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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의 내가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평점 :
"어쩌면 가장 좋은 눈물은 가장 작은 눈물일지도."
생과 사, 그 끊임없는 순환의 신비를 말하고 있는 듯한 현호정 작가의 단편 소설집 " 한 방울의 내가 ".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꿈의 세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책이다. 화분에 갇혀있어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인 식물이 피를 마신 후 말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한다. 누군가의 눈물에서 비롯된 작은 물방울은 전생을 기억하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어 세상을 탐험하며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찾아다닌다. 삶과 죽음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샴쌍둥이 같은 것. 살기 위해 먹어야 하지만 죽어야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그를 살릴 수 있다.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 같은 생과 사의 이야기 - [한 방울의 내가]
<라즈베리 부루>
계단 밑 지하에 숨어서 살아가는 나. 그 누구의 눈길에도 들키지 않은 채 마치 식물처럼 살아가는 "나"는 언젠가부터 작은 라즈베리 나무에 "부루"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준다. 피를 준다는 것은 생명력을 주는 행위. 그로 인해 마치 인간처럼 말할 수 있게 되고 걸어 다니게 된 부루는 마치 식물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나"를 돌봐주는데.... ---- 식물을 먹는 인간 그러나 죽은 후 우리는 땅이 되어 다시 식물에게 양분을 준다. 자연은 거대한 어머니이고 우리는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식물에게 생리혈을 나눠준다던가 하는 그로테스크한 면이 없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거대한 잎사귀 틈에 잠든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해서 뭔가 아련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
<물결치는 몸, 떠다니는 혼>
액자식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카페에서 일하는 K와 부랑자의 대화 속 이야기. 부랑자는 아직 오지 않은 지구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미래의 어느 순간 지구는 끔찍한 재난을 맞이하고 물에 잠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난다. 온갖 쓰레기들이 떠다니는 더러운 바다. 먹을 것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물속을 떠다니는 흰 부유물을 먹고 살아가는데, 알고 보면 그건 이미 죽은 자들의 몸이다. 재난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몸에 돋은 종기와 같은 기생체와 함께 살아가게 되지만 어느덧 기생체들은 자생체보다 더 크고 힘이 세지게 되는데...... ---- 내가 평소에 상상하던 디스토피아 속 지구를 매우 그로테스크하게 잘 그려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 원래 몸보다 훨씬 더 비대하고 강력해진 기생체들을 상상하니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랄까... 이 작품도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죽은 뒤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순환을 그려낸 듯.
<한 방울의 내가>
전생에 "메이"라는 한 인간의 눈물방울이었던 "나"는 땅으로 떨어진 후 세상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빗방울이 되어 다른 빗방울들과 함께 춤을 추며 세상에 스며들었던 "나"는 이생에서는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 오리와 이야기하고 바람의 소리를 듣는 등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나"는 물의 중심을 이루는 작은 구슬 "온"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 큰 물과 작은 물이 동화의 춤을 추다 보면 더 작은 쪽 온이 사라지게 되는 게 원칙이지만 "나"는 자신의 온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반드시 이 생에 메이를 만나야 하기에..... --- 그저 물일뿐인데 이제는 "온"이라는 생명 에너지를 가진 하나의 존재로 보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거대한 흐름에 합쳐지길 거부한 물방울. 과연 물방울 "나"는 메이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뭔가 상당히 독특하고 기묘한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왔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 등등 생명의 거대한 주기 혹은 순환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탄생이라는 것,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먹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개도 꿈에서는 납득되는 것이 사실이다. 연필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거나 죽은 이의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끔찍한 상황이라도 꿈속이라면 가능하다. 라즈베리 나무가 식물 같은 인간을 돌보고, 자신만의 "온"을 품은 채 전생의 연인을 찾아헤매는 물방울의 모습이 묘사되는 이야기, 기묘하고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속 세상 같은 이야기로 이끄는 단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를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