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KT&G 여자배구단 체육관에서는 전지훈련 차 방문한 일본 도레이 팀과 KT&G와의 친선게임이 열렸다. 코트에서는 양팀 선수들이 한창 몸풀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체육관 한 켠에서 코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선수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최광희였다.

최광희(KT&G·30)는 얼마전 일본에서 개최됐던 여자배구 월드컵(11월 1일~11월 15일) 폐막 전날인 14일, 폴란드전에서 3세트 초반, 리시브 하는 도중 양쪽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부상으로 교체된 뒤 무릎에 붕대를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최광희의 모습이 TV중계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히기도 했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듯했다.

이번 대회는 1~3위 입상팀에게 2004아테네 올림픽 본선 직행티켓이 주어지는 중요한 대회였다. 우리나라는 직행티켓은 고사하고 12개 출전국 중 최종순위 9위(3승8패)에 그쳤다. 95년 5위, 99년 4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실망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풀세트까지 가서 진 경기도 많았고, 월드컵에서 성적이 이렇게 저조한 경우도 이번이 처음이라서 아쉬움이 커요. 준비기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풀세트 경기는 승리해서 지금보다는 성적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이번 대회는 보름 동안 각 팀당 11게임을 소화해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보다 우리가 부진했던 가장 큰 원인은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전국체전(10월 11일~10월 16일), 실업대제전(10월 21일~10월 26일)이 끝나고 난 뒤 다음날 바로 일본으로 출국했기 때문에 선수간에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4일에 불과했다.

"국내볼이랑 국제볼이랑 볼도 달라요. 볼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2~3주정도 지나야 되는데, 선수들이 다 피로한 상태니까 체력 소모도 컸고, 볼적응도 늦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 대회 막바지에 가서는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 따지고 보면 최광희의 부상도 준비기간 부족 탓이 크다. 체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부상도 입기 쉬우니까 말이다. 또한 세 차례의 풀세트 경기(미국, 일본, 쿠바전)를 모두 내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올해 4월부터 대표팀 완장을 차고 있는 최광희로서는 더욱 아쉬움이 크다. 사실 그녀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쉴 틈이 없었다. 국내경기건 국제경기건 자신을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묵직한 스파이크를 때려대고, 코트에 부지런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오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힘들어도 어디서든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감사해요. 근데 이번처럼 성적도 안 나고, 다치기까지 했을 때는 정말 의욕이 상실돼요. 힘들어도 성적이 좀 나고, 주위에서 '수고했다', '잘했다' 이런 말 들으면 보람도 있고, 극복하기 쉬울텐데…."

체력도 달렸지만 정신적으로도 무척 피곤하고 힘든 대회였다고 고백한다.

"보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저런 미스를 할까' 말을 하지만 하는 사람들도 너무 속상하고 답답한 거예요. 이렇게밖에 못하니까. 더구나 국내에서 혹평을 들었을 땐 사기저하 되고, 코트에 서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어찌보면 1라운드 첫 경기였던 미국전부터 어긋났다. 세트 스코어 2-3(21:25 19:25 25:21 25:22 13:15)으로 패했던 미국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상쾌하게 스타트를 끊었다면 다음날 이탈리아, 일본전에서 흥에 겨워 했을텐데 결과적으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게 연패의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전도 아쉬움이 많이 남기는 매한가지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실력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당일 컨디션에 따라서 경기결과가 많이 좌우되는데, 객관적인 전력상 50:50 또는 60:40으로 우리가 일본을 다소 앞선다는 것이 최광희의 평가다. 하지만 미국전과 마찬가지로 풀세트(25:23 21:25 28:26 15:25 12:15)끝에 역전패 당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됐던 팀은 일본이에요. 우리나라 정서가 일본한테 지면 거의 매국노 분위기니까(웃음). 그리고 일본은 배구인기가 좋아서 관중들의 호응도가 크거든요. 아무래도 경기할 때 좀 위축이 되죠. 실력차가 확 나는 게 아니라서 저희가 준비기간이 좀 있었으면 덜 했을텐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나갔으니까 아무래도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죠"

경기는 패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서 얻은 소득도 있다. 대표팀에 어린 선수들이 많아 결정적인 순간, 경험 부족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경기를 거듭할 수록 선수들이 자신감이 붙는 것 같다고 최씨는 말한다. 특히 한국배구가 발전하려면 장신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대표팀 새내기인 임유진(180cm), 김향숙(190cm)의 성장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아시아는 약게 했어요. 근데 요즘은 유럽도 아시아 스타일을 많이 따라와요. 암만해도 아시아 쪽은 수비가 든든하고, 유럽이나 남미 쪽은 신체적인 조건이 좋으니까 블로킹이랑 서브가 강한데, 요즘엔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신장도 좋은데다가 배구도 '낮게 빠르게' 하니까 갈수록 유럽이나 남미 쪽 상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광희는 "한국배구의 장점인 수비와 리시브를 더욱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팀이 장신화 되는 건 바람직하지만 아무래도 경력이 짧아지고, 키가 커지다 보니 예전과 비교했을 때 수비에서 헛점이 많이 보이는 까닭이다.

