아가셨으니까.

삼촌의 스웨터가 스툴에 놓여 있다.

거의 인간 같은 모습이다.

지쳐 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

새로 난 작은 회반죽 얼룩 두 개가 스웨터 천 섬유에 똬리를 틀고 있다.

나는 사랑했던 이의 팔 안인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스웨터에 얼굴을 묻었다. 삼촌이 거기 격렬하게 존재하고 있다.

담배 냄새, 희미해진 싸구려 애프터셰이브 로션 냄새, 시멘트 먼지와 벽지 풀 냄새, 저도 모르게 쌓여 스웨터 천에 응축되어 있다가 솟아오른 그 차가운 향기 속에 말이다. 휴지통에 던져버릴 수도 입을 수도 없다. 

(중략)

어느 날 그 스웨터에 얼굴을 가져갔을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스웨터는 모든 것을 좇아냈다.

삼촌이 그 옷을 떠나버린 것이다.

이제는 추억도 영혼도 없는, 낡고 초라한 옷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여전히 저 높이, 하늘 가까이, 다락방 벽장 속에 있다. -p, 203~205 (스웨터 中) 

 

 

바닥은 니스 칠이 되어 있지 않은 넓은 마루다. 벽에는 크고 작은, 옛날 책이거나 요즘 책들이 마치 추위를 타는 이웃처럼 빽빽이 꽂혀 있다.

나는 눈이 뻑뻑해지도록 책을 읽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다.

장소도 시간도 잊었다.

오래된 종이, 새 잉크, 먼지가 내려앉은 표지 냄새 속에 페이지를 넘긴다. 전등과 습기와 무거운 책들의 뿌연 먼지 알갱이들이 눈꺼풀 아래 이리저리 날린다. 거의 펼쳐보지 않은 그 책들은 고통을 겪다 미세하게 눈물방울이 진 것 같아 보인다.

아마도 그곳에서, 오래된 도서관 안에서, 침묵의 심연에서, 보이지 않는 친구들의 얼굴과 곰팡내(그것이 바로 내가 나중에 알게 된 오래된 책들의 향기가 지닌 이름이기 때문이다)에 취해 지친 몸들 가운데에서, 나는 한 나라에, 허구와 그 수천 갈래 길의 나라에, 그 이후 한 번도 진정으로 떠나본 적 없는 곳에 들어섰다.

나는 책들과 같았다.

나는 책들 속에 있었다.

그곳이 바로 독자로서, 작가로서 내가 사는 곳, 나를 가장 정확히 정의 내리는 곳이다. -p, 208~209 (곰팡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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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손가락 아래 노트북 자판을 낙서처럼 한 자 한 자 두드렸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구절이 모니터에 차곡차곡 모습을 드러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깜빡이는 커서 옆으로, 방금 새긴 문장을 진솔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건이 썼던 짧은 편지였다. 건네주지 못한 시집 속의 구절. 누구를 향한 사랑들인지, 대상은 모두 빠져 있는 그 구절. 그래서 내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것이기도 한 서글픈 바람…. 자판 소리와 함께 아래에 또 하나의 문장이 찍혔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백스페이스를 눌러 지금까지 끼적거렸던 문장들을 밑에서부터 차례로 다 지워버리고는, 파워를 끄고 노트북을 닫았다. 방금 쓴 문장은 말이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서로 부딪치는 사랑, 동시에 얽혀 있는 무수한 사랑들. 어느 사랑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랑은 날개를 접어야만 할 때도 있다. 그 모순 속에서도 사랑들이 편안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눈물 흘리더라도 다시 손 붙잡고 밤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건 무슨 마음인지. 무사하기를. 당신들도 나도, 같이. -p, 394~395

 

 

 

 

 

 

 

 

 

 

 

 

 

 

 

 

 

 

피부가 안좋아진 탓에 10시 쯤 되면 잠들겠다 억지로라도 눕곤 했는데, 오늘은 어쩌다보니 음주포스팅을 하게 되어 지금 이 시간에 글을 적고 있다. 

 

남자친구와 나는 영화를 보든,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을 먹든 주변에 있는 큰 마트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오늘도 역시 영화를 보고 마트를 한시간 정도 돌아다녔나보다. 우리 둘 다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 강아지들 간식도 좀 사고, 이것저것 서로한테 사주고싶어하며 "이거 먹어볼래? 이거 사줄게." 하고 장바구니에 잔뜩 담아댔더랬다. 그러다 오빠가 잔향이 정말 좋은 맥주가 있다며 꼭 맛보게 해주고 싶다고 저 맥주도 손에 들려보냈다. 나중에 먹으려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캔을 딴 후였고, 컴퓨터나 하며 맥주를 마시자 하고 이렇게 포스팅을 하고 있는 참이다. 

