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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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별 대가 없이도 넘치도록 주어지던 설렘과 기대 같은 것들이 어른이 되면 좀처럼 가져보기 힘든 이유는 모든 게 결정되어버린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벌 수 있는 돈,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 등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으면 대개 정해져 버린다. 장차 여행은 몇 나라나 더 가볼 수 있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으며 내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지가 점점 계산 가능한 수치로 뚜렷해지는 것이다. 남은 생이 보인다고 할까. 허나 아무리 어른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채로 몇십 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가혹하다, 고 생각하기에 나는 노력하기로 했다. 너무 빨리 결정지어진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은 생에서도 한두 번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기길 바라며 살고 싶다. 자고 일어나서 눈을 떴을 때 또다시 맞을 하루가 버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가꾸는 일이 소중한 이유는 그 일을 함으로써 나와 내 삶이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믿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게 앞으로 가는 건지는 몰라도,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 그런 느낌을 가질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살이라도 몇 킬로 빼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 해도, 그런 작은 변화의 여지라도 있어 내 남은 생이, 내 몸과 마음이 이대로 정해져 버리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노력할 거다.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을 삶을 위하여.
-p, 149

  














이 책을 읽고 문장들을 정리해둔건 해가 바뀌기 전, 12월 즈음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행동은 그동안 어렴풋이 느끼던 감정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내 상태를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문장들을 뽑아내는 것. 그래서 아마도 한겨울에 뽑아낸 이 문장들을 개나리가 만개할 정도로 따뜻해진 지금, 다시 읽어본다면 공감이 가지 않는 문장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 찬찬히 이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똑같이 공감했던 문장은 이거였다.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얘기가 안 끊어진대요."


그럼, 내가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건가?

-p, 125


난 이 문장을 읽으면서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을 '만난다'기 보단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만나고나면 후련해지는, 기분전환이 되어 밤에 푹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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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던가. 사실은 슬픔은 나누면 나에게는 반이 되지만 내 슬픔을 나눠가진 사람에겐 배가 되는게 아닐까. 


이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요즘의 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 (요즘 얼굴을 마주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인)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주고받는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불안함을, 내가 느끼는 자책을, 혹시라도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여러가지 핑계들을, 내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고 못났는지에 대한 넋두리를, 그렇게 죽는 소리들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얼마 전, 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며 멀리서 시간을 내 찾아와준 친구를 만나 모자만 푹 눌러쓴 채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에 갔다. 유일하게 민낯을 보여줄 수 있는 친구였음에도 예쁘게 화장을 한 친구 앞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꾸미지 않은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이런저런 불평만 늘어놓다 왔던 것 같다. 25살이면 멋진 여자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 신세를 한탄하다가 그럼에도 긍정적인 친구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나의 이야기는 '매일 책만 쳐다본, 강의만 쳐다본 그저그런 일상들', 다른 이야기로 돌려보겠다고 꺼낸 이야기들은 '잘 된 친구들에 대한 못마땅한 이야기들'. 집 근처의 동네 카페라 우리밖에 없던 그 작은 카페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를 태우고 가는 택시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참 많이 씁쓸해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주고 간 선물과 편지를 보며 코가 시큰해졌다.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누가 이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쉬운거래!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앉아서 집중하는게 얼마나 힘든건데! 그치?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마음 꾹 붙잡고 공부하고 있는 너도 진짜 대단한거야. 잘 하고 있어! 뭐, 나도 그렇지만 우리 지금 이 시기가 많이 불안하지? 그 마음 나도 너무 잘 알고있어서 니가 얼마나 기분 우울하고 다운되어있을지 상상이 가. 그래서 가끔은 내가 내 일을 남일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한다!


근데 내 인생, 너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까, 그냥 우리 견디자! 

견디면, 그렇게 시간 보내다보면 어느새 지난 줄도 모르게 다 끝나 있을거야!


그리고 물론 그동안 우리 할일도 열심히 할거구, 잘 할거란 것도 알아~ 뭐 좀 못하면 어때! 우린 아직 젊고 할 일은 많다는데, 난 너처럼 한명만 괜찮다고 응원해줘도 힘날 것 같아.


이 향 맡고 봄을 느끼렴. 우아하게 향기를 풍기며 공부하자. 공부하는동안 향초 때문에 가끔은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




너는 내가 널 만나서 불안한 이야기들을, 내 우울하고 다운되어있을 모습을 내내 내비칠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럼에도 넌 내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거였구나. 


여전히 내 마음을 컨트롤하기에 버거운 날들이다.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내 슬픔을 반으로 나누고 싶어할거라는 걸 잘 알기에 생각없이 주고받던 연락을 잠시 멈추고, 입도 다물기로 했다. 내 부정적인 모습마저 평생 읽을 책처럼 차분하게 들어주는 이들이 있어 미안하면서도 고맙지만 내 슬픔을 나눠가지게 한, 그 후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건 싫다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께도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처음엔 나 혼자 기록하는 공간이라 여기고 썼던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고, 찾아와주니 좋았지만 그만큼 내 진심을 담은 생각을 집어넣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역시, 지금은 이 공간에서는 이기적이고 싶다. 내 친구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주러 기꺼이 찾아와 준 사람이니까! (제목에 속아 책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고 왔다가 책에 대한 이야기보단 내 이야기가 더 많은 내 일기같은 글을 읽고계신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하다...)


친구의 말처럼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지난 줄도 모르게 다 끝나 있을거니까'. 그리고 '내 주변사람들에게 난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시간을 잘 보내려 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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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


하지만 만남이란 건 원래 어떤식으로든 어긋남을 동반하기 마련 아닌가. 언제 인연이 내가 맞이할 준비가 되었을 때 찾아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언제나 내가 좀 더 성숙했을 때,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보다 안정되어 있을 때,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아무튼 내가 조금은 더 잘나가고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일 때 누군가를 만나길 바랐지만,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되어본 적 없었고, 여전히 이렇게 상대를 앞에 두고 또 아쉬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난 언제까지 상대의 완벽함을 통해 내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노력을 되풀이해야 할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라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완전한 존재일 것임을 알고, 그렇게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누구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모든 모자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사랑이 아닐까?

-p, 108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나이기에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 때면

슬프다.

그게 소중한 사람일 땐 더더욱.

-p, 108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얘기가 안 끊어진대요."


그럼, 내가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건가?

-p, 125



"난 니가 좋은 게 좋아."

"어쩌죠. 저도 당신이 좋은 게 좋은데."

-p, 221



보자. 사랑하니까 이해하게 되는 것인가, 이해를 주고받다 보니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인가.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정말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사랑에 있어서 이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나를 명동 중앙극장으로 이끌어 함께 「렛미인」을 보았던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당시 막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그때부터 헤어지던 날까지 우리가 주고받았던 것은 결국 서로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끝없는 과정들의 연속 외에 다른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은 열렬하였으나, 어리고(?) 서툴렀던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서로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만을 구하다 결국엔 서로 또 다른, 더 새롭고 더 깊은 이해를 찾아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는 연습이 조금만 더 잘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만났더라면. 조금만 더 성숙했을 때 서로를 알았더라면.


사랑과 이해는 어째서 한 몸이 아니던가.

헤어지고 나서야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왜 그렇게 많았던가.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다던 너를 이해하는 일만은 어째서 그토록 어려웠던가.

가끔은 사랑보다 이해가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p,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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