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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평점 :
장르소설을 즐겨 읽지만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에 비해서 SF 소설에 손이 덜 가는 편이다. 너무 어려운 개념이 등장한다거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소설을 읽다 보면 뇌에 정지가 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SF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 이 장르에 대해서 공부를 더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런 한편, SF 가 선사하는 기묘하고 독특한 세계관, 그 한계 없는 상상력이 주는 매력 때문에 쉽게 손을 놓을 수도 없다. 나의 경우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류가 전달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좋아하다 보니 자꾸 그쪽으로만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게 된 배명훈 작가의 소설집 [미래과거시제]는 그전에 읽었던 소설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굉장히 스마트하고 산뜻하다는 느낌? 미래를 다루긴 하지만 광활한 우주나 망해버린 지구 이런 게 아니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읽다 보니까 한 50년 후에 혹은 100년 후에 일어날 수 있을 만한 일들이 훅 다가오는 느낌이다. 코로나를 겪은 후 비말에 대한 공포 때문에 침 튀는 센 발음이 싹 사라진다는 설정 -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외계인과 진지하게 조우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아이들의 수능 시험 이야기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진지하게 읽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게 되는 이야기들이 좀 있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의 정교하고 치밀한 "SF 적 상상력" 혹은 "세계관"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하고 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포스트 아포칼립스류가 가진 비장하고 어둡고 절망적인 세계관 특유의 감정적 소비는 최대한 절제하는 대신 여러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해 보는 듯한 실험적 시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소설 하나하나가 굉장히 재미있었고 나의 뇌를 간지럽힌다는 싶은 느낌도 들었다. 9편의 소설 중 내 마음에 더 깊이 남았던 소설들은 [수요곡선의 수호자], [미래 과거시제], [접히는 신들] 그리고 [절반의 존재]였다.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가진 인공 지능들.. 앞으로 그들에 의해 지배될 어두운 미래를 가끔 상상하곤 하는데, [수요곡선의 수호자]에 나오는 주인공 로봇 마사로는 특이하게도 소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로 공급에 초점이 맞춰진 A.I.들의 무시무시한 공급력을 상쇄하고 경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수요곡선의 수호자랄까? 인간 못지않은 감수성을 가진 마사로와 함께라면 소비활동이 상당히 즐거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 과거시제]에는 독특한 언어를 말하는 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주인공 강은신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다. 시간을 여행하는 자가 등장하고 그가 가진 특유의 언어 습관을 다루는 이야기인데,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독특한 단편이라는 느낌도 들고 예전에 봤던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도 떠올랐다.
[절반의 존재]에는 사고로 인해 절반의 몸을 기계로 대체한 사람, 지하임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절반이 아니라 다른 절반이 기계로 대체된 경우이다. 고통을 이겨낸 아버지는 그녀를 딸로 받아들이지만 어머니는 도저히 변한 지하임을 딸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부모님 모두와 함께 하게 된 자리에서 지하임은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어머니 안세미씨에게 자신이 여전히 그녀의 딸임을 항변하게 된다.
위에 언급한 소설들 외에도 [접히는 신들]이라는 단편도 너무나 독특하게 다가왔다. 2차원이라는 평면의 세계가 눈앞에서 3차원으로 변하고 공간에 우뚝 서게 될 때 느끼는 그 감동, 얼마나 경이로울 것인가? 평면에서 입체감을 구현해 내는 화가들의 위대함이 우주라는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공간적 상상력이 남들에 비해서 더 뛰어난 사람들이면 이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배명훈이라는 이름이 워낙 낯익어서 책장을 좀 뒤져보니, 작가의 책들이 몇 권 꽂혀있었다. [타워]라는 책과 [안녕, 인공존재]라는 책인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책장에 꽂아놓은 것 같은데,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특유의 실험적 정신과 재기 발랄함이 녹아있겠지? 미래 세상에 대한 다소 삐딱한 시선이 만들어놨을 그 풍부한 세계로 다시 빠져들고 싶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