 

 

 

 

 

 

 

 

 

 

 

 

 

 

 

무거운 내용의 책을 읽다보면 가벼이 읽을만한 책이 당긴다. 그래서 언젠가 무심히 책장에 꽂아두었던 이 책을 꺼내들었다.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라는 글귀부터 책 제목, 표지까지 완벽하게 '술술 읽힐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어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내 촉은 훌륭했다.

 

메인이 되는 라디오 PD인 건과 라디오 작가인 진솔의 사랑, 그 외에 애리와 선우, 가람, 희연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소설. 내가 생각하기에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지만, 이 해피엔딩의 기준이 참 애매한거란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알게됐다. 건과 진솔이 이루어지는 게 해피엔딩인건지, 건과 건을 짝사랑 하는 희연이 이루어지는 게 해피엔딩인건지, 건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애리와 이루어지는 게 해피엔딩인건지. 소설을 다 읽었을 때 '해피엔딩이라 좋다.' 생각했는데, 건을 짝사랑했던 희연의 입장에선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었던 거였다. 

 

세상 모두의 사랑이 무사했으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누군가의 사랑이 무사하다면 다른 누군가의 사랑은 무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뭐, 나의 사랑은 무사하다. 사랑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내 사랑이 무사하지 않을 땐, 그 사랑으로 인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내 사랑을 신경쓰기에도 바쁜 이 와중에 다른 사랑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다만, 가능하다면 모두의 사랑이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

"…일기장?"

"표현이 좀 그런가? 아무튼 어제도 이화동 우리 집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었지, 오늘도 당신이랑 마무리가 안 되니 뭔가 허전했지. 수첩에 몇 줄 적는 것처럼 꼭 진솔 씨한테 하루를 정리하게 되잖아요. 요즘 계속 그랬으니까."

진솔은 좀 묘한 기분이 되어 그와 나란히 걸었다.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어쩐지 이건 아닌데 싶기도 하고…. 생각 끝에 그녀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날 친구로 여긴다는 말이네요. 그죠?"

건이 핏 쓴웃음을 날렸다.

"새삼스럽소! 그건 기본이지. 그리고 친구라고 다 속에 있는 말 들려주나? 하여튼 남의 성의 몰라주기는." -p, 160~161

 

 

진솔은 물끄러미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일까. 가끔 그가 툭툭 던지는 알 수 없는 말들. 그저 별 뜻 없이 지나치는 농담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겐 밤늦도록 돌이켜보게 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p, 205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건 그 때문인 거 같아요. 살면서 아등바등 힘든 거, 이루지 못해서 속상했던 거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다음 생이 있을 거야. 다음 생에선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 것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런 위안이 되거든요, 난."

건은 잠시 말이 없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진짜 천기누설을 해볼까요?"

진솔은 무릎에 뺨을 기대고 앉아 그런 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유물론이 옳을 거예요. 인생은 한 번뿐이야.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고. 이번 생에 못 이뤘으면 그만이지, 다음을 기약한다는 건 웃긴 말이야."

"죽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닐 수도 있지…."

"설령 윤회가 있다고 쳐요. 당신, 전생을 기억하나? 아무것도 모르잖아. 내가 알지 못하는 전생과 다음 생을 왜 생각해요, 이번 생을 살아야 하는 건데."

피식 웃는 그의 음성이 씁쓸하게 들렸다.

"정말 원하는 건, 이번 생에서 해야 해." -p, 240~241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놓지도 않고 끌어안고 손 붙잡고 다닐 거라고. 내 여자한테는 그럴 거라고."

진솔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엉큼한 놈 아닌데… 오늘 종일 당신 만졌어요. 인사동 찻집에서도 어깨에 팔 두르고, 여기서도 껴안고,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갔어."

건은 낮게 한숨을 쉬더니 진솔에게서 조금 떨어져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요즘 항상 같이 지냈죠. 낮엔 일터에서 만나고, 퇴근하면 둘이 시간 보내고. 당신 원고 쓸 시간까지 뺏는 줄 알면서. 오늘 아침도 오피스텔을 나올 때부터… 진솔 씨 하고 싶었던 거, 하나는 같이 해주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것 중에서, 젠장."

그는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이야." 

진솔에게 이슬같이 눈물이 맺혔다. 사랑이 뭔지는 몰라도… 사랑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 사랑이 아니면. -p, 243~244

 

 

어둠이 짙은 유리창 너머 카페촌의 불빛들을 응시하면서 진솔은 멍하니 생각했다. 웬일인지 올겨울엔 마지막인 것들이 많다고. 잘 봐둬야지. 낡은 역사도, 사라질 기차도. 그리고 올겨울 그 마지막 풍경을 그와 함께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추억이란, 사라지는 풍경이란, 그 자체로만 남는 것은 아니니까. 그때 함께한 사람으로 인해 남는 것이기도 하니까. -p, 290

 

 

"사람이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지디 않아요."

