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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ㅣ 아포리아 14
롤랑 바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평점 :
“기억과 정체성, 이미지를 가로지르며
쓰기 자체가 된 사람, 롤랑 바르트”
영어 수업을 하다가 롤랑 바르트라는 기호학자를 처음 만났다. 이미지는 본연 그대로 해석되기보다는 그것을 보는 자의 의도나 혹은 특정 해석을 이끌어내기를 원하는 자의 의도대로 해석된다는 그의 통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책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며 모든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 독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요즘같이 모든 정보가 받아보는 사람들의 의도대로 각색되고 확산되는 현상을 미리 예언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제목처럼 작가가 스스로에 대해서 쓴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서전처럼 스토리텔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어떤 거대한 서사가 있기보다는 이야기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마치 미술에서의 모자이크 장르나 패치워크처럼 사진, 편지, 짧은 글 등이 조각조각으로 이어져 있는 상태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만든 느낌이다. 그러나 음악, 영화, 신화학 기타 등등 실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번뜩이는 지성과 통찰이 느껴지는 짧은 글들이 매력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토리텔링의 즐거움 대신 천재적인 학자의 날것 그대로의 번뜩이는 지성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텍스트화한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을 말하자면, 우선 그가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평생을 따라다닌 결핵의 그림자, 그리고 그 몸이 남긴 흔적들을 기호와 구조의 언어로 해부한다. 그는 여러 인칭을 넘나들며 스스로를 지칭하고 때로는 독자에게, 때로는 자신에게 주석을 붙인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조차 “기호학”의 주제로 삼은 셈. 앞에서 이야기했듯 서사적 흐름을 기대하긴 힘든 책이지만 좀 재치 있고 재미있다고 느껴진 해석이나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그는 기흉 수술을 받고 난 후 잘려나간 자신의 갈비뼈 조각을 선물받는다. 그것을 한동안 소중한 것을 모아두는 서랍에 보관해두었다가 미련 없이 버리게 되는데, 인간들이 흔히 “죽음”에 대해 치르는 장례식 등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스테레오 타입의 역류 효과”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잠비넬라라는 여장 가수가 “진실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서 스스로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 스테레오타입의 역류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와 같은 유럽어의 경우 단어마다 남성형, 여성형으로 구분되는데, 언어 안에 갇힌 사고랄까? 그런 면이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파편들로 글을 쓴다는 것. 파편들은 둥근 원의 둘레에 있는 돌들이다. 나는 그 위에 내 몸을 둥그렇게 펼친다. 내 모든 작은 세계가 부스러기들이다. 그 중심에는 뭐가 있을까?” - 164쪽
굉장한 의도를 담은, 마치 아무런 의도가 없어 보이는 책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어떻게 보면 독자들에게 사뭇 불친절한 책이기도 하다. 서사적 즐거움을 기대하기 힘들고, 짧은 글 각각은 맥락 없이 흩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마다 사유의 밀도가 굉장히 높다. 그리고 글뿐 아니라 사진과 해설 그리고 갈겨쓴 메모와 자기 글에 대한 주석 등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쓴 책이기도 하지만 그 주인공을 두고 구경하고 사유하며 함께 사색을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느낌도 든다. 기호학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철학 서적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 나를 쓰다, 나를 읽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