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태릉선수촌 내 탁구장을 찾았다. D-60. 올림픽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요즘은 강훈련의 연속이다. 선수들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일까. 마치 시합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공이 왔다 갔다 할 때 나는 '핑퐁 핑퐁' 소리와 야무진 파이팅! 소리는 듀엣 가수의 환상적인 화음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한동안 훈련하는 선수들을 넋 빠진 얼굴로 쳐다봤다. 보고만 있어도 왠지 흐뭇했다. '밝고 씩씩한 청년' 유승민(23) 선수를 만났다.

♦ '탁구신동'에서 '간판스타'로

유승민을 실제로 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쭈욱 봐 와서 그렇겠지. 게다가 외모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학생 같은 마스크도 여전하고, 스포츠머리도 참 낯이 익다. 한 가지 확실하게 변한 건 '실력'. 미완의 대기였던 유승민은 어느덧 한국 남자탁구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탁구신동'으로 불리며 가능성을 인정 받았던 어린 선수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으랴.

유승민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게 97년(중학교 3학년)이니 벌써 국가대표 8년 차 고참이 됐다. 국가대표 경력으로 따지면 이철승, 오상은 다음 차례. 하지만 나이는 남자선수 중에서 가장 어리다. 혹시 나이 어린 고참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을까. "나이 많은 형들이랑 오래 생활하다 보니까 편해요. 팀워크도 좋은 것 같고요". 사실 기자도 금세 눈치챘다. 10분 가량의 쉬는 시간 '남자들의 수다'는 접시를 깨고도 남을 정도였다. 집에서 '무녀독남'인 유승민에게 동료들은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일 듯. 그렇다면 어린 나이부터 주목 받아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은 뭐가 있을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셔서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반면 외국선수들은 저를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서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나와요. 특히 중국 선수들은 제 경기테이프를 수십 개씩 갖고 있더라고요".

♦ 좋은 복식 파트너, 이철승

유승민은 이철승과 5년째 호흡을 맞춰오고 있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도 여러 번 일궈냈고,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음부터 '찰떡호흡'을 자랑했던 건 아니다. "대선배랑 하니까 제가 무지하게 긴장을 많이 했죠. 근데 많이 하다 보니까 점점 나아지더라고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10년. 거기다 소속팀(삼성생명)에서는 이철승(플레잉 코치)과 코치-선수 관계이니 보니 오히려 부담 안 가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래도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하지 않냐"고 했더니 딱 한 마디 한다. "서로 잘 해야죠".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이철승과는 5년간 태릉선수촌에서 한 방을 썼다. 그런데 몇 개월 전 김택수가 코치로 부임하면서 룸메이트가 임재현(상비군) 선수로 바뀌었다고. "후배랑 쓰니까 좋냐"고 물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다. "훨씬 편해요. 처음 (이)철승이 형이랑 방 같이 썼을 땐 제가 고등학생이었거든요. 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5년 만에 해방된 유승민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형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지 몰라요. 제 맘 아시죠?".

♦ 시드니 올림픽 VS 부산 아시안게임

유승민은 시드니 올림픽을 '최악', 부산 아시안게임을 '최고'의 대회로 꼽는다. 최연소(18세) 출전기록을 세우며 참가한 시드니 올림픽. 하지만 메달 꿈은 속절없이 날아갔다. 단식 1회전 탈락, 남자복식 4위. 복식경기 앞두고 유독 긴장을 많이 했다. '나 때문에 게임을 망치면 안 되는데..' 부담감에 잠을 못 잤다. 컨디션도 영 꽝이었다. "제 기량의 70%도 채 발휘하지 못했어요. (이)철승이 형 혼자 다 하려다 보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요". 특히 복식은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다고. "4강까지 올라가서 4강에서 중국 조(왕리친-얀센)에 지고, 3,4위전에서 프랑스 조(장 필립 가티엥-패트릭 쉴라)에 또 졌어요".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지는 병역면제 혜택도 날아갔다. "억울하고 분해서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요".