진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보태서 써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 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눔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 -p, 364 

 

 

"당신 말이 맞아. 나,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고… 내가 한 여자의 쓸쓸함을 모조리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 내가 옆에 있어도 당신은 외로울 수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는 데 사랑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진솔은 눈물이 그렁한 채 건의 품에 얼굴을 묻고 듣고 있었다.

"그날 빈소에서, 나 나쁜 놈이었어요.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할아버지 앞에서 공진솔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그의 속삭이는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머리와 이마에 닿아 스쳐갔다.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p, 408

 

 

 






아. 오빠가 추천해 준 맥주는 훌륭했다. 혼자 홀짝홀짝 마시는 캔맥주는 다 못마시고 버리기 일쑤였는데 이건 양이 어마어마했음에도 포스팅이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다 마셨다. 입에 남는 잔향도 좋았고 적당히 알딸딸한게 오늘은 눕자마자 잠이 잘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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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마스다 미리 여자공감단 5기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스다 미리 여자공감단' 이란,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며 서평을 남기는 서평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다른 서평단과는 다른 점이 단순히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다양한! (나를 위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책을 읽고 좋은 구절을 남기기도 하면서 마스다 미리에 대한 팬심을 마구마구 드러내는!!) 그런 활동을 하는 활동입니다. 매번 주어지는 미션을 통과하면 받는 소정의 선물도 정말 좋구요. 미션을 통과해야만 다음 미션으로 이어질 수 있기때문에 이런 흥미진진한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정말 독특해서 많은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활동이랍니다. 

3기부터 활동을 쭉 해왔는데 4기를 거쳐 지금의 5기로 활동을 시작하기까지 마스다 미리에 대한 애정은 점점 더 커져가네요. 단순한 '서평단'이 아닌 '여자공감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마스다 미리의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저절로 알게됩니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다보면 가끔은 여자인 저도 잘 모르는 여자의 마음을 마스다 미리는 어찌 이리 잘 아는지 놀랄 때가 많거든요. 이게 여자의 속마음을 알고싶다 하시는 남성분들에게 마스다 미리의 책을 추천해주고 싶은 이유 중 하나지요. 제 남자친구한테도 은근슬쩍 추천해줬답니다.

     

 

 

 

 

 

 

 

 

 

 

여자공감단 5기로 활동하게 되면서 받은 첫번째 책. 마스다 미리의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입니다.

 


 

 

 

 

 

 

 

 

 

서로 죽고 못사는 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옳지 못한 사랑이든, 이별이든. 우린 한평생 수많은 사랑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랑을 하며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전하지 못한 여자의 속마음을 그림으로, 글로 표현해낸 책이에요.

언젠가 친구가 남자친구 문제로 저한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며 고민이라고 말을 할 때, 제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말들을 남자친구한테 해보는 게 어때?"

저 말은 바로 그 친구한테 제가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할때 그 친구가 저한테 해준 말이었거든요. 이렇게 연인에게 말을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말을 전하지 못하며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게 주된 여자들의 모습인 것 같아요. 물론 저도 그렇거든요. 이런 여자들의 속마음을 모아놓은 이 책을 읽다보니 마냥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랬는데.", "맞아맞아. 저렇게 생각했어." 하고 있게 되네요.

모든 여자들에게는 공감을, 남자들에게는 이해를 주는 책. 마스다 미리의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였습니다.

   


 

 

 

 

 

 

 

 

 

늘 바지만 입다가

갑자기 치마를 입으면

신경 쓴 것처럼 보일까봐,

오늘도 바지. -p, 14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열심히 화장을 고치고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다지 예쁘지 않은 여자라도 너그럽게 봐주기. 그것은 여자들만의 암묵적인 약속.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홀로 싸우는 중이니까. 아린 그 연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찌할까. -p, 15

그의 작은 선물, 그 별것 아닌 선물이 기쁘다. 그것은 슈크림이기도 하고, 만화책이기도 하고, 수첩이나 키홀더일 때도 있다. 성인 여자의 선물로는 무척이나 시시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날이 아닐 때에도 내게 무언가를 사주고 싶어한다. 그는 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로맨틱한 일이 또 있을까.

여자는 자기를 소중하게 대하는 느낌을 실감하길 좋아하고, 만났을 때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만나지 않아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행동을 무척 좋아한다.

알기 쉽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다이아몬드 반지 따위 필요 없다.

그 까짓것 내가 사면 돼.

원하는 건 그의 따뜻한 마음뿐!!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사려고만 하면 다이아몬드도 살 수 있는 정도의 경제력을 갖췄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p, 71

나, 쓸쓸해 보일까? 금요일 밤에, 혼자 백화점 지하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은 불쌍해 보일까?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게는, 그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나를 이해해주는 남자가 있다면 남의 시선 따위 상관없다.