94년에 처음 태극마크를 단 최광희는 1996년, 2000년 올림픽에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달권 진입에는 실패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선수로서는 마지막 올림픽인 만큼 각오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96년에는 진짜 얼떨결에 나갔던 것 같아요. 2000년 올림픽 때는 미국한테 2-3으로 져서 4강에 못 들어갔어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자다 깰 정도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 일단 내년 5월에 있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티켓을 따는 게 급선무고요. 올림픽에 나가게 되면 다시 마음 합쳐서 4강에 들 수 있도록 죽어라 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죠. 진짜 연습밖에 없는 거 같아요.(웃음)"

본인은 순전히 '짬밥' 때문이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실력적으로나 실력 외적인 면에서 최광희가 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때로는 '카리스마'로, 때로는 '자상함'으로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최광희. 혹시 주장으로서 힘든 점은 없을까.

"나도 아픈데, 나도 쉬고 싶을 때 있죠.(웃음) 내색을 못하니까 속상할 때도 있어요. 근데 팀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애들 입장에서는 '언니가 말해줬으면…'하는 게 있잖아요. 중간에서 그런 역할 하는 게 힘들지만 애들이 잘 따라줘요. 참고 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면 고맙죠"

최광희의 눈빛에선 오기와 독기가 뚝뚝 묻어난다. 평소 말할 때는 털털함과 인간미가 넘치는 여유있는 모습이지만 경기할 때만큼은 악바리 근성으로 똘똘 뭉쳐 눈매가 매섭기 그지 없다. 대표팀에서 최고참인 만큼 체력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보다도 체력훈련에 열심인 모습은 후배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다.

"웨이트를 열심히 해요. 지금은 테크닉보다는 파워, 높이가 안 되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자사제품인 홍삼 많이 먹고(웃음). 나이 들어서 못하면 서럽잖아요"

일단 최광희로서는 재활훈련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다. 2004V-투어대회(전신 슈퍼리그)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제 컨디션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올해 실업 12년차인 최광희의 최우선 목표는 팀 우승. 지금까지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MVP나 인기상 같은 개인상도 꼭 한 번 타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미래의 실업팀 감독을 꿈꾸는 최광희는 올해 대학원(경희대 체육교육)에 입학했다. 이날도 1주일에 2번 있는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총총히 체육관을 떠났다. 얼굴에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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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배구팀은 지난 82년 2월 창단돼 20여년 동안 수많은 배구팬들에게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아쉬움을 안겨준 전통 있는 팀이다.

80년대 후반에는 각종 대회에서 수 차례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박삼용, 이성희, 오욱환, 서남원 등 국가대표 선수들도 여럿 배출해냈다. 특히 89년 대통령배대회 3차 대회에서 사실상 대학팀인 서울시청이 내로라 하는 실업팀들을 죄다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 감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올드 팬들도 많으리라.

하지만 서울시청 배구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11월 5일 서울시 체육회는 "4일 시장단 회의에서 비인기 종목 육성을 위해 배구, 축구팀을 해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인 해체통보를 받은 배구, 축구팀 선수단은 망연자실해 있다. 선수들은 하루아침에 운동을 그만둬야 될 처지에 놓여 있고, 앞으로의 진로도 '안개 속'이다. 가만있다 뒤통수를 얻어맞아서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해체 통보를 받았지만 서울시청 배구팀 이문섭 감독과 선수들은 모두 숙소에 남아 있었다.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일단 계약기간이 끝나는 12월 31일까지는 협상안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7일 서울시청 배구팀 숙소 근처에서 이문섭 감독과 선수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 중에도 이문섭 감독의 전화는 쉴새없이 울려댔다.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가방은 갖가지 서류뭉치들로 가득했다. 억울해서 밤잠도 안 오고, 말을 하도 많이 해서 목도 아프다고 한다. 말하는 중간 중간 목이 메이는지 울컥하길 수 차례. 하지만 상황이 너무 절박한지라 사람들에게 팀 해체의 부당성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하루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서울시청 배구팀이 갑작스런 해체통보를 받은 것은 지난 11월 5일. 말 그대로 통보였다. 사전에 해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더구나 선수단은 전국체전과 실업배구대제전을 마치고 10일간 휴가 중이었다.

하지만 숙소로 복귀한 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전국체전 3위 입상에 대한 '보너스'가 아니라 어이없는 '해체통보'였다. 그것도 숙소에서 밥 먹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문섭 감독이 더욱 분통을 터뜨린 건 서울시 체육회의 성의 없는 자세 때문이다.

