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볼 팬들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있다. '핸드볼의 전설' 강재원(40)이 16년 만에 국내대회서 선수로 뛴다. 올 가을 전국체전이나 핸드볼 큰잔치가 복귀 무대가 될 듯. "요즘 몸 만들고 있어요. 핸드볼이 많이 침체됐는데, 관중 한 사람이라도 더 와서 구경하면 그걸로 족해요". 오랜만에 핸드볼경기장 관중석이 아줌마, 아저씨 팬들로 넘쳐날 것 같은 예감이 솔솔. 강재원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88년 올림픽 한국 남자핸드볼팀의 은메달 주역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기자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핸드볼을 사랑하고, 아끼는 영원한 핸드볼인이라는 것을.
♦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88년 10월 1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는 한국과 소련의 남자핸드볼 결승전이 열렸다. 한국은 세계최강 소련에 맞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끝내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최종 스코어 25-32로 졌다. 하지만 경기장을 가득 메운 1만 5천 여명의 관중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들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날은 한국 남자구기종목이 올림픽에서 최초로 메달을 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대회 전 대한핸드볼협회가 내세운 최상의 목표는 6강 진출. "주변에서는 '의아한 메달을 땄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저희는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한국은 신체조건으로만 따지면 덩치 큰 외국팀에 '쨉'이 안 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3가지 '히든 카드'가 준비돼 있었다. 우선 빠른 스피드가 있었다. 한국은 날렵한 동작과 기동력이 뒷받침된 다양한 슛으로 상대팀을 괴롭혔다. 주변의 철저한 무관심도 오기를 발동시켰다. "올림픽 100일 남겨놓고도 매스컴은 저희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토요일마다 불암산 뛰기를 했거든요. 양궁, 탁구,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올라갈 땐 카메라가 잡아요. 근데 PD가 밑에서 '남자핸드볼 올라간다' 그러면 카메라를 내려놓는 거에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었다.
무엇보다도 운동량이 엄청나게 많았다. 4년간 16명의 선수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똘똘 뭉쳐서 단내 나는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올림픽 은메달은 결코 '이변'이나 '기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남모르게 흘렸던 땀과 눈물의 결실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죠. 정말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이었어요. 여자팀이 금메달 따서 조금 빛이 바래긴 했지만".^^
♦ 평생 잊을 수 없는 골
"그 슛이 제 생애에서 가장 멋진 골이 아닌가 싶어요". 올림픽 예선 1차전에서 헝가리에 2골 차로 신승한 한국이 2차전에서 맞붙은 팀은 세계2위 동독. 역시 만만히 볼 팀이 아니었다. 이날 따라 슛은 계속 빗나갔고, 한국은 전반전을 9-13으로 뒤진 채 마쳤다.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4년을 기다렸는데..' 전열을 재정비한 후 맞이한 후반전. 끈덕지게 따라붙은 한국은 종료 3분 전 마침내 21-21 동점을 만들었다. 종료 40초를 남겨놓고 상대팀에 페널티드로를 허용해 또다시 22-22 동점.
한국은 마지막 공격에 나섰다. 포스트에 선 박영대의 패스를 받은 강재원이 동독진영 오른쪽을 질주해 들어가다가 번개 같은 스텝슛을 날렸다. 볼은 상대 골키퍼의 겨드랑이 사이를 빠져나갔고, 잠시 후 골그물이 출렁거렸다. 23-22. 남은 시간 3초. 종료 직전 대역전 드라마를 일궈낸 한국 선수들은 얼싸안고 울면서 코트를 나뒹굴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박수를 치고, 목이 쉬도록 응원을 했던 관중들도 눈물을 흘렸다. 최대 고비였던 동독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한국은 B조 1위(4승1패)로 당당히 결승전에 올랐다. 그리고 이 대회 득점왕(49골)이 된 강재원은 그해 세계핸드볼연맹이 선정한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유럽에서는 그 골이 100년에 한 번 나오는 골이라는 얘기도 있었어요".
