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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를 버렸습니다
정희승 지음 / 작가의집 / 2025년 2월
평점 :
악마와 함께한 지옥 같은 세계는 이제 멀리 사라졌다
우리는 보통 생존기라는 말을 들으면 지진이나 해일 혹은 큰 화재와 같은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화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자란 사람들이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한 경우를 두고도 생존기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가족으로부터 사랑만 받고 커도 온갖 문제를 가질 수 있는 게 인간이기에, 힘든 아동기 시절을 극복하고 어른이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내가 읽은 책 <나는 부모를 버렸습니다>도 누군가의 생존기라고 볼 수 있다. 친딸에게 성적인 접촉을 가하고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가한 아버지.... 작가의 들려줄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저자 정희승씨는 가난한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둘, 그리고 공장을 다니며 살림도 야무지게 하는 따뜻한 엄마...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이라는 문제는 늘 그들 가족을 괴롭혔다. 하지만 가난은 저자 정희승씨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친아빠였던 것. 맞벌이를 하던 엄마는 낮에 긴 시간 동안 공장에 있어야 했고, 특히 야간 근무를 하던 때에는 밤새도록 집에 못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속옷 차림만을 한 채 딸을 불러서 몸의 이곳저곳을 안마하라고 시킨 다음, 마수와도 같은 손길을 딸에게 뻗치게 되는데....
동시대를 살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로서 나는 책을 읽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혀서 동물처럼 끌려다니던 저자의 엄마..... 너무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엄마의 얼굴을 저자는 떠올린다. 사실 80년대 ~ 90년대 한국에서의 여성 지위는 형편없이 낮았기에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동네를 이런 식으로 떠들썩하게 만든 집안이 한두 군데 있기는 했다. 하지만 딸에게 성추행 혹은 성폭행과 같은 몹쓸 짓을 하는 경우는 정말 다른 문제이다. 저자는 거대한 두부 덩어리 같은 아버지의 몸이 자신을 누르던 날의 공포, 그리고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던 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한 아버지를 막으려고 빨랫줄로 문고리를 칭칭 감았던 날의 터질 듯한 긴장감을 떠올린다. 과거의 공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어른이 되고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린 후 저자는 그제야 심리 상담을 받으며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그 와중에 부모님으로부터 "회복탄력성"이라는 긍정적인 자질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도 좋은 수확이긴 하지만 저자는 심리학 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유년기를 지옥으로 만든 남자, 즉 자신의 아버지가 "악성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왜 그가 그런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깨닫게 된다. 3살에 아빠를 잃은 저자의 아버지는 엄마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새아버지와 살게 된다. 그러나 새아버지는 이유 없이 그를 때리고 학대했고, 그런 이유로 저자의 아버지는 중학생 때부터 홀로 생활하게 된다. 그렇게 악마의 탈을 쓴 남자가 탄생하게 된 것....
어른이 된 후 저자는 비로소 엄마와 두 오빠에게 아버지의 만행을 알린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만 분노할 뿐, 혹시나 저자가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까 봐 숨기기에 급급한다. 거기에 실망한 저자는 가족과의 절연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 심리 상담과 심리학 공부를 통해서 저자는 어느 정도 악마의 손길이 남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긴 한다. 물론 가족과의 절연을 택한 것도 그녀에게는 고통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을 딛고 이제 그녀는 인생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아픔을 지닌 사람들은 평생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서 살기도 하는데, 저자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에 이런 책도 내면서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 같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는 오직 행복해지기를 택하려는 저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너무나 끔찍했던 과거였지만 그로부터 더욱더 성장하고 자유로워진 저자의 이야기 <나는 부모를 버렸습니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