"선수들이 1년 계약직이니까 12월 25일까지 월급 주고 위로금 조로 두 달치를 더 주겠대요. 배구 스카우트 기간도 지났고, 당장 배구를 그만둬야 되는데 진로 결정할 틈도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내쳐버리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죠."

선수들도 서울시 체육회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문 보면 서울시 체육회에서 선수들의 향후 진로를 모색해준다고 나왔던데 사실 그 부분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군대 가는 애들은 군대 간다고 쳐도 나머지 군대 면제된 선수에 대한 대책이나 군대 갔다오고 나서 '남아라' 이런 얘기도 전혀 없었고요."(김상기 선수)

서울시 체육회에서 내세우는 명분은 '비인기종목 육성'이다. 하지만 지난 대구 U대회에서 남자 대표팀이 금메달도 땄고, 2년여 동안 질질 끌어오던 LG화재 이경수 문제도 해결되어 배구 붐이 다시 일어나려는 지금, 서울시청 팀 해체 결정은 분명 배구 인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비인기종목은 뭐고, 인기종목은 뭐예요? 전 구분이 안 가요. 그런 명분이 맞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런 처사나 방법에는 정말 화가 나요. 어떻게 감독 허락도 없이 선수들한테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떻게 밥 먹지 말고 나가라고 그래요."

현재 남자실업팀은 여섯 개에 불과한 상황. 팀 수가 부족한 탓에 프로화 작업은 매년 제자리걸음이다. 서울시청이 해체되면 대학졸업생들이 갈 곳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되면 꿈나무 선수들도 배구를 점점 외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서울시청 해체 여파가 다른 공사 팀으로 확산되는 것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그냥 손놓고 있는 걸까?

"협회에서 12월에 개막하는 V-투어리그에는 참가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기간동안 인수할 팀을 찾아보자고 하면서…. '노'라고 했어요. 우리가 잘하는 팀도 아니고. 차라리 각 구단에서 선수 1~2명씩 받아주는 게 낫다고 했어요."(이문섭 감독)

그래도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선수들한테서도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해체통보를 받은 이상 번복은 될 수가 없어요. 통보가 난 이상 해체되는 건 어쩔 수 없죠. 협회에서는 V-투어리그만 나가달라고 하는데 거기 나가면 선수들을 두 번 죽이는 게 돼요."(신지현 선수)

"다들 배구 너무 하고 싶어하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근데 시합을 나가면 서울시민구단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갔지 서울시청 이름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김상기 선수)

이문섭 감독은 해체의 부당성 외에도 그동안 배구부가 받았던 숱한 차별과 극심한 냉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색도 점점 붉게 변해갔다.

서울시 체육회에서는 연초에 운동부 감독들에게 예산서를 제공해 준다. 이문섭 감독은 2003년 직장운동경기부 세출 예산(2003년 1월, 서울특별시) 문서에 근거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원래 서울시청팀에 5개부(축구, 배구, 육상, 복싱, 양궁)가 있었어요. 5개부 인원을 최대 60명으로 정해놨어요. 작년부터 운동부 운영이 시청에서 서울시 체육회 쪽으로 넘어오면서 사이클부를 새로 만들었어요. 전체 인원은 60명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우선 각 부 코칭 스태프를 2명에서 1명으로 줄였는데, 유독 배구팀만 선수까지 12명에서 9명으로 축소시킨 거예요. 대신 사이클은 선수 7명을 새로 뽑았고요."

"선수연봉이 A, B, C급 3개 등급으로 나눠져 있어요. 시청에서 운영했을 때는 배구부는 전부 B급으로 통일했어요. 근데 지금 배구는 다 C급이에요. 다른 부는 형평성에 맞게 A, B, C급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일방적으로 '야, 배구는 다 C급이야' 그런 거예요."

"장비비 예산이 올해 삭감됐거든요. 그럼 부마다 어느 정도 같은 비율로 삭감해야 되는데 배구부가 5588만원으로 가장 많이 삭감됐어요."

조용히 이문섭 감독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선수들도 그동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왔던 불만들을 쉴새없이 토해냈다.

"대형버스가 있는데 축구부랑 같이 써요. 축구가 인원수(20명)가 많으니까 거의 축구부가 쓰죠. 저희는 감독님 차(9인승 카니발)랑 박광열 선수 밴이 있거든요. 거기에 10명이 끼어 타요. 밴에 볼이랑 네트 싣고, 체구 작은 선수 한 명은 짐칸에 타고요. 덩치나 작으면…."

"전용체육관이 없으니까 잠실체육관 보조경기장에서 훈련을 하는데 예산이 없다고 겨울에 운동할 때 히터도 안 틀어줘요. 그나마 체육관도 마음대로 못 써요. 행사 관계로 사용 못할 때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요.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참으면서 했는데…."

