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라면 누구나 승리를 갈구하고 원한다. 승리의 순간,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과 흥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게다. 그래서 선수들은 남몰래 더 많은 땀을 쏟고, 남보다 더 많이 뛴다. 최후에 웃는 자가 되기 위해서. 누구나 승리를 꿈꾸지만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눈물이 교차한다. 이것은 스포츠 현장의 철칙이다. 반면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이것은 스포츠 세계의 진리다.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체조는 이런 진리를 가장 잘 보여준 경기였다. 남자체조 단체전이 구소련의 독무대였던 것에 반해 여자체조 단체전은 구소련과 루마니아가 팽팽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결과는 구소련의 판정승. 아무래도 실리바스 혼자서 슈슈노바와 보긴스카야의 '협공'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경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개인종합에서 반드시 설욕해주마' 양배추인형을 닮은 소녀, 실리바스는 단체전에서 은메달에 그친 아쉬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1988년 9월 23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여자체조 개인종합 결승전이 열렸다. 1만 5천 여명의 관중들은 숨죽이며 체조요정들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지켜봤다. 안타까운 탄성과 끊임없는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 세계인의 시선은 슈슈노바와 실리바스에게 집중됐다.

첫 번째 종목은 이단평행봉. 실리바스보다 예선전 예비점수가 0.05점 앞섰던 슈슈노바는 9.9에 그쳤다. 반면 실리바스는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치며 10점 만점을 받았다. 오히려 실리바스가 0.05점 차 앞서 나갔다. 두 번째 종목 마루운동에서는 두 선수 모두 만점을 받아 순위에는 변동이 없었다. 슈슈노바는 평균대에서 실리바스와의 격차를 0.025점 차로 좁혔고, 결국 마지막 뜀틀에서 승부가 갈리게 됐다.

실리바스가 먼저 뜀틀을 뛰어 넘었다. 공중자세와 착지 모두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자신도 만족스러운 듯 관중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점수판이 공개되자 그녀의 표정은 다소 어두워졌다. 9.95. 예상 외로 낮은 점수였다. 더구나 뜀틀은 슈슈노바의 주종목이 아닌가. 실리바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슈슈노바의 연기를 지켜봤다. 침착하게 경기를 마친 슈슈노바의 점수는 10점 만점. 그 순간 패자(실리바스)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글썽 거렸고, 승자(슈슈노바)는 동료들과 얼싸안으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실리바스는 단체전에 이어 또 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종목별 결승이 아직 남아 있었다. 140cm, 32kg의 가냘픈 소녀, 실리바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멋진 설욕전을 펼쳤다. 25일 종목별 결승전에서 실리바스는 무려 3개(이단평행봉, 마루운동, 평균대)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단평행봉에서 윗봉과 아랫봉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 작은 새를 보는 듯 했다. 마루운동에서는 주제곡 '사랑의 환희'에 맞춰 경쾌하고 발랄한 모습을 선보였고, 평균대에서는 그녀의 우아하고 가냘픈 여성미가 단연 빛을 발했다. 반면 슈슈노바는 게임을 망쳤다. 자신의 주종목인 뜀틀에서는 무릎으로 착지하고, 마루운동에서는 엉덩방아를 찧는 등 '최악의 날'을 보냈다.

힘있는 연기를 펼친 슈슈노바는 개인종합과 단체전을 모두 휩쓸었지만 막판 부진 탓에 완전히 이미지를 구겼다. 반대로 섬세한 연기를 선보인 실리바스는 0.025점 차로 슈슈노바에게 개인종합 금메달을 빼앗겼지만 종목별 결승에서 3관왕에 오르며 마지막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영원한 패자도 없고 영원한 승자도 없는 스포츠 세계. 그래서 스포츠는 아름답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에서만큼은 두 선수 모두 승자였다. 실리바스가 8번, 슈슈노바가 7번 등 수 차례 환상적인 만점연기를 선보였으니까. 그 전까지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신기술을 완성시켰으니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보여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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