사랑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혼자 있을 때도 자신감을 준다.

약속이 없는 금요일 밤도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p, 77

빈말이건 사실이건 제대로 마음을 써줬으면 한다. 소녀감성에는 나이 제한이 없으니까. -p, 181

그와 나.

둘밖에 모르는 대화를 갖고 있는 것이 기쁘다.

"오늘은 맛있는 그 소바 집으로 갈까"

라거나,

"늘 먹던 아이스크림 사와"

라거나.

다른 누구도 모른다. 그 소바 집이 어디를 말하는지, 그 아이스크림이 하겐다즈의 무슨 맛인지.

조금씩 늘어나는 달콤한 암호.

대화뿐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둘이 편의점에 갔을 때. 자동문이 열리면 아무 말 없이 각자 좋아하는 잡지 코너에 나란히 선다. 15분 정도 읽은 후 자연스럽게 음료 코너에 집합해서 신상 주스가 없는지 살펴보고, 디저트 코너를 힐끗 바라보고.

둘만의 그런 작은 당연함.

이것이 전부 추억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그와 정성껏 이어나가고 싶다.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p, 185

​승부라든지, 이미, 그런 사랑이 아니다.

섬세하고 예쁘고 귀여운 속옷을 산 것은, 그가 기뻐해주면 좋겠다고 순수하게 생각하기 때문. 내일 만날 때를 위해 손가락 끝까지 로션을 바르기도 하고, 발꿈치를 매끄럽게 하기도 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 사람을 위해 꼼꼼하게 확인해두고 싶은 마음. 그뿐.

늘 무심코 집중하게 되는 연애 공략 책도, 이 사랑에는 필요없다.

단순하게 돌진하고,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하고 바보처럼 이야기하는 사랑이, 꼭 어린 애들만의 특권은 아니잖아? 수제 쿠키도 열심히 구워 바칠 기세.

이런 사랑 나쁘지 않아.

애를 태우거나, 질투를 유발하거나, 불필요한 밀당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건, 다른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다시 시도해보면 되니까. -p,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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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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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사람에게 내팽개쳐진 기억이 있나요?_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 건 1~2년 전 부터였다. 누구든 만남과 동시에 이별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별이라는 끝을 떠올리면 더이상 깊어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내가 이렇게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도저히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데에 익숙해져가고 있을 때, 우연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다자키 쓰쿠루가 마치 나와 같았기에. 그동안 뒤죽박죽인 채 정리가 되지 않던 생각들을 쓰쿠루가 그동안 마음 한켠에 애써 묻어둔 채로 잊고 있었던, 자신이 받은 상처를 꺼내 치유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정리해나갈 수 있었다.

1~2년 전의 난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다가와주거나 우연한 기회로 가까워진 사람들에게는 진심으로 마음을 내주곤 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닫게 되는 계기가 연타로 찾아왔더랬다.

중학생때부터 서로 모든 걸 공유했을 정도로 가까웠던 친구가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연락을 끊고, 연락을 받지않아 그 이후 지금까지도 쭉 연락을 하지 못한 게 첫번째 계기였다. 둘 다 대학생이 되면 같이 해보고 싶은 일들을 밤새도록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않아 나에게 뭐가 서운했는지 남보다 못 한 사이가 되어버렸고, 같이 카페도 가보지 못한 채, 같이 술을 마셔보지도 못한 채, 같이 쇼핑도 해보지 못한 채로 우린 각자의 위치에서 벌써 23살이 되었다. ​

이후에도 평생 가자 약속한 친구들과 줄줄이 멀어지는 일이 잇달아 일어났고 그 시기에 꽤 오래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해결을 했어야맞는데 그땐 당장 힘든 마음을 추스린다는 생각으로 '너희가 싫다면 싫은거겠지.'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던 게 화근이었나보다. 괜찮은줄로만 알았던 나는 어느새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겠지. 그때 상처받으면 아프니까 미리 밀어내자' 라는 생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한 걸음 물러서며 더이상 깊어지지 않는 관계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 행복하지 않았다. 더 아팠고 더 상처받았고 더 힘들었다. 다자키 쓰쿠루처럼 애써 외면해두었던 상처를 꺼내서 왜 이런 상처를 입어야만 했는지, 묻고 또 물어 다시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폭 안길 수 있는 날이 빨리 와 올 겨울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따스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도 사람으로 인해 내팽개쳐져 받은 상처가 있다면 묻어두지 말고 꺼내어 흉이라도 남기기를.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p, 32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p, 51~52

 

 

"그리고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갈 거야. 견실하게 그 삶을 살아야 해. 아무리 밋밋하고 평범하더라도 삶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지. 그건 내가 보장하지. 아이러니나 역설 같은 건 빼고 하는 말이야. 다만 나에게는 그 가치라는 게 좀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놈을 제대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가 없어. 아마 나면서부터 거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죽어 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 그때가 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거야.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아. 그러나 자네는 달라. 자네는 그놈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어. 논리의 실을 활용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 -p, 116

