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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평점 :
슬픔과 기이함, 그리고 사랑이 교차하는 순간들
줄리애나 배곳의 단편집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는 다소 낯설고 기이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자꾸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쪽을 가득 채우는 슬픔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SF 장르라는 외피를 입고 인간과 사랑을 말하는 저자. 이 책은 SF, 호러, 판타지 등 실로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이야기들은 매혹적일 만큼 파괴적이고 기묘하기도 하다.
이야기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과 서로 다른 장르적 색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작품들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감성은 일관된다. 슬픔, 상실, 그리움, 연민, 용서 그리고 사랑. 이 소설이 특이한 이유는, 갈수록 젊어지는 기술이나 안드로이드를 결혼식에 대신 보낼 수 있는 첨단 기술이 발달한 사회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아날로그적인, 아주 진한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거나 인상에 크게 남았던 작품들을 언급하자면, 우선 [버전들]에서는 원래 인간들 대신 결혼식에 참석한 안드로이드들이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상당히 신선했고, [가스라이터]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시대의 도래 앞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도덕적인 불편함을 잘 묘사한다. [디어 브래들리 쿠퍼]에서는 유명인의 머리카락으로 태어난 아이가 친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인데 정체성이나 소속감 같은 인간 특유의 감성을 잘 표현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크게 와닿았던 것이 바로 [역도화]였다. 소생술을 포기하는 대신 어려지는 길을 선택한 아버지. 이 단편은 하루에 십 년씩 어려지는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는 딸의 이야기인데, 정말 눈물샘을 너무 자극한다. 무책임한 아버지를 미워했던 주인공은 젊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며 그도 아버지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용서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 점점 갓난아기로 퇴행하는 아버지를 품에 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코 끝을 시큰하게 만들 만큼 감동적이다.
독자에 따라서 어떤 이야기들은 지나치게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다.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야기가 전달하는 감정은 아련하게 남는다. 줄리애나 배곳은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을 들여다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읽으면 기발함과 특이함으로 승부하려는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어느새 슬픔과 상실이라는 감정의 바닷속에서 허우적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적으로 깊이 있는 SF 소설이나 다소 어둡지만 인간적인 단편소설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 출판사에서 협찬받은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