하지만 기회는 또 찾아왔다. 2년 후 부산아시안게임. 유승민은 남자복식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전 상대는 김택수-오상은 조. 같은 팀이지만 봐주고 이런 거 없었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했다. 갈비를 구워도 될 정도로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결국 이철승-유승민 조가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이겼다.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금메달과 병역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시드니 악몽'도 훌훌 날려 버렸다. '까까머리' 유승민은 이철승의 품에 안겨 어린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그때 '적'으로 만났던 김택수는 이제 대표팀 코치. "혹시 갈구지는 않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 "하하. 장난으로 그러실 때는 있어요. 근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같이 선수생활을 해서 편하고, 대화도 많이 하고 좋아요". 그리고 슬쩍 한 마디 덧붙인다. "훈련을 너무 힘들게 시켜요".

♦ 올림픽, 기대하세요

유승민의 기량은 한창 물이 올라 있는 상태. 이집트오픈 단식에서 정상에 오르며 프로투어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열린 코리아오픈, 싱가포르오픈에서도 연거푸 4강에 진입했다. "이집트오픈 우승으로 자신감을 많이 얻었어요. 자신감이 붙은 상태에서 과감하게 플레이 하다 보니까 잘 풀린 것 같아요".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될 장벽이 있다. 바로 세계 탁구를 휘어잡고 있는 중국 선수들. "실력적으로 조금 밀리는 건 사실인데, 올림픽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남은 기간동안 철저히 준비를 해야죠". 어차피 정상급 선수들의 실력은 '습자지 한 장 차이'. 게다가 탁구는 워낙 변수가 많은 종목이라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물론 목표는 금메달이다. 유럽세가 약한 복식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단식도 시드배정이 유리해 기대해 볼 만하다. 세계랭킹을 보면 유승민이 현재 4위, 중국선수들(마린, 왕리친, 왕하오)이 1,2,3위라서 초반 승부를 피해갈 수 있다. 이번 달 브라질오픈, US오픈에서 마지막 담금질을 하게 될 유승민의 마음은 벌써 아테네로 가 있는 듯 했다. 장난꾸러기 막내동생같은 유승민, 화이팅!

♦ 프로필

생년월일: 1982년 8월 5일 신장/몸무게: 177cm, 68kg 소속: 삼성생명 국가대표 경력: 97년(중학교 3학년)부터 현재까지 주요경력: 2001년 스웨덴오픈 단식 준우승 2002년 중국오픈 복식 우승 2002년 브라질오픈 단식 준우승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남자복식 금메달 혼합복식, 단체전 은메달 2004년 크로아티아오픈 복식 우승 2004년 이집트오픈 단식 우승 별명: 옥동자 취미: 음악감상, 컴퓨터게임 종교: 기독교 가족관계: 부모님 여자친구: 있음(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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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팬 여러분, 안녕하세요. 장대높이뛰기의 세르게이 부브카(우크라이나)입니다. 기억나시죠? 저에게 한국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에요. 아시다시피 서울에서 열렸던 88년 올림픽에서 저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을 땄거든요. 그때 잠실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저한테는 무척 큰 힘이 됐답니다. 어느덧 16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함성이 귓가에 울려퍼지는 것 같네요.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 모두 파이팅!

