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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9
허진희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평점 :
책장을 덮고 나니,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밀려온다. 참으로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다. 동시에 세상에 대한 원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밤잠을 설치곤 했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올랐는데 나의 모습은 구니보다는 오히려 “보하”쪽에 겹쳐 보였다.
구니와 보하는 어릴 적 첫눈에 서로가 서로의 인연임을 알게 된다. 아마도 보하가 신었던 반짝거리는 빨간 에나멜 슈즈를 구니가 맨손으로 닦아주었던 그 순간부터......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엄마 없이, 할머니와 함께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던 들짐승 같은 어린 구니와 화려한 에나멜 구두를 신은 공주님 같은 보하.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인데 이들의 차이는 또 있었다. 없지만 있는 구니와 있어도 없는 보하...
구니에게는 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구니의 인생을 바꿔주기 위해 노력한 할머니가 있었고 보하의 경우, 아이들이 샴페인을 마시고 어디서 잠들었는지 관심도 없는 부모님이 있었다.
이 책 <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이 몇 개의 장면만으로도 등장인물들이 느꼈을 미묘한 감정을 독자들이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아이들이 느꼈을 깊은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지독한 고독이 묻어 나온다.
“나는 가끔 우리가 샴페인을 마시고 옷장 속에 숨어 있던 날을 생각해. 어쩌면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닌가 싶어.”
아무리 털고 떼어내도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불행과 어둠. 그랬기에 보하는 백화점 일루미네이션 행사를 그토록 기다렸던 걸까?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구니와 빛을 찾아다녀야 하는 보하... 가끔 우리는 도저히 신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우리 곁에서 “나만의 신”을 찾곤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일종의 신 혹은 구원이었던 구니와 보하.
그들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보하의 어둠이 너무나 컸던 걸까? 구니의 약한 빛은 가끔 보하의 어둠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빛과 어둠... 어둠과 빛... 우리네 인생은 샴페인의 기포가 있다가 꺼지는 것처럼 혹은 일루미네이션의 빛이 켜졌다가 꺼지고 다시 켜지는 것처럼 이렇게 조금씩 명멸하며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 <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숨죽인 채 가만히 있었던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떠올리게 했다. 마치 빛바랜 사진첩처럼, 우연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울컥하게 되는 느낌... 조용하지만 진한 슬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 <샴페인과 일루미네이션>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