"선수들이 9명밖에 안 되잖아요. 이번 체전 때도 삼성이랑 하는데 세터 2명, 리베로 1명 빼면 6명이서 공격을 해요. 한 번씩 때리면 공이 없어요. 볼 주우러 가면 또 공격할 사람이 없어요. 공격하다 보면 볼이 없고.(웃음)"

지난 전국체전 대 삼성화재 전. 비록 지긴 했지만 서울시청은 악착같은 플레이로 그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로부터 승리한 팀보다 오히려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선수가 9명밖에 안 되니 쉴 틈이 없었다. 후반 급격한 체력 저하가 이날 패인 중 하나였다.

"진짜 어디가 부러져서 깁스를 하거나 심하게 다치지 않으면 그냥 참고 운동해요. 아파도 내색을 못하죠. 다쳤을 때 치료비도 저희가 부담하고요. 대학원 다니는 선수도 있는데 학비도 저희들이 내요."

연초에 이문섭 감독은 '배구단 활성화 계획안'을 작성해서 윗선에 올렸다고 한다. 다른 실업팀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어느 정도 지원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잠깐 내용을 살펴보자면 1) 최소한의 엔트리 구성(감독1, 코치1, 선수 12명) 2) 선수 대학원 등록금 지원 3) 선수급료 인상 4) 여건이 허락되면 선수 스카우트 비 지급 등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요구사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수들이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면서도 어금니 꽉 깨물고 견뎌왔던 것은, '만년 꼴찌'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것은, 배구를 사랑하고 배구를 하고픈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선수들의 이런 '소박한 꿈'이 온통 짓밟히고, 마구 짓이겨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82년 서울시청 창단 멤버로 21년간 서울시청에 몸담아온 이문섭 감독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 없이 열심히 따라와 준 선수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에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어요"라면서 '선수들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야, 밥 악착같이 먹어."

인터뷰를 마친 후 이문섭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서울시는 배구팀을 버렸지만 팬들은 버리지 않았다. 그동안 숨어있던 배구팬들도 '서울시청 살리기'에 팔 다리 걷어붙이고 나섰다. 서울시청 배구팀의 부활을 위해서! 선수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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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2014-10-03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234

서울시청 2014-10-03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거에 서울특별시청에서
남자배구단을 만든적이있었다!
지금의 쌍방울레이더스(프로야구단)
가 생기기이전부터
 

- 그러고 나서 2001년 국제그랑프리대회 나가서 드몽 포콩 선수랑 붙어서 이겼었죠?
"예. 그때 이기고도 되게 기분 나쁘더라고요. 이 놈, 세계선수권대회 때 좀 지지. 그러니까 별명을 바꿔줘야 돼요. 자꾸 '비운', '비운' 그러니까 세계선수권 때는 지고, 별로 안 중요한 대회에서는 이기고… 이러는 게 자꾸 연결이 되는 거 같아요."

- 대구 U-대회랑 2003세계선수권 때 MBC에서 해설하셨잖아요. 해설은 처음 하시는 거였을텐데 해보시니까 어떠셨어요?
"처음 할 때는 긴장된 상태에서 하니까 진짜 떨리더라고요. 대구 U-대회 때 첫날은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둘째날, 셋째날 되니까 조금 감이 잡히고, 넷째날에는 농담도 던지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했던 캐스터가 '윤 코치, 이젠 농담도 하네' 그러더라고요. 유도만 하다가 새롭게 해설을 해보니까 제 시각도 넓어진 거 같고요.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해보고 싶어요."

-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근데 솔직히 '너 왜 그렇게 못하냐?' 그렇게 말은 못하죠. 대부분 잘 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은 정말 좋았어요. 제 생각에 유도는 동작이 순간 순간 바뀌기 때문에 다른 종목보다 해설하기가 힘든 거 같아요. 처음에는 아나운서가 말을 하면 제가 빠져줘야 되는데 타이밍을 못 잡아서 부딪힐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나아지더라고요. 방송사에서 농담으로 그래요. '윤 코치, 올림픽 대표로 선발 안 되면 해설로 가면 되겠네'. 보내주면 가면 좋죠.(웃음)"

- 주위에서 윤동식 선수를 두고 '편파판정의 최대 희생양'이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변 사람들한테서 '네가 어느 학교를 갔다면 네가 바라는 메달을 진작에 땄을 텐데…' 이런 얘기 들으면 마음이 안 좋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요. 근데 제가 한양대를 나와서 도움이 됐던 것도 진짜 많거든요. 한양대 나와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요.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 그러고 보니 올해에는 선수, 코치, 해설 등 세 가지 역할을 다 하신 거 같아요. 어떤 게 제일 힘드신가요?
"가장 힘든 건 운동이죠.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건 정말 힘들어요. 힘들다는 생각이 단 하루도 떠나질 않아요. 몸이 피곤하니까. 어느 정도냐면 눈만 딱 뜨면 영양가 있고 좋은 음식만 찾게 돼요. 제가 영양제를 대 여섯 개 복용하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몇 알, 점심에 몇 알… 정말 영양제 먹다가 하루가 다 가요. 콜라 같은 탄산음료나 커피도 안 마셔요. 이왕이면 몸에 좋은 걸 찾게 되지. 그렇게 먹고도 운동하기 진짜 힘들어요.(웃음)"