제 별명이 '인간새'라는 건 다 아시죠? '인간새'라는 별명이 붙은 건 85년이었어요. 그때 최초로 '마의 6m 벽'을 뛰어넘었거든요. 이로부터 6년 뒤인 91년 세계실내대회에서 6m10을 돌파했구요. 제가 신기록 행진을 시작한 것은 84년부터 였어요. 그해 1월 빌니우스국제실내육상대회에서 5m81을 넘었고, 같은 해 5월 체코국제육상대회에서 5m85로 첫 실외 세계기록을 세웠죠. 84년 한 해 동안 무려 7개의 세계기록(실내 3회, 실외 4회)을 작성했답니다. 덕분에 '신기록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더군요. 도대체 세계신기록을 몇 번이나 세웠냐구요. 정확히 35번입니다. 실외 17번, 실내 18번. 제가 94년 7월 우크라이나 세스트리에대회에서 수립했던 세계기록(6m14)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죠. 요즘 세계정상급대회에서 승부는 대략 5m80~90대에서 갈리고 있어요. 올 시즌 최고기록은 6m구요. 아마도 당분간 깨지기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세계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포상금을 받았죠. 그래서 제가 한 번에 1cm씩만 올리는 걸 못마땅해 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하지만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순간, 그 짜릿한 쾌감은 아마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거에요.

'올림픽보다 세계선수권이 더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하죠. 그러고 보면 저는 참 행운아인 것 같습니다. 남들은 한 번 따기도 힘든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무려 6개나 땄으니까요. 20살이었던 83년 제1회 세계선수권에서 5m70을 뛰어넘어 우승한 게 시발점이었죠. 그리고 나서 87, 91, 93, 95, 97년 대회까지 6회 연속 패권을 거머쥐었구요. 가장 아슬아슬했던 대회는 95년 예테보리대회에요. 계속 막심 티라소프에게 뒤지다가 마지막 시기에서 역전시켰거든요. 99년 대회는 아킬레스건 수술 후유증 때문에 나가지 못했지만 후회는 안 해요. 아마도 세계선수권 6연패는 전 종목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싶네요.

세계신기록 35차례 수립, 세계선수권 6연패. 저의 선수시절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올림픽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에 4차례 출전했지만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유일하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84년 L.A올림픽 땐 구소련의 보이콧으로 출전조차 못했고, 92년에는 컨디션 난조로 탈락했었지요, 96년에는 부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경기 직전 기권을 했구요. 그리고 은퇴무대로 삼았던 시드니 올림픽에선 예선에서 무리하게 5m70에 도전했다가 세 차례 모두 실패해서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죠. 한 가지 위안을 삼았던 건, 96년 대회에서 IOC 선수회가 자체적으로 인기투표를 실시했는데, 제가 가장 인기있는 선수로 뽑혔지 뭡니까.^^

2001년 2월 5일, 이날은 제가 선수로서 마지막 시합을 치른 날입니다. 저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제 이름을 딴 장대높이뛰기대회가 열렸는데, 경기 끝나고 저의 은퇴식이 거행됐지요. 저의 은퇴사 낭독이 끝나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쳐주었답니다. 아, 쿠츠마 대통령의 축사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세계는 부브카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알게 됐다'고 하셨죠.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정들었던 필드를 떠나야 할 때가 왔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참, 도네츠크에 오시면 제 동상 보러 오세요.