 

 

"정말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 말 같은 건 나오지 않는 거야." -p, 194

 

 

"내가 신입 사원 연수 세미나에서 처음에 늘 내뱉는 말이야. 나는 먼저 세미나실 안을 휘익 둘러보고 적당히 한 수강생을 지목해서 일어서게 해.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자, 여기 자네한테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하나씩 있어. 먼저 나쁜 뉴스. 지금 자네의 손톱 또는 발톱을 펜치로 뽑으려 한다. 안됐지만 이미 결정 난 일이다. 절대 뒤집을 수 없다.' 그런 다음 나는 가방에서 아주 무섭게 생긴 커다란 펜치를 꺼내 보여 줘.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그놈을 보여주지. 그리고 말해. '다음은 좋은 뉴스. 좋은 뉴스란, 손톱을 뽑을 건지 발톱을 뽑을 건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거야. 자, 어느 쪽으로 할 텐가. 10초 내에 결정해야 해. 만일 스스로 어느 한쪽을 정하지 않으면 손과 발 두 쪽을 다 뽑아 버릴 거야.' 나는 펜치를 손에 든 채 10초를 카운터해. '발로 하겠습니다.' 거의 8초가 지나서 그 친구가 말해. '좋아, 그럼 발로 정해졌어. 지금부터 이놈으로 자네 발톱을 뽑도록 하지. 그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 왜 손톱이 아니라 발톱을 선택했지?' 내가 물어봐. 상대는 이렇게 대답해.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아픈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니까 할 수 없이 발톱으로 한 겁니다.' 난 그 친구와 따스한 악수를 나누고 이렇게 말해. '진짜 인생에 온 걸 환영해.'라고. 웰컴 투 리얼 라이프.(Welcome to real life.)"

 

쓰쿠루는 옛 친구의 홀쭉한 얼굴을 아무 말 없이 잠시 바라보았다.

 

"우리에게는 모두 나름대로 자유가 있어." 그 말을 하고 아카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게 이 이야기의 포인트야." -p, 245~146

 

 

"자기 안에서 뭔가가 아직도 소화되지 않은 채 걸려 있고, 그 탓에 본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혀 버린 거야." -p, 274

 

 

「르 말 뒤 페이」. 조용한 멜랑콜리가 어린 그 곡은 그의 마음을 감싼 형체 없는 슬픔에 조금씩 윤곽을 그려 준다. 마치 허공에 잠겨 든 투명한 생명체의 표면에 수없이 많은 가느다란 꽃가루가 달라붙어 전체 형상을 눈앞에 조용히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이윽고 사라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민트 그린의 반소매 원피스를 입은 사라.

 

가슴의 동통이 다시 살아났다. 격렬한 통증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격렬한 통증의 기억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쓰쿠루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애당초 텅 비었던 것이 다시 텅 빌 따름이 아닌가.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다 확인한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 버린다. 그다음에는 텅 빈, 또는 더욱더 텅 비어 버린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금 혼자 남는다. 그뿐이지 않은가.

 

(중략)

 

그들은 둘 다 어느 시점에서 쓰쿠루의 인생에서 사라져갔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참으로 갑작스럽게. 아니, 사라져 간 것이 아니다. 그를 잘라 버리고 내팽개쳤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쓰쿠루의 가슴이 상처를 남겼고, 그 생채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렇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상처를 입은 것은, 또는 부서진 것은 쓰쿠루가 아니라 그들 두 사람이 아니었을까. 쓰쿠루는 최근에 이르러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용 없는 텅 빈 인간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이 없기에 설령 일시적이라 해도, 거기서 쉴 자리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밤에 활동하는 고독한 새가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집 지붕 뒤편에서 한낮의 안전한 휴식처를 구하듯이. 새들은 아마도 그 텅 비고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공간을 마음에 들어한 것이다. 그렇다면 쓰쿠루는 자신이 공허하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p, 289~291

 

 

"누구든 무거운 짐은 싫어하죠. 그렇지만 어쩌다 보면 무거운 짐을 가득 끌어안게 됩니다. 그게 인생이니까. 세 라 비.(C'est la vie.)" -p, 294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게 있는 법이죠." 올가는 그렇게 말했다.

 

과연 맞는 말이라고 쓰쿠루는 와인을 마시면서 생각했다. 남에게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것 역시 너무 어렵다. 억지로 설명하려 하면 어딘가에 거짓말이 생겨난다. 아무튼 내일이 되면 여러 가지 일들이 지금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그걸 기다리면 된다. 만일 명확해지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 없이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니다. -p, 308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 친구가 한 말이야."