- 유도하시면서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인가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땄을 때요. 그 당시가 군 면제가 되느냐, 안 되느냐 그 시기였거든요. 제가 남자 유도선수 중에서는 첫 금메달을 땄고, 군대도 면제됐고, 실업팀(마사회)도 결정됐고, 뭐 더할 나위 없었죠. 94년에는 정말 좋은 일이 많았던 거 같아요."

- 전기영 선수랑 상대 전적이 어떻게 되세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그걸 따로 체크하진 않았거든요. 기영이하고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서른 번 정도 싸우지 않았나 싶어요. 초반에는 제가 많이 졌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제가 4번인가 연속해서 이겼거든요. 그 전에는 두 번 지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면 한 번 이기고 이런 식이어서 전체적인 전적에선 제가 좀 딸리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기영이가 한 체급 올리게 된 게, 제가 4번을 연달아 계속 이기니까 체중도 많이 나가는 상태여서 '체급을 올려야겠다' 그래서 올렸고, 전체 전적으로 봤을 땐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근데 마지막에 내가 많이 이겼으니까 내가 한 두 번 더 이기지 않았나.(웃음)"

- 96애틀랜타 올림픽, 2000시드니 올림픽 때 조인철, 유성연 선수가 나갔는데 결국 두 선수 모두 금메달을 못 땄잖아요. 그래서 더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을 거 같은데요.
"제 욕심일지 모르지만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제가 나갔어야 했어요. 97세계선수권은 아니고요. 그때는 인철이 기량이 많이 향상됐었기 때문에 충분히 나갈 만했고, 금메달도 땄잖아요. 96년 올림픽에서 인철이의 실력은 동메달이면 최상의 성적이었거든요.

인철이는 올림픽 금메달이나 메달권 진입보다는 출전하는 거 자체에 만족했었지만 저는 금메달이 목표였기 때문에 96애틀랜타 올림픽은 제가 나가는 게 정상적인 거였어요.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제가 나갔으면 어떻게 됐을 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국제대회에서 90kg으로 우승도 몇 번 하고 잘했거든요.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 땄던 후이징가 선수도 같이 한 체급 밑에 있을 때 저랑 두 번 싸워서 두 번 다 졌거든요.

그때 동메달 딴 선수랑 전부 다 보면 저한테 졌던 선수들이에요. 96년 올림픽 때 금, 은, 동메달 땄던 선수들도 전부 저한테 졌던 선수들이고요. 유도 선수들은 대체로 자기랑 한 번 해서 이겼던 사람들한테는 잘 안 지거든요. 특히 저는 그랬어요. 한 번 딱 이기면 잘 안 졌거든요. 그런 게 굉장히 아쉽더라고요."

- 조인철 선수가 96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동메달 따고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 안 하던가요?
"저한테 와서 미안하다고 얘기 한 번 하더라고요. 잘 했다고 그랬지요. 2000시드니 올림픽 때는 유성연 선수한테서 시드니 현지에서 전화가 왔어요. '죄송하다'고. 뭐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도 대표선발전 때 선의의 경쟁을 펼쳤어요. 제가 전략적인 부분을 약간 잘못 세웠던 게 패인이었던 거 같고요.

크게 보면 96년이나 2000년에는 대회 준비를 잘 못했어요. 모든 정성을 거기에 다 쏟아야 되는데 그렇게 못했던 거 같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정성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근데 한편으로는 마음 편하게 갖고 있어요. 안 되면 코치하면 되니까.(웃음)"

- 2003세계선수권 때 81kg급 선수들 경기하는 모습 많이 보셨을텐데요. 보니까 어떠세요?
"제가 81kg급으로 내리기로 결심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세계적으로 순위권 안에 있는 선수들이 다들 오른쪽 잡기를 하고 있거든요. 오른쪽 잡기를 하는 유럽선수들은 변칙기술을 많이 쓰는데, 같은 오른쪽 선수들하고 싸울 땐 변칙기술이 잘 먹히지만 왼쪽 선수들이랑 했을 때는 그런 기술을 성급하게 못해요. 근데 저는 왼쪽이거든요. 그래서 얘네들이랑 하게 되면 손쉽게 경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오히려 국내대회 보다 올림픽이 훨씬 쉬울 거 같아요."

- 국내 선수 중에 라이벌로는 누가 있나요?
"압축시키면 두 명 정도 되는데, 2003세계선수권에 출전했던 최선호 선수가 있고, 대구-U대회에서 개인전, 단체전 우승했던 권영우 선수가 있는데, 대진표는 나왔어요. 권영우 선수랑 준결승, 최선호 선수랑 결승. 어차피 넘어야 될 산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있어요. 체력만 된다면 해볼 만한 거 같아요."