저는 운동선수로서 후회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메달을 많이 따고, 세계기록을 많이 세웠으니까 당연하지 않냐구요. 물론, 틀린 얘기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운동을 통해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싶어요. 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냐구요. 따뜻한 인간미와 깨끗한 매너를 갖춘 선수요.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존경 받지 못하는 선수도 있잖아요. 반면 실력은 좀 떨어져도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선수도 있구요. 저의 희망사항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요즘에는 무척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IOC 선수위원과 집행위원을 동시에 맡고 있거든요. 2000년 9월 IOC 선수위원 선거에서 제가 당당히 1등을 차지했지요. 저 말고도 얀 젤레즈니(투창), 알렉산더 포포프(수영) 등 총 10명이 신규 위원으로 뽑혔구요. 그전까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IOC 위원에 뽑힌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선수 자격이 아닌 스포츠 행정직 자격으로 선임됐었지요. 한 마디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죠. 앞으로 선수로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올림픽 발전에 공헌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엔 아테네 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뛰었죠. 성화봉송 세계 릴레이 행사 전에, 그리스 한 바퀴를 일주했거든요. 그때 저도 열심히 달렸죠. 가슴 벅찼습니다.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 성화봉송 주자로 뛴 다는 사실이. 올림픽은 스타탄생의 무대이기도 하죠. 어떤 선수가 '뜨는 별'이 되고, 어떤 선수가 '지는 별'이 될 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과연 제 기록(6m14)을 깨는 선수가 나올 지도요. 참, 요즘엔 여자장대높이뛰기가 더 재밌는 거 아시죠. 페오파노바-이신바예바-드래길라, 3명의 선수 중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지 미리 점춰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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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라면 누구나 승리를 갈구하고 원한다. 승리의 순간,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과 흥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게다. 그래서 선수들은 남몰래 더 많은 땀을 쏟고, 남보다 더 많이 뛴다. 최후에 웃는 자가 되기 위해서. 누구나 승리를 꿈꾸지만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눈물이 교차한다. 이것은 스포츠 현장의 철칙이다. 반면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이것은 스포츠 세계의 진리다.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체조는 이런 진리를 가장 잘 보여준 경기였다. 남자체조 단체전이 구소련의 독무대였던 것에 반해 여자체조 단체전은 구소련과 루마니아가 팽팽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결과는 구소련의 판정승. 아무래도 실리바스 혼자서 슈슈노바와 보긴스카야의 '협공'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경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개인종합에서 반드시 설욕해주마' 양배추인형을 닮은 소녀, 실리바스는 단체전에서 은메달에 그친 아쉬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1988년 9월 23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여자체조 개인종합 결승전이 열렸다. 1만 5천 여명의 관중들은 숨죽이며 체조요정들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지켜봤다. 안타까운 탄성과 끊임없는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 세계인의 시선은 슈슈노바와 실리바스에게 집중됐다.

첫 번째 종목은 이단평행봉. 실리바스보다 예선전 예비점수가 0.05점 앞섰던 슈슈노바는 9.9에 그쳤다. 반면 실리바스는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치며 10점 만점을 받았다. 오히려 실리바스가 0.05점 차 앞서 나갔다. 두 번째 종목 마루운동에서는 두 선수 모두 만점을 받아 순위에는 변동이 없었다. 슈슈노바는 평균대에서 실리바스와의 격차를 0.025점 차로 좁혔고, 결국 마지막 뜀틀에서 승부가 갈리게 됐다.

실리바스가 먼저 뜀틀을 뛰어 넘었다. 공중자세와 착지 모두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자신도 만족스러운 듯 관중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점수판이 공개되자 그녀의 표정은 다소 어두워졌다. 9.95. 예상 외로 낮은 점수였다. 더구나 뜀틀은 슈슈노바의 주종목이 아닌가. 실리바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슈슈노바의 연기를 지켜봤다. 침착하게 경기를 마친 슈슈노바의 점수는 10점 만점. 그 순간 패자(실리바스)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글썽 거렸고, 승자(슈슈노바)는 동료들과 얼싸안으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실리바스는 단체전에 이어 또 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종목별 결승이 아직 남아 있었다. 140cm, 32kg의 가냘픈 소녀, 실리바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멋진 설욕전을 펼쳤다. 25일 종목별 결승전에서 실리바스는 무려 3개(이단평행봉, 마루운동, 평균대)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단평행봉에서 윗봉과 아랫봉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 작은 새를 보는 듯 했다. 마루운동에서는 주제곡 '사랑의 환희'에 맞춰 경쾌하고 발랄한 모습을 선보였고, 평균대에서는 그녀의 우아하고 가냘픈 여성미가 단연 빛을 발했다. 반면 슈슈노바는 게임을 망쳤다. 자신의 주종목인 뜀틀에서는 무릎으로 착지하고, 마루운동에서는 엉덩방아를 찧는 등 '최악의 날'을 보냈다.