♦ 멋진 아버지, 강재원
강재원은 89년 10월 스위스리그에 진출했다. 스위스에 도착한 첫날, 취리히 공항은 취재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신문에서는 '왼손잡이' 강재원을 가리켜 '동양에서 온 마라도나'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데뷔 첫 해부터 펄펄 날면서 소속팀(그라스호퍼)에 우승컵을 안겨줬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강재원은 12년간 스위스리그에서 활동하면서 그라스호퍼 2번, 빈터투어 6번 등 총 8차례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고, 96년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는 빈터투어를 4강으로 이끌었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실력도 인정 받았고, 저에 대한 평가도 워낙 좋았거든요". 지금도 유럽에 가서 ‘헤어 강’(강재원을 불렀던 존칭어)이라고 하면 다 안다고.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15살, 11살짜리 아들 둘을 두고 있다는데 혹시 운동선수로 키울 생각은 없는 지 궁금했다. "작은 애가 운동에 소질이 있는데, 제가 너무 힘들게 운동을 해서요. 그래도 본인이 하고 싶어하고, 재질이 있으면 시켜야죠".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제가 대충 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라고 해요". 역시 강재원 답다. 그가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어학. "큰 애는 4개 국어(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에 능통해요. 이번에는 스페인어를 새로 시작했구요. 그러면 나중에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과외도 안 시키고 '수학은 꼴찌를 해도 상관없다'는 강재원은 참 '별난' 아버지다.
♦ '강반장' 강재원
강재원은 귀국 후 스포츠마케팅 및 에이전시 회사 '케이 스포츠'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국내 남자 실업팀이 3팀에 불과한 열악한 상황에서 국내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주선하고, 에이전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것. 현재 외국리그에서 뛰고 있는 조치효, 이석형, 황보성일(이상 스위스), 윤경신(독일), 백원철, 조범연(이상 일본) 등도 그가 직접 다리를 놓았다. "강재원 선수가 터를 잘 닦아놓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하자 "선수들이 잘해서 그렇죠"라며 손사래를 친다. 요즘에는 전문 핸드볼화를 직접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있다. 브랜드명은 'JWK'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전 세계적으로 전문 핸드볼화를 만드는 곳은 아식스, 아디다스 등 두 군데. 더구나 핸드볼 선수가 직접 핸드볼화를 만든 건 강재원이 처음이다. 현재는 25명 정도가 이 신발을 신고 뛰고 있다고. "국내선수들에게 제가 만든 신발을 신겨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강재원은 '핸드볼계에 무슨 문제가 있다 그러면 즉시 달려가는 강반장'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선수권을 2번이나 못 나가는 바람에 유럽에서 한국선수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매년 선수들을 데리고 스위스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단다. 조만간 국내 지도자를 대상으로 세미나(주제: 유럽과 한국 핸드볼의 비교분석을 통한 한국식 트레이닝 방법연구)를 열 계획도 갖고 있다. "1~2년 후 회사 기반이 잡히면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핸드볼 코트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에요". 아시다시피 그의 장인어른은 10년간 대한핸드볼협회장을 역임한 김종하 씨. 기자가 잘못 본 걸까. 순간 그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 속의 김종하 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전에도 선수촌에서 봤는데, 새삼스레 편지를 쓰려니 어색하고 쑥스럽고 그러네.^^ 그래도 올림픽에 먼저 출전했던 선배로서 몇 자 적으마. 요즘 막바지 훈련 하느라 정신이 없을텐데, 너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같은 조에 강호들이 대거 포진해 있지만 절대로 기죽지 말고, 자신감 있는 플레이를 펼치길 바란다. 알다시피 핸드볼은 올림픽에서 항상 이변이 있었잖니. 우리가 88년 올림픽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경기에 임한다면 충분히 좋은 성적 낼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이건 선배로서 명령일 수도 있는데, 여자선수들은 꼭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 지금 한국 여자핸드볼이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섰잖니. 주변에서 메달 딸 때만 '반짝관심'을 보여주는 게 아쉽긴 하지만 너희들의 임무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라는 거 알지. 메달을 따면 국내 핸드볼 활성화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후배들아, 화이팅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