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건 간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어도, 혹은 거의 만난 일조차 없어도 부모와 자식이 '부모자식'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말이 되면 그 관계는 '부모자식 사이'만큼 간단하지 않다.

단 한 번, 불과 몇 초의 사정으로 부모자식의 관계는 미래영겁까지 구속되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생활의 답답한 토양을 바탕으로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거듭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기도 하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람도 단 한 번, 단 몇 초의 다툼으로 간단히 무너지고 마는 일이 있다.

'부모자식'은 계속해서 덧셈이지만 '가족'은 더하기뿐만 아니라 빼기도 있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희극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온갖 성실한 것 중에서도 결혼이라는 놈이 가장 장난을 많이 친다.'

'부모자식'보다 더욱 더 간단하게 이루어져 버리는 '부부'라는 관계.

그 간단한 관계를 맺은 것뿐인, 장난질을 친 남자와 여자가 일이 흘러가는 과정상 부모가 되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어려운 관계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아무 일 없는 듯,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먼지를 밖으로 쓸어내지는 못해도 방구석에 밀어놓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이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연극 소품 같은 '가정' 정도는 만들어 준다.

하지만 가족관계란 몹시 신경질적인 것이다. 무신경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일수록 실은 세심한 신경이 필요하다. 금이 간 거실 벽, 가령 이미 눈에 익어버려서 그것을 웃음거리로 바꿀 수 있다 해도 거기서 확실하게 바람은 들이닥친다. 웃고 있어도 바람은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빨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금간 곳을 메우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금간 곳을 부끄럽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뭔가 역할을 가진,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나. 부모로서의 나. 아내나 남편을 가진 나. 남자로서의 나. 여자로서의 나. 모든 것에 '자각'이 필요하다.

끔찍하게 귀찮고 무겁기 짝이 없는 그 '자각'이라는 것.

그 자각이 빠져버린 부부가 쌓아올린 가정이라는 모래 위의 누각은 비바람이 몰아치면 한 차례의 파도에도 허망하게 휩쓸려나가 모래사장에 가족의 사해만을 남겨놓은 채 사라져 버린다.

모래에 쳐박힌 조개껍질처럼 어린 아이들은 그곳에서 물결의 행방을 지켜본다. 그리 쓸쓸한 것도 슬픈 것도 아니다. 그저 엄청나게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을 뿐, 아이는 그 상황이나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뛰어난 연기력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약한 생물이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갖추고 태어난 본능이다.

'부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지 못할 일이 있다.'

자주 듣는 말이다. 분명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 당사자만 모르고 있는 둘만의 일'은 어린 아이나 타인의 냉정한 눈에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있다.

5월에 어느 사람은 말했다.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p, 31~33

 

 

 

 

 

 

 


 

 

 

 

 

 

 

도서관에 가면 다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욕심 내서 빌려올 수 있는 최대 권수까지 꽉꽉 채워 빌려오곤 한다. 

이번엔 데이트가 끝나고 오빠랑 같이 도서관에 들러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책꽂이에서 책을 뺐다 꽂았다 하는 모습을 보고 오빠가 이 책을 쥐어주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문의 여자》를 포기하고 대신 이 책을 가져왔기에 마음에 안들면 오빠한테 짜증을 부리려고 했는데.. 짜증을 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정도랄까.

동명의 소설인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때문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과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인 릴리 프랭키의 《도쿄타워》는 좀처럼 읽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도쿄타워》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하나의 상징물로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니.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이 있던가. 예전엔 우리 가족만 부모님이 다투고, 나만 불행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자라면서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모두 다 저마다의 불행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도쿄타워》를 읽으면서 남의 불행한 가정사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내내 받으며 '이런 이야기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상상해내지 못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내 촉이 틀리지 않았던걸까. 이 이야기는 릴리 프랭키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주로 엄마와 살아가며 아빠와는 안부만 주고받으며 가끔씩만 얼굴을 보는 사이. 분명 일반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해내고 있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그는 릴리 프랭키의 아버지였다는 점이었다. 아들한테 헌신하느라 자신의 삶을 잃은 채 살고계신 어머니와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사는 것 같아보이는 아버지. 완전한 가정을 이루며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안계신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 두 분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 애매한 가정사. 릴리 프랭키는 이런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가정사를 들려주면서 '이 책을 읽고 한참이나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부모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든가 뭔가 쑥쓰럽지만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불러냈다든가 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가 책이 많이 팔린 일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

점점 커가면서 어렸을 때 마냥 거대해보이던 엄마, 아빠는 점점 작아진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무언가를 가르쳐주던 엄마, 아빠가 이젠 우리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계속해서 물으실 때. 내가 무언가를 수십번 물어도 기쁜 마음으로 알려주시던 그들에게 나는 귀찮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을 잔뜩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가난은 비교할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띈다. 이 동네에서는 생활보호를 받는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이나 사회적인 지위는 달랐어도 객관적으로는 어느 쪽이 더 여유 있게 사는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부자가 없으니 가난뱅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쿄의 엄청난 부자처럼 유독 두드러진 존재만 없다면, 그 다음은 죄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것이어서 누구든 먹고 살기 힘든 정도가 아닌 한, 필요한 것만 채워지면 그리 가난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도 도쿄라는 무대에서 듣게 되면 관념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말 그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절절히 든다.

필요 이상으로 지니고 사는 도쿄 시민들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이들, 계단 위에 앉아 원가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낮잡은 적이 있었던가? 돈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는 전혀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그 동네에는 눈곱만큼도 떠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

개발 붐을 탄 패션빌딩에 들어선 어중간한 레스토랑에 줄을 서면서까지 기어들어가 어중간한 식사와 어중간한 와인을 마신다.