힘있는 연기를 펼친 슈슈노바는 개인종합과 단체전을 모두 휩쓸었지만 막판 부진 탓에 완전히 이미지를 구겼다. 반대로 섬세한 연기를 선보인 실리바스는 0.025점 차로 슈슈노바에게 개인종합 금메달을 빼앗겼지만 종목별 결승에서 3관왕에 오르며 마지막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영원한 패자도 없고 영원한 승자도 없는 스포츠 세계. 그래서 스포츠는 아름답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에서만큼은 두 선수 모두 승자였다. 실리바스가 8번, 슈슈노바가 7번 등 수 차례 환상적인 만점연기를 선보였으니까. 그 전까지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신기술을 완성시켰으니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보여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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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팬들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있다. '핸드볼의 전설' 강재원(40)이 16년 만에 국내대회서 선수로 뛴다. 올 가을 전국체전이나 핸드볼 큰잔치가 복귀 무대가 될 듯. "요즘 몸 만들고 있어요. 핸드볼이 많이 침체됐는데, 관중 한 사람이라도 더 와서 구경하면 그걸로 족해요". 오랜만에 핸드볼경기장 관중석이 아줌마, 아저씨 팬들로 넘쳐날 것 같은 예감이 솔솔. 강재원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88년 올림픽 한국 남자핸드볼팀의 은메달 주역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기자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핸드볼을 사랑하고, 아끼는 영원한 핸드볼인이라는 것을.

♦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88년 10월 1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는 한국과 소련의 남자핸드볼 결승전이 열렸다. 한국은 세계최강 소련에 맞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끝내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최종 스코어 25-32로 졌다. 하지만 경기장을 가득 메운 1만 5천 여명의 관중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들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날은 한국 남자구기종목이 올림픽에서 최초로 메달을 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대회 전 대한핸드볼협회가 내세운 최상의 목표는 6강 진출. "주변에서는 '의아한 메달을 땄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저희는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한국은 신체조건으로만 따지면 덩치 큰 외국팀에 '쨉'이 안 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3가지 '히든 카드'가 준비돼 있었다. 우선 빠른 스피드가 있었다. 한국은 날렵한 동작과 기동력이 뒷받침된 다양한 슛으로 상대팀을 괴롭혔다. 주변의 철저한 무관심도 오기를 발동시켰다. "올림픽 100일 남겨놓고도 매스컴은 저희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토요일마다 불암산 뛰기를 했거든요. 양궁, 탁구,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올라갈 땐 카메라가 잡아요. 근데 PD가 밑에서 '남자핸드볼 올라간다' 그러면 카메라를 내려놓는 거에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었다.

무엇보다도 운동량이 엄청나게 많았다. 4년간 16명의 선수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똘똘 뭉쳐서 단내 나는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올림픽 은메달은 결코 '이변'이나 '기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남모르게 흘렸던 땀과 눈물의 결실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죠. 정말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이었어요. 여자팀이 금메달 따서 조금 빛이 바래긴 했지만".^^

♦ 평생 잊을 수 없는 골

"그 슛이 제 생애에서 가장 멋진 골이 아닌가 싶어요". 올림픽 예선 1차전에서 헝가리에 2골 차로 신승한 한국이 2차전에서 맞붙은 팀은 세계2위 동독. 역시 만만히 볼 팀이 아니었다. 이날 따라 슛은 계속 빗나갔고, 한국은 전반전을 9-13으로 뒤진 채 마쳤다.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4년을 기다렸는데..' 전열을 재정비한 후 맞이한 후반전. 끈덕지게 따라붙은 한국은 종료 3분 전 마침내 21-21 동점을 만들었다. 종료 40초를 남겨놓고 상대팀에 페널티드로를 허용해 또다시 22-22 동점.

