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팬 여러분, 안녕하세요. 장대높이뛰기의 세르게이 부브카(우크라이나)입니다. 기억나시죠? 저에게 한국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에요. 아시다시피 서울에서 열렸던 88년 올림픽에서 저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을 땄거든요. 그때 잠실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저한테는 무척 큰 힘이 됐답니다. 어느덧 16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함성이 귓가에 울려퍼지는 것 같네요.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 모두 파이팅!
제 별명이 '인간새'라는 건 다 아시죠? '인간새'라는 별명이 붙은 건 85년이었어요. 그때 최초로 '마의 6m 벽'을 뛰어넘었거든요. 이로부터 6년 뒤인 91년 세계실내대회에서 6m10을 돌파했구요. 제가 신기록 행진을 시작한 것은 84년부터 였어요. 그해 1월 빌니우스국제실내육상대회에서 5m81을 넘었고, 같은 해 5월 체코국제육상대회에서 5m85로 첫 실외 세계기록을 세웠죠. 84년 한 해 동안 무려 7개의 세계기록(실내 3회, 실외 4회)을 작성했답니다. 덕분에 '신기록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더군요. 도대체 세계신기록을 몇 번이나 세웠냐구요. 정확히 35번입니다. 실외 17번, 실내 18번. 제가 94년 7월 우크라이나 세스트리에대회에서 수립했던 세계기록(6m14)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죠. 요즘 세계정상급대회에서 승부는 대략 5m80~90대에서 갈리고 있어요. 올 시즌 최고기록은 6m구요. 아마도 당분간 깨지기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세계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포상금을 받았죠. 그래서 제가 한 번에 1cm씩만 올리는 걸 못마땅해 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하지만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순간, 그 짜릿한 쾌감은 아마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거에요.
'올림픽보다 세계선수권이 더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하죠. 그러고 보면 저는 참 행운아인 것 같습니다. 남들은 한 번 따기도 힘든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무려 6개나 땄으니까요. 20살이었던 83년 제1회 세계선수권에서 5m70을 뛰어넘어 우승한 게 시발점이었죠. 그리고 나서 87, 91, 93, 95, 97년 대회까지 6회 연속 패권을 거머쥐었구요. 가장 아슬아슬했던 대회는 95년 예테보리대회에요. 계속 막심 티라소프에게 뒤지다가 마지막 시기에서 역전시켰거든요. 99년 대회는 아킬레스건 수술 후유증 때문에 나가지 못했지만 후회는 안 해요. 아마도 세계선수권 6연패는 전 종목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싶네요.
세계신기록 35차례 수립, 세계선수권 6연패. 저의 선수시절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올림픽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에 4차례 출전했지만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유일하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84년 L.A올림픽 땐 구소련의 보이콧으로 출전조차 못했고, 92년에는 컨디션 난조로 탈락했었지요, 96년에는 부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경기 직전 기권을 했구요. 그리고 은퇴무대로 삼았던 시드니 올림픽에선 예선에서 무리하게 5m70에 도전했다가 세 차례 모두 실패해서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죠. 한 가지 위안을 삼았던 건, 96년 대회에서 IOC 선수회가 자체적으로 인기투표를 실시했는데, 제가 가장 인기있는 선수로 뽑혔지 뭡니까.^^
2001년 2월 5일, 이날은 제가 선수로서 마지막 시합을 치른 날입니다. 저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제 이름을 딴 장대높이뛰기대회가 열렸는데, 경기 끝나고 저의 은퇴식이 거행됐지요. 저의 은퇴사 낭독이 끝나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쳐주었답니다. 아, 쿠츠마 대통령의 축사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세계는 부브카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알게 됐다'고 하셨죠.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정들었던 필드를 떠나야 할 때가 왔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참, 도네츠크에 오시면 제 동상 보러 오세요.
저는 운동선수로서 후회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메달을 많이 따고, 세계기록을 많이 세웠으니까 당연하지 않냐구요. 물론, 틀린 얘기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운동을 통해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싶어요. 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냐구요. 따뜻한 인간미와 깨끗한 매너를 갖춘 선수요.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존경 받지 못하는 선수도 있잖아요. 반면 실력은 좀 떨어져도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선수도 있구요. 저의 희망사항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요즘에는 무척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IOC 선수위원과 집행위원을 동시에 맡고 있거든요. 2000년 9월 IOC 선수위원 선거에서 제가 당당히 1등을 차지했지요. 저 말고도 얀 젤레즈니(투창), 알렉산더 포포프(수영) 등 총 10명이 신규 위원으로 뽑혔구요. 그전까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IOC 위원에 뽑힌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선수 자격이 아닌 스포츠 행정직 자격으로 선임됐었지요. 한 마디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죠. 앞으로 선수로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올림픽 발전에 공헌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엔 아테네 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뛰었죠. 성화봉송 세계 릴레이 행사 전에, 그리스 한 바퀴를 일주했거든요. 그때 저도 열심히 달렸죠. 가슴 벅찼습니다.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 성화봉송 주자로 뛴 다는 사실이. 올림픽은 스타탄생의 무대이기도 하죠. 어떤 선수가 '뜨는 별'이 되고, 어떤 선수가 '지는 별'이 될 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과연 제 기록(6m14)을 깨는 선수가 나올 지도요. 참, 요즘엔 여자장대높이뛰기가 더 재밌는 거 아시죠. 페오파노바-이신바예바-드래길라, 3명의 선수 중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지 미리 점춰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