착취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 무시무시한 승부가 명확히 색깔별로 분류되는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나 판단력이 함몰되고 마는 모습에 빈곤은 떠도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그런 도쿄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가난하고 서글픈 것이다.

'가난'이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의 '볼품없는 가난'은 추함을 넘어 이미 '더러움'에 속한다. -p, 47~48

 

 

어린 아이의 하루와 한 해는 농밀하다. 점과 점의 틈새에 다시 무수한 점이 빽빽하게 차있을 만큼 밀도가 높고, 정상적인 시간이 착실한 속도로 착착 진행된다. 어린 아이는 순응성이 뛰어나고 후회를 알지 못하는 생활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냉혹할 만큼 싹둑 잘라내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광채나 변화에 지조라고는 없을 만큼 대담하게 전진하고 변화해 간다.

그들에게는 '그냥 어쩌다보니 지나가는 시간' 같은 건 없다.

어른의 하루와 한 해는 덤덤하다. 단선 선로처럼 앞뒤로 오락가락하다가 떠민 것처럼 휩쓸려간다. 전진인지 후퇴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모양새로 슬로모션을 '빨리 감기'한 듯한 시간이 달리가 그린 시계처럼 움직인다.

순응성은 떨어지고 뒤를 자꾸 돌아보고 과거를 좀체 끊지 못하고 광채를 추구하는 눈동자는 흐려지고 변화는 좋아하지 않고 멈춰서고 변화의 빛이라고는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지나가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간다. -p, 81

 

 

인간의 능력은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각각의 능력을 반이라도 활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고 집밖으로 나가고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헤매고 다닌다.

하지만 그런 방황도 능력이다. 활에서 막 쏘아 올려진 화살처럼 얼마간은 똑바로 날아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정한 성과는 거둘 수 있다.

전체 능력의 1, 2퍼센트만 쥐어짠다 해도 조금쯤은 괜찮은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화살의 궤도가 호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비어져 나온다. 몸이 여위도록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뛰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가 닿을 곳, 그 끝에 과연 '행복'이 있을것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능력이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끝장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 이란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취월장, 각종 도구가 발명되고 인간 장수의 비결도 발견되고, 우리는 과거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멋진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천 년 전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남긴 말, 오랜 옛날의 인간이 느꼈던 '감정'이나 '행복'에 관한 말이나 그 가치는 아직까지도 우스울 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놀라운 도구를 소유하고 어떤 쾌적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도 인간이 느끼는 것은 내내 마찬가지다.

감정의 받침접시에는 이미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의 잠재 능력을 남김없이 끌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해바라기 밭의 도깨비를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아직 보지 못한 자신의 능력 따위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p, 86

 

 

아이는 세상일을 알면 알수록 생각이 평평해진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부분은 지독히 싫어하게 된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을 콤플렉스로 느끼게 된다. -p, 87~88

 

 

인간이 태어나 맨 처음 알게 되는 부모자식이라는 인간관계. 그보다 더한 무언가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지만, 결국 태어나서 처음 알았던 것, 처음부터 그곳에 당연한 일처럼 있었던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고도 강력하고 결코 뒤집히는 일이 없는 관계였다고, 마음에 가시를 찔려본 후에야 가까스로 깨닫는다.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랑이 있으나 부모가 아이를 귀애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

사랑을 원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주는 입장이 되어 보고서야 겨우 조금씩 깨달아간다. 예전에 부모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가. 그날의 일을 깨닫고, 지금에야 나 자신이 그것과 똑같이 되려고 마음 먹는다.

그때, 인간은 확실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것인지도 모른다. -p, 123

 

 

아부지의 인생은 큼직하게 보이지만, 엄니의 인생은 열 여덟 살의 내가 보아도 어쩔 수 없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건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나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p, 159

 

 

'인간의 목적은 태어난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메이지 시대의 문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내 속에서 뜨겁게 일렁이는 영혼의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온 목적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가령 그것을 '꿈'이라는 말로 바꾸어 입에 올리는 자가 있다 해도, 그 '꿈'을 만들어낸 방법은 대략 저기 저 텔레비전이나 잡지 책에 자신의 너절한 욕망을 대충 갖다 붙인 것뿐.

바람에 날려 와 발치에 휘감기는 라이브 공연 광고지에 그저 잠깐 착각을 한 것뿐. -p, 161

 

 

"어쩔 생각이랴?"

"아르바이트는 하겠지만, 우선은 아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래? 그렇게 정했으면 됐잖여? 네가 정한 대로 해. 그렇기는 한데, 그림을 그리건 아무 것도 안 하건, 어떤 일에나 최소 5년은 걸리는 거여. 일단 시작하면 5년은 계속해. 아무 것도 안할 거라면 최소 5년은 아무 것도 안 하도록 해봐. 그 사이에 다양하게 생각을 굴려. 그것도 힘든 일이여. 도중에 역시 그때 취직했더라면 좋았다느니 어쩌느니 했다가는 너는 백수건달로서의 재능도 없는거여." -p, 181

 

 

엄니라도, 물론 아부지도, 모두가, 모든 부모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였던 게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와 똑같이 얼치기 짓을 하고 다닌 나날과 달콤새콤한 연애시절을 경험한 끝에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뭔가 낯 뜨겁기도 하고 또한 귀엽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과거로 타임슬립해서 젊은 시절의 엄니를 만난다면, 내가 과연 이 여인을 좋아했을까? 엄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그런 상상을 했다. -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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