한국은 마지막 공격에 나섰다. 포스트에 선 박영대의 패스를 받은 강재원이 동독진영 오른쪽을 질주해 들어가다가 번개 같은 스텝슛을 날렸다. 볼은 상대 골키퍼의 겨드랑이 사이를 빠져나갔고, 잠시 후 골그물이 출렁거렸다. 23-22. 남은 시간 3초. 종료 직전 대역전 드라마를 일궈낸 한국 선수들은 얼싸안고 울면서 코트를 나뒹굴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박수를 치고, 목이 쉬도록 응원을 했던 관중들도 눈물을 흘렸다. 최대 고비였던 동독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한국은 B조 1위(4승1패)로 당당히 결승전에 올랐다. 그리고 이 대회 득점왕(49골)이 된 강재원은 그해 세계핸드볼연맹이 선정한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유럽에서는 그 골이 100년에 한 번 나오는 골이라는 얘기도 있었어요".

♦ 멋진 아버지, 강재원

강재원은 89년 10월 스위스리그에 진출했다. 스위스에 도착한 첫날, 취리히 공항은 취재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신문에서는 '왼손잡이' 강재원을 가리켜 '동양에서 온 마라도나'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데뷔 첫 해부터 펄펄 날면서 소속팀(그라스호퍼)에 우승컵을 안겨줬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강재원은 12년간 스위스리그에서 활동하면서 그라스호퍼 2번, 빈터투어 6번 등 총 8차례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고, 96년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는 빈터투어를 4강으로 이끌었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실력도 인정 받았고, 저에 대한 평가도 워낙 좋았거든요". 지금도 유럽에 가서 ‘헤어 강’(강재원을 불렀던 존칭어)이라고 하면 다 안다고.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15살, 11살짜리 아들 둘을 두고 있다는데 혹시 운동선수로 키울 생각은 없는 지 궁금했다. "작은 애가 운동에 소질이 있는데, 제가 너무 힘들게 운동을 해서요. 그래도 본인이 하고 싶어하고, 재질이 있으면 시켜야죠".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제가 대충 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라고 해요". 역시 강재원 답다. 그가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어학. "큰 애는 4개 국어(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에 능통해요. 이번에는 스페인어를 새로 시작했구요. 그러면 나중에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과외도 안 시키고 '수학은 꼴찌를 해도 상관없다'는 강재원은 참 '별난' 아버지다.