 

에리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창을 들어 올려 열었다. 그런 다음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탁, 탁, 보트 부딪히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옆으로 쓸고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서 쓰쿠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가운데는 완전히 굳어 버려서 벗겨 낼 수 없는 뚜껑도 있을지 몰라."

 

"억지로 벗겨 낼 필요는 없어.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게 어떤 뚜껑인지 정도는 내 눈으로 보고 싶어." -p, 340~341

 

 

쓰쿠루는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마치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서 밤바다 속으로 갑자기 혼자만 떠밀려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어."

 

그렇게 말하고 쓰쿠루는 그 말이 얼마 전 아카가 입에 담은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호흡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린 건지, 아니면 제멋대로 떨어져 버린 건지. 그건 잘 몰라. 아무튼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나는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갑판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봐. 배 위에서 아무도, 승객도 선원도 내가 바다에 빠졌다는 것을 몰라. 주위에는 붙잡을 것도 없어. 그때의 공포를 난 지금도 품고 있어. 자신의 존재가 느닷없이 부정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는 공포. 아마 그 때문에 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을 거야.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지."

 

그는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좌우로 벌리고 30센티미터 정도의 폭을 만들었다.

 

"물론 그런 것도 타고난 성향일지 몰라. 남과의 사이에 본능적으로 완충 공간을 두게 되는 경향이 원래 내 속에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너희하고 같이 있을 때에는 그런 거리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해. 벌써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만." -p, 342~343

 

 

가 버린 시간이 날카롭고 긴 꼬챙이가 되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소리 없는 은색 고통이 다가와 등골을 차갑고 딱딱한 얼음 기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아픔은 언제까지고 같은 강도로 거기 머물렀다. 그는 숨을 멈추고 눈을 꼭 감은 채 가만히 아픔을 견뎌 냈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단정한 연주를 이어 갔다. 소곡집은 제1년 스위스에서 제2년 이탈리아로 옮겨 갔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 363~364

 

 

"난 두려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또는 무슨 잘못된 말을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냥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에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역을 만드는 일하고 마찬가지야. 그게,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약간의 잘못으로 전부 망쳐져 버리거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역은 완성되어야 해. 그렇지? 역이 없으면 전차는 거기 멈출 수 없으니까.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맞이할 수도 없으니까. 만일 뭔가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필요에 따라 나중에 고치면 되는 거야. 먼저 역을 만들어. 그 여자를 위한 특별한 역을. 볼일이 없어도 전차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싶어 할 만한 역을. 그런 역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거기에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주는 거야. 그리고 못으로 네 이름을 토대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너한테는 그런 힘이 있어. 생각해 봐.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쳐 건넜잖아." -p, 382~383

 

 

적절한 말은 왠지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p, 386

 

 

아마도 다시는 이 장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에리를 만날 일도 없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제각기 정해진 장소에서 각자의 길을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아오가 말했듯이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딘가에서 물처럼 소리도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투명한 슬픔이었다. 자신의 슬픔이면서 손이 닿지 않는 먼곳에 있는 슬픔이었다. 가슴이 헤집은 듯 아프고 숨이 막혔다.

 

포장도로에 나서자마자 갓길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끄고 핸들에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심장의 고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몸의 중심 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가슴의 통증과 숨 막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태 그는 몰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슴 아픔이며 올바른 숨 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 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 38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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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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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건 간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어도, 혹은 거의 만난 일조차 없어도 부모와 자식이 '부모자식'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말이 되면 그 관계는 '부모자식 사이'만큼 간단하지 않다.

단 한 번, 불과 몇 초의 사정으로 부모자식의 관계는 미래영겁까지 구속되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생활의 답답한 토양을 바탕으로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거듭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기도 하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람도 단 한 번, 단 몇 초의 다툼으로 간단히 무너지고 마는 일이 있다.

'부모자식'은 계속해서 덧셈이지만 '가족'은 더하기뿐만 아니라 빼기도 있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희극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온갖 성실한 것 중에서도 결혼이라는 놈이 가장 장난을 많이 친다.'

'부모자식'보다 더욱 더 간단하게 이루어져 버리는 '부부'라는 관계.

그 간단한 관계를 맺은 것뿐인, 장난질을 친 남자와 여자가 일이 흘러가는 과정상 부모가 되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어려운 관계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아무 일 없는 듯,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먼지를 밖으로 쓸어내지는 못해도 방구석에 밀어놓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이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연극 소품 같은 '가정' 정도는 만들어 준다.

하지만 가족관계란 몹시 신경질적인 것이다. 무신경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일수록 실은 세심한 신경이 필요하다. 금이 간 거실 벽, 가령 이미 눈에 익어버려서 그것을 웃음거리로 바꿀 수 있다 해도 거기서 확실하게 바람은 들이닥친다. 웃고 있어도 바람은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빨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금간 곳을 메우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금간 곳을 부끄럽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뭔가 역할을 가진,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나. 부모로서의 나. 아내나 남편을 가진 나. 남자로서의 나. 여자로서의 나. 모든 것에 '자각'이 필요하다.