-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 대한 각오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가장 걱정되는 게 있어요. 1차 선발전에서 우승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 2차전, 3차전이 남아 있지만 심적으로 안정이 돼서 탄력 받고 더 열심히 할 거 같아요. 근데 만약에 3등, 4등, 5등 이렇게 되면 하긴 하겠지만 의욕도 떨어지고 맥이 빠질 거 같아요. 아예 1회전에서 탈락하면 딱 씻고 그만 할텐데, 3등, 4등, 5등 이렇게 돼버리면 어느 정도 점수는 받겠지만 1등한 선수랑 점수차이가 많이 나니까 따라가기 벅찰 거 같아요.
질 거면 아예 초반 탈락, 올라갈 거면 아예 1등, 이게 나을 거 같아요. 근데 제가 보기엔 저의 이런 비운의 스토리가 올림픽에서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스토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가끔 들어요.(웃음)"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올림픽 때만 반짝해서 호응해주시지 말고, 평소 때도 유도를 많이 사랑해주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보니까 유도선수 팬 까페도 많이 생겼더라구요. 까페에 응원글도 많이 남겨줬으면 좋겠고요. 유도팀이 지금보다 많이 창단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아무래도 경쟁팀이 있으면 선수 복지 수준도 높아지지 않겠어요?

정말 유도만큼 땀 흘리면서 운동한다면 프로 선수의 반 정도 대우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연봉 1억 이상 대우받는 선수 나와봐요. 학생들도 서로 배우려고 하고, 학부모들도 자녀들한테 많이 시킬거예요. 유도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거라고 봐요."

그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을 이제는 보상받을 때가 왔다. '오뚝이 스타' 윤동식의 마지막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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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스타' 윤동식이 20개월만에 다시 유도 매트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세계적인 테크니션'으로 인정받는 선수이자 국내 남자유도 선수로는 최다인 47연승(93~95년)의 대기록을 갖고 있는 윤동식(32·마사회 플레잉 코치).

그는 얼마전 막을 내린 제84회 전국체전 남자유도 81kg급에서 우승하면서 성공적인 복귀 신고식을 치렀고, 이제 올림픽을 향한 그의 마지막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올림픽과의 끈질긴 악연, '비운의 스타'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훌훌 털어 버리기 위해 노장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다쳐도 언제나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윤동식. 2004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1차 선발전(11월 11일~14일)을 앞둔 지난 10월 25일, 한국 마사회 유도단 숙소 근처 커피숍에서 윤동식 선수와 1시간 30분 가량 인터뷰를 가졌다.

-요즘 근황은 어떠세요?
"전국체전 이후로 올림픽에 대한 마음이 굳건해졌고, 연습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번 기회는 정말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있고요.

진짜 힘들어요. 예전에도 몇 차례 은퇴하고 다시 복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나이가 좀 어려서 지금보다는 다시 하기가 조금은 수월했어요. 이번에 다시 할 때도 몇 주일만 고생하고 참고 하면 체력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이랑 안 맞으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이번 기회는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고, 오후에 훈련하고 저녁에 잘 때도 항상 생각하면서 머리맡에 글도 나름대로 써놓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어요."

-20개월만에 복귀해서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땄는데요. 늦었지만 소감 좀 말씀해주세요.
"이번 체전은 국가대표 선발전의 전초전 격이었거든요. 그래서 우승 욕심보다는 어느 정도 컨디션만 파악하러 나왔는데 우승까지 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근데 시합 내용은 진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이래 가지고는 1차 선발전에서 힘들겠다'고 느꼈어요. 결과적으로는 전부 한판으로 이겼지만 의도한대로 잘 풀리지 않아서 기쁘다기 보다는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약이 많이 된 거 같아요."

- 체중감량 하는 게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제가 90kg급에서 81kg급으로 내렸으니까 9kg쯤 감량해야 되잖아요. 사실 9kg 다 뺀 건 아니고, 평소 체중이 86kg 그 정도인데 체중을 하도 많이 빼다보니까 이젠 노하우가 있어요. 40~50일 정도 두고 서서히 아주 오랜 기간 뺐죠.

체중감량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는데 그래도 5년만에 처음 90kg에서 81kg으로 줄여서 상당히 힘들었어요. 사실 81kg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체전 끝나고 적응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좋았던 거 같아요."

- 마사회 플레잉 코치로 계신데요. 코치랑 선수를 병행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으신가요?
"코치 입장에서는 더 잘하고 있다고 봐요. 구두 상으로 이거 해, 저거 해 이런 거보다 제가 선수들을 직접 몸으로 잡아주니까 그런 면에서는 선수들한테 도움이 된다고 봐요.