♦ '강반장' 강재원

강재원은 귀국 후 스포츠마케팅 및 에이전시 회사 '케이 스포츠'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국내 남자 실업팀이 3팀에 불과한 열악한 상황에서 국내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주선하고, 에이전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것. 현재 외국리그에서 뛰고 있는 조치효, 이석형, 황보성일(이상 스위스), 윤경신(독일), 백원철, 조범연(이상 일본) 등도 그가 직접 다리를 놓았다. "강재원 선수가 터를 잘 닦아놓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하자 "선수들이 잘해서 그렇죠"라며 손사래를 친다. 요즘에는 전문 핸드볼화를 직접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있다. 브랜드명은 'JWK'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전 세계적으로 전문 핸드볼화를 만드는 곳은 아식스, 아디다스 등 두 군데. 더구나 핸드볼 선수가 직접 핸드볼화를 만든 건 강재원이 처음이다. 현재는 25명 정도가 이 신발을 신고 뛰고 있다고. "국내선수들에게 제가 만든 신발을 신겨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강재원은 '핸드볼계에 무슨 문제가 있다 그러면 즉시 달려가는 강반장'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선수권을 2번이나 못 나가는 바람에 유럽에서 한국선수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매년 선수들을 데리고 스위스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단다. 조만간 국내 지도자를 대상으로 세미나(주제: 유럽과 한국 핸드볼의 비교분석을 통한 한국식 트레이닝 방법연구)를 열 계획도 갖고 있다. "1~2년 후 회사 기반이 잡히면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핸드볼 코트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에요". 아시다시피 그의 장인어른은 10년간 대한핸드볼협회장을 역임한 김종하 씨. 기자가 잘못 본 걸까. 순간 그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 속의 김종하 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전에도 선수촌에서 봤는데, 새삼스레 편지를 쓰려니 어색하고 쑥스럽고 그러네.^^ 그래도 올림픽에 먼저 출전했던 선배로서 몇 자 적으마. 요즘 막바지 훈련 하느라 정신이 없을텐데, 너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같은 조에 강호들이 대거 포진해 있지만 절대로 기죽지 말고, 자신감 있는 플레이를 펼치길 바란다. 알다시피 핸드볼은 올림픽에서 항상 이변이 있었잖니. 우리가 88년 올림픽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경기에 임한다면 충분히 좋은 성적 낼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이건 선배로서 명령일 수도 있는데, 여자선수들은 꼭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 지금 한국 여자핸드볼이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섰잖니. 주변에서 메달 딸 때만 '반짝관심'을 보여주는 게 아쉽긴 하지만 너희들의 임무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라는 거 알지. 메달을 따면 국내 핸드볼 활성화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후배들아, 화이팅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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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쾌한 만남이었다. 강초현 선수, 총 잘 쏘고, 이쁘고, 똘망똘망 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 만나보니 마음 씀씀이는 비단결이요, 생각하는 건 수심 3,454m 바다다. 거기다 은근슬쩍 곁들이는 유머에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비가 한바탕 퍼붓고 난 후라서 그런지 나무냄새, 흙 냄새가 너무도 싱그러웠다. 맑게 갠 하늘보다 더 맑은 강초현(23)을 태릉사격장에서 만났다.

♦ 추억의 시드니올림픽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떨리고, 긴장돼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여자 공기소총 은메달리스트 강초현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경기 끝나고 뒤를 딱 돌아봤는데, 이은철 선수가 2등이라고 말을 해줬어요". 계속 1등을 달리던 강초현은 9번째 발에서 동점을 허용했고, 마지막 10번째 발에서 낸시 존슨(미국)에게 역전을 당했었다. "아까웠죠.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은메달도 굉장한 거 잖아요".

강초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팀의 대회 1호 메달리스트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시상대에서 보여준 해맑은 미소 때문이었다. "올림픽에서 2등 하는 게 어디 쉽나요. 저는 은메달 따고도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고개 푹 숙이고 그런 게 싫었어요". 시상대에 서서 태극기가 올라가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고, 밑에서부터 뭔가가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단다. "그러니 금메달 딴 선수들은 어떻겠어요. 저 같아도 울 것 같아요". 게다가 '재미 만빵'이었다고. "말도 안 통하는데 옆 선수들이랑 막 말하구요". 뭐라고 말하냐고 물었더니 "Congratulations! 거기까지 하고, 그 다음부턴 한국말로 하죠"라며 장난스레 웃는다.

♦ 재밌고 신기해요

"버스도 못 타고, 혼자서 못 다녔죠". 올림픽 후 '태극마크 초년생' 강초현은 속된 말로 '떴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사람처럼. 강초현 태풍은 시드니에 있을 때부터 거세게 불어 닥쳤다. "기자분들 피해서 도망다녔어요. 방 안에 갖혀 있구요". 주변에서 너무 귀찮게 해서 폐막식도 못보고 서둘러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근데 한국 오니까 더 심했죠".(웃음) 마냥 신기하고 놀라웠다. 유명해지길 바랐던 것도 아니고, 그저 열심히 총을 쐈을 뿐인데 한 두 달 새 유명인사가 된 자신이. "저 자신은 변하지 않았는데, 주변이 달라졌죠". 좋고 나쁜 걸 떠나 재밌었단다. "저는 아직도 제가 신기해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주시니 너무 고맙죠. 그게 언제적 일인데..."(웃음)