끔찍하게 귀찮고 무겁기 짝이 없는 그 '자각'이라는 것.

그 자각이 빠져버린 부부가 쌓아올린 가정이라는 모래 위의 누각은 비바람이 몰아치면 한 차례의 파도에도 허망하게 휩쓸려나가 모래사장에 가족의 사해만을 남겨놓은 채 사라져 버린다.

모래에 쳐박힌 조개껍질처럼 어린 아이들은 그곳에서 물결의 행방을 지켜본다. 그리 쓸쓸한 것도 슬픈 것도 아니다. 그저 엄청나게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을 뿐, 아이는 그 상황이나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뛰어난 연기력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약한 생물이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갖추고 태어난 본능이다.

'부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지 못할 일이 있다.'

자주 듣는 말이다. 분명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 당사자만 모르고 있는 둘만의 일'은 어린 아이나 타인의 냉정한 눈에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있다.

5월에 어느 사람은 말했다.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p, 31~33

 

 

 

 

 

 

 


 

 

 

 

 

 

 

도서관에 가면 다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욕심 내서 빌려올 수 있는 최대 권수까지 꽉꽉 채워 빌려오곤 한다. 

이번엔 데이트가 끝나고 오빠랑 같이 도서관에 들러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책꽂이에서 책을 뺐다 꽂았다 하는 모습을 보고 오빠가 이 책을 쥐어주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문의 여자》를 포기하고 대신 이 책을 가져왔기에 마음에 안들면 오빠한테 짜증을 부리려고 했는데.. 짜증을 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정도랄까.

동명의 소설인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때문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과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인 릴리 프랭키의 《도쿄타워》는 좀처럼 읽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도쿄타워》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하나의 상징물로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니.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이 있던가. 예전엔 우리 가족만 부모님이 다투고, 나만 불행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자라면서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모두 다 저마다의 불행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도쿄타워》를 읽으면서 남의 불행한 가정사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내내 받으며 '이런 이야기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상상해내지 못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내 촉이 틀리지 않았던걸까. 이 이야기는 릴리 프랭키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주로 엄마와 살아가며 아빠와는 안부만 주고받으며 가끔씩만 얼굴을 보는 사이. 분명 일반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해내고 있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그는 릴리 프랭키의 아버지였다는 점이었다. 아들한테 헌신하느라 자신의 삶을 잃은 채 살고계신 어머니와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사는 것 같아보이는 아버지. 완전한 가정을 이루며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안계신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 두 분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 애매한 가정사. 릴리 프랭키는 이런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가정사를 들려주면서 '이 책을 읽고 한참이나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부모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든가 뭔가 쑥쓰럽지만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불러냈다든가 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가 책이 많이 팔린 일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

점점 커가면서 어렸을 때 마냥 거대해보이던 엄마, 아빠는 점점 작아진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무언가를 가르쳐주던 엄마, 아빠가 이젠 우리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계속해서 물으실 때. 내가 무언가를 수십번 물어도 기쁜 마음으로 알려주시던 그들에게 나는 귀찮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을 잔뜩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가난은 비교할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띈다. 이 동네에서는 생활보호를 받는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이나 사회적인 지위는 달랐어도 객관적으로는 어느 쪽이 더 여유 있게 사는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부자가 없으니 가난뱅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쿄의 엄청난 부자처럼 유독 두드러진 존재만 없다면, 그 다음은 죄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것이어서 누구든 먹고 살기 힘든 정도가 아닌 한, 필요한 것만 채워지면 그리 가난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도 도쿄라는 무대에서 듣게 되면 관념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말 그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절절히 든다.

필요 이상으로 지니고 사는 도쿄 시민들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이들, 계단 위에 앉아 원가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낮잡은 적이 있었던가? 돈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는 전혀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그 동네에는 눈곱만큼도 떠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

개발 붐을 탄 패션빌딩에 들어선 어중간한 레스토랑에 줄을 서면서까지 기어들어가 어중간한 식사와 어중간한 와인을 마신다.

착취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 무시무시한 승부가 명확히 색깔별로 분류되는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나 판단력이 함몰되고 마는 모습에 빈곤은 떠도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그런 도쿄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가난하고 서글픈 것이다.

'가난'이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의 '볼품없는 가난'은 추함을 넘어 이미 '더러움'에 속한다. -p, 47~48

 

 

어린 아이의 하루와 한 해는 농밀하다. 점과 점의 틈새에 다시 무수한 점이 빽빽하게 차있을 만큼 밀도가 높고, 정상적인 시간이 착실한 속도로 착착 진행된다. 어린 아이는 순응성이 뛰어나고 후회를 알지 못하는 생활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냉혹할 만큼 싹둑 잘라내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광채나 변화에 지조라고는 없을 만큼 대담하게 전진하고 변화해 간다.