근데 선수로서는 약간 마이너스가 되지 않나 싶어요. 왜냐면 마사회 선수들이랑 같이 훈련할 때 제가 스케줄 잡고, 제가 운동을 시키고 있거든요. 운동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누가 위에서 채찍질을 좀 해줘야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선발전 때 꼭 입상해서 빨리 선수촌 들어가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 게 저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6월에 리투아니아대회가 있었잖아요. 거기서 우승하셨는데 그게 어떤 대회예요?
"리투아니아대회는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코리아오픈처럼 리투아니아에서 여는 국제대회예요. 참가국은 20개국 좀 넘고, 유럽선수들이 많이 출전했는데 재미났던 건 뭐냐면, 원래는 제가 마사회 선수 3명, 심판 1명, 감독님이랑 같이 코치로 갔어요. 근데 대회 요강을 보니까 지도자는 한 명, 선수는 전원 체재비를 대준다는 거예요. 감독님 말씀이, '지도자는 한 명만 체재비 대주고, 선수는 전부 부담을 해준다고 하잖냐, 윤 코치는 그냥 선수로 뛰어라' 하더라고요.

체중 재보니까 84kg 정도 나가는데 체중 빼기 싫어서 90kg으로 나갔어요. 도복도 안 가져갔는데 출전 신청을 했죠. 1회전에서는 상당히 고전했어요. 숨이 거의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힘들었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이겼어요. 이기면서 숨통이 탁 트인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전부 한판으로 이겼고요. 여기서 우승했던 게 자신감을 갖게 해준 거 같아요."

- 윤동식 선수 앞에는 항상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데요. 그 별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본인 스스로 자신을 '비운의 스타'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거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제발 '비운의 스타'라는 말 좀 안 썼으면 좋겠어요. 아니 비운이면 비운이지 스타는 또 뭐야. 아예 스타라는 말을 뺐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기게끔 '비운의 선수' 이렇게 부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비운의 스타' 그러면 비운이니까 약간 불쌍하긴 하지만 스타는 스타니까 정말 애매하잖아요. 스타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아예 스타라는 말을 안 붙이던가, 아니면 '비운의 선수' 이렇게 하든가.(웃음)"

-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윤동식 선수 이름 앞에 '비운의 스타'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우리나라는 그 선수의 실력보다는 큰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냐 못 땄냐 이런 걸로 선수를 평가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요.
"실력은 있는데 운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는데, 요 근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실력인 것 같아요. 냉정하게 얘기하면, 진짜 금메달을 딴 선수는 실력이 있어서 딴 거예요. 저도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은 많이 땄지만 올림픽에 못 나갔다는 건 어쨌든 실력이 없었다고 봐야겠죠."

- 체급을 많이 바꾸셨잖아요. 78kg에서 81kg, 그 다음에 90kg 그리고 이번에 다시 81kg으로 복귀하셨는데 체급 변경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게 정말 쉽지가 않아요. 주위 사람들한테는 '저 9kg 빼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야, 너 나이 먹어서 왜 그렇게 하냐?' 이런 얘기 들을까봐 일부러 '2~3kg밖에 오버가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근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한테 힘들게 뺐다고 하면 왠지 놀림당하는 것 같고 기분이 좀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말을 안 하는데 사실 노력 많이 했어요. 2001년에 은퇴를 했지만 마음 속으로 올림픽에 대한 생각을 못 버리고, 평소에 체중을 조금씩 빼고, 꾸준히 준비해서 가능했던 거 같고요.

그리고 체급 내리는 건 정말 어려워요. 체중 조절하는 선수들 치고 체급 내려서 성공했다는 선수는 진짜 없어요. 체급을 올리면 다들 성공해요. 전기영 선수, 심권호 선수. 왜냐면 체중 불고, 훈련 좀 하면 파워가 생겨서 힘이 더 나거든요.

81kg에서 90kg으로 올렸을 때는 예전이랑 똑같은 기술을 써도 상대가 더 쉽게 넘어가니까 기분이 좋고 이랬는데 지금은 거꾸로잖아요. 9kg이 빠졌으니까 옛날 힘이 안 나오는 게 당연한데도 하다 보면 '아, 왜 이렇게 안 되지' 이런 생각 들고 진짜 짜증나요. 그래도 지금은 적응이 조금 된 것 같아요."

- 95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 0순위였는데 경기 중에 부상당하셨잖아요. 그 후로 6년 만인 2001년에 세계선수권 나가서 동메달을 따셨는데요.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요.
"93년부터 95년 3월까지 국제대회가 열 서너 개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전기영 선수랑 붙어서 졌던 것 말고는 외국 선수랑 싸워서는 전부 다 이겼어요. 제가 가장 절정이었을 때가 94년도였거든요. 94년에 7개인가 대회에서 1등하고, 95년 초까지 1등하고 그럴 때 '나는 올림픽은 무조건 나가고, 당연히 1등이다. 1등 되면 세리모니를 뭘로 할까' 그랬었어요.