♦ 사심을 버려라

가만 보면 고등학생들이 총을 잘 쏘는 것 같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기소총 금메달리스트 여갑순도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강초현도 시드니올림픽 때 고교생 사수였다. 요즘 '잘 나가는' 천민호도 그렇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겁이 없어서 그럴 거에요. 저도 뭘 몰랐고, 사심이 없었죠". 메달에 대한 욕심은커녕 출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좋았단다. "마음을 비우는 게 중요한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지금은 사심 많죠".(웃음)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순위가 뒤바뀌는 공기소총. 보는 사람도 조마조마한데 직접 쏘는 사람은 어떨까. "점수에 신경 안 쓰려고 해요. 점수를 의식하다 보면 더 안 맞거든요".

사격을 잘하기 위한 뽀인뜨는 집중력이라고. "저는 보통 때는 집중력이 없어요. 사격 들어가면 노력하는 편이죠. 그래서 '놀 땐 놀고 할 땐 한다'는 소리를 들어요". 그래도 실수로 잘 못 쏘면 평상심을 잃어버릴 때도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럴 땐 또 방법이 있단다. "만점을 쏘든 9점을 쏘는 내색하지 않는 거에요. 본인이 당황하고, 우왕좌왕하면 게임에 말릴 수가 있거든요". 사실 올림픽 때 무지하게 떨렸단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강초현이 떨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더니 바로 돌아오는 답변. "보는 사람들은 제가 진짜 침착했대요. 표정 동요 하나 없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웃음) 하지만 사격이 '멘탈스포츠'라서 좋은 점도 있다. "저를 보셔도 알겠지만 신체적인 조건은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더 좋아요. 오래오래 할 수 있잖아요".(웃음)

♦ 제 꿈은 강 쌤~~~~

"맨날 학교 가고 싶죠". 강초현은 현재 고려대 체육교육과 02학번 학생이다. 학교생활 재밌냐고 물었더니 곧바로 '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친구들이랑 같이 운동하면서 땀 흘리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테니스, 배드민턴, 농구, 수영. 종목도 안 가린다. 뽀인뜨는 즐기는 것. "저는 수영장도 혼자서 잘가요. 근데 남이 시켜서 하는 건 싫어요". 고등학교 때 학창생활을 제대로 못 누린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대학 때는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싶다고. 그렇다고 거창한 건 절대 아니다. "쇼핑할 때 '어디 가면 더 싸게 살 수 있을까' 연구하고, 다리품 팔면서 돌아다니는 게 너무 좋아요. 중요한 건 과가 과인만큼 남자들이 많다는 것 아니겠어요".(웃음)

인생의 소박한 즐거움을 아는 강초현의 꿈은 체육선생님. 마음씨 좋은 선생님이 될 거 같다고 하자 "팰 땐 막 팰 거 같아요. 얼굴과 매치 안 되게"라며 웃는다. 체육시간에는 엄하지만 보통 때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단다. '내년에 있을 교생실습이 기대된다'는 강초현은 참 행복한 사람!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 계속 지켜봐주세요

놀라지마시라. 마냥 앳되어 보이는 '깜찍이' 강초현이 팀(갤러리아 사격단) 내에선 맏언니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마음가짐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전에는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놀기 좋아하고, 생각도 끌려가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무조건 후배들한테 잘해주고, 모범을 보여야 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선후배 관계라기 보단 가족처럼, 친구처럼 편한 사이. 그래도 선배로서 '싫은 소리' 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제가 모질 지 못해서 그런 말을 잘 못 해요. 제가 말하고도 제가 더 미안해 하고, 더 신경 쓰고 그래요".

팀 내에서 '깡언니'로 통한다는 강초현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아테네 올림픽 선발전은 탈락했지만 아직 젊고, 도전할 수 있는 열정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거구요. 그러니까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인터뷰를 마친 후 사대로 총총히 걸어가는 강초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자는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기특한 것'.^^ 참, 아테네올림픽에서 멋진 해설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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