그들에게는 '그냥 어쩌다보니 지나가는 시간' 같은 건 없다.

어른의 하루와 한 해는 덤덤하다. 단선 선로처럼 앞뒤로 오락가락하다가 떠민 것처럼 휩쓸려간다. 전진인지 후퇴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모양새로 슬로모션을 '빨리 감기'한 듯한 시간이 달리가 그린 시계처럼 움직인다.

순응성은 떨어지고 뒤를 자꾸 돌아보고 과거를 좀체 끊지 못하고 광채를 추구하는 눈동자는 흐려지고 변화는 좋아하지 않고 멈춰서고 변화의 빛이라고는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지나가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간다. -p, 81

 

 

인간의 능력은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각각의 능력을 반이라도 활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고 집밖으로 나가고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헤매고 다닌다.

하지만 그런 방황도 능력이다. 활에서 막 쏘아 올려진 화살처럼 얼마간은 똑바로 날아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정한 성과는 거둘 수 있다.

전체 능력의 1, 2퍼센트만 쥐어짠다 해도 조금쯤은 괜찮은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화살의 궤도가 호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비어져 나온다. 몸이 여위도록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뛰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가 닿을 곳, 그 끝에 과연 '행복'이 있을것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능력이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끝장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 이란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취월장, 각종 도구가 발명되고 인간 장수의 비결도 발견되고, 우리는 과거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멋진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천 년 전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남긴 말, 오랜 옛날의 인간이 느꼈던 '감정'이나 '행복'에 관한 말이나 그 가치는 아직까지도 우스울 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놀라운 도구를 소유하고 어떤 쾌적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도 인간이 느끼는 것은 내내 마찬가지다.

감정의 받침접시에는 이미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의 잠재 능력을 남김없이 끌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해바라기 밭의 도깨비를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아직 보지 못한 자신의 능력 따위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p, 86

 

 

아이는 세상일을 알면 알수록 생각이 평평해진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부분은 지독히 싫어하게 된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을 콤플렉스로 느끼게 된다. -p, 87~88

 

 

인간이 태어나 맨 처음 알게 되는 부모자식이라는 인간관계. 그보다 더한 무언가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지만, 결국 태어나서 처음 알았던 것, 처음부터 그곳에 당연한 일처럼 있었던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고도 강력하고 결코 뒤집히는 일이 없는 관계였다고, 마음에 가시를 찔려본 후에야 가까스로 깨닫는다.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랑이 있으나 부모가 아이를 귀애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

사랑을 원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주는 입장이 되어 보고서야 겨우 조금씩 깨달아간다. 예전에 부모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가. 그날의 일을 깨닫고, 지금에야 나 자신이 그것과 똑같이 되려고 마음 먹는다.

그때, 인간은 확실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것인지도 모른다. -p, 123

 

 

아부지의 인생은 큼직하게 보이지만, 엄니의 인생은 열 여덟 살의 내가 보아도 어쩔 수 없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건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나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p, 159

 

 

'인간의 목적은 태어난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메이지 시대의 문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내 속에서 뜨겁게 일렁이는 영혼의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온 목적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가령 그것을 '꿈'이라는 말로 바꾸어 입에 올리는 자가 있다 해도, 그 '꿈'을 만들어낸 방법은 대략 저기 저 텔레비전이나 잡지 책에 자신의 너절한 욕망을 대충 갖다 붙인 것뿐.

바람에 날려 와 발치에 휘감기는 라이브 공연 광고지에 그저 잠깐 착각을 한 것뿐. -p, 161

 

 

"어쩔 생각이랴?"

"아르바이트는 하겠지만, 우선은 아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래? 그렇게 정했으면 됐잖여? 네가 정한 대로 해. 그렇기는 한데, 그림을 그리건 아무 것도 안 하건, 어떤 일에나 최소 5년은 걸리는 거여. 일단 시작하면 5년은 계속해. 아무 것도 안할 거라면 최소 5년은 아무 것도 안 하도록 해봐. 그 사이에 다양하게 생각을 굴려. 그것도 힘든 일이여. 도중에 역시 그때 취직했더라면 좋았다느니 어쩌느니 했다가는 너는 백수건달로서의 재능도 없는거여." -p, 181

 

 

엄니라도, 물론 아부지도, 모두가, 모든 부모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였던 게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와 똑같이 얼치기 짓을 하고 다닌 나날과 달콤새콤한 연애시절을 경험한 끝에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뭔가 낯 뜨겁기도 하고 또한 귀엽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과거로 타임슬립해서 젊은 시절의 엄니를 만난다면, 내가 과연 이 여인을 좋아했을까? 엄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그런 상상을 했다. -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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