근데 95세계선수권 가기 40일 전에 무릎 인대가 끊어져서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섰어요. 세계선수권은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인데 나가야 되지 않겠냐 해서 수술 안하고 보강훈련만 하고 나갔던 게 화근이 됐죠. 나갔다가 오히려 팔까지 부러지고….

그리고 나서 재활하고, 96년에 유럽오픈대회 나가서 금메달 따면서 어느 정도 재기했는데, 중요한 대회 선발전 때마다 조인철 선수한테 진 거예요. 96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인철이가 나가서 3위를 했고, 97세계선수권 대표 최종선발전 때 연장까지 가서 졌고, 98방콕아시안게임 대표 최종선발전 때 또 연장까지 해서 지고… 조인철 선수하고는 판정 가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이긴 건 다 점수 따서 이겼지. 주위에서 '체급을 올려봐라. 어차피 네가 이긴 시합이었고, 돌아가는 것도 괜찮다. 비겁한 거 아니다' 이런 식으로 격려를 많이 해줬어요.

그래서 한 체급 올렸는데 99세계선수권 대표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유성연 선수한테 10분 연장까지 가서 지고, 2000시드니 올림픽 최종선발전 때 다시 유성연 선수랑 해서 20분 연장 가서 졌어요. 그러니까 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계속 2등만 한 거야.

그리고 나서 '난 이제 질렸다. 다시는 안 나간다' 그랬는데 저희 형이 '결정적일 때 네가 지고, 쓰러지고 그런 게 나중에 징크스가 될 지도 모른다. 그걸 깼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만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결국 2001년에 선발이 돼서 6년만에 뮌헨세계선수권에 나갔어요. 근데 제가 억울한 게 뭐냐면 져도 억울하거나 아깝게 져요. 차라리 한 판으로 깨끗하게 지면 미련이 없을 텐데. 뮌헨 갔을 때도 준결승까지 네 판을 전부 한 판으로 이기고 올라갔고, 1차전에서 크로이토루라고 정말 잘하는 선수도 이기고 올라가서 주위에서 다 금메달 딴다고 했어요.

준결승에서는 프랑스의 드몽 포콩 선수랑 했는데 제가 먼저 절반을 뺏겼어요. 이 선수가 절반 얻고 난 다음 계속 피해 다녀서 제가 경고까지 따고, 반칙패가 들어가야 되는 상황인데 안 들어가서 지고. 그러니까 다시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요. 아예 멀어져 버리면 포기할텐데 문턱에서 왔다갔다 하니까.(웃음)"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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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쇼 선생님께 보림문학선 3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이승민 그림, 선우미정 옮김 / 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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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쇼 선생님께.. 

 어떨 땐 입가에 미소를 담뿍 머금고 있었다. 또 어떨 땐 눈물이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사람이든, 책이든 솔직담백함은 크나큰 축복인 것 같다.

리 보츠가 헨쇼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는, 기름기 쏙 뺀 치킨은 생각나게 한다. 세상에! 치킨이라니. 비유가 적절치 못한 것 같아 스스로 민망스럽지만 그만큼 깔끔하고, 맛있다.

헨쇼는 엄마와 이혼해서 따로 사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다. 물론 아빠가 너무도 보고 싶지만 겉으로 표현하진 않는다. 대신 헨쇼 선생님께 편지를 쓴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서. 억지로 꾸미지 않은, 일부러 멋내지 않은 글이건만, 리 보츠의 편지는 강한 흡인력이 있다.

어린 리 보츠의 안타까운 마음이 읽혀져 당장이라도 위로해주고픈 심정이었다. 깨끗한 손수건으로 리 보츠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상해본다. '만약 리 보츠가 헨쇼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리 보츠는 절망 속에서 소년기를 보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어두운 아이로 자라났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헨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꼬마 독자 리 보츠의 얘기를 잘 들어주셔서 말이다.

헨쇼 선생님께 쓰는 편지 덕분에 리 보츠는,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성장해갔다. 아픔과 슬픔 같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삭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차츰차츰 알아갔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들면서 어린시절 추억은 나쁜 기억마저도 좋은 기억으로 변질된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소중한 추억으로 둔갑하진 못한다. 오히려 나이들수록 상실감만 더 커질 뿐이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기특한 리 보츠. 여리디 여린 마음에 난 생채기가 빨리 아물길 바란다. 원한다면 내가 '호호~' 불어줄 수도 있는데... 리 보츠가 좋아할래나.^^

헨쇼 선생님께 쓴 편지들은, 앞으로 리 보츠가 힘들 때나 외로울 때 많은 위로가 되어줄 거라 믿는다. 굳센 리 보츠는 꼭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현명한 어른이 될 거 같다. 왜? 마음이 옥구슬처럼 단단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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