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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ㅣ 안전가옥 FIC-PICK 4
이경희.전삼혜.임태운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2월
평점 :
영화 [매트릭스]는 종말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에서, 컴퓨터의 배터리 노릇을 하며 가상 현실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류를 그린다. 주인공 네오를 비롯한 몇몇 깨어난 자들은 아직도 "가짜" 세상에서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 A.I. 들과 전면전을 펼치게 되지만, 그 와중에도 진짜 현실보다 가상 현실 속 달콤한 보상을 선택한 한 인간은 로그아웃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이 책 "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에 실린 단편집을 읽다 보니 내 최애 영화였던 [매트릭스] 속에서 해방, 즉 로그아웃을 하고자, 혹은 로그아웃을 막고자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우던 등장인물들이 떠올랐다. [매트릭스]를 보며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 인간이 인공 지능의 배터리 노릇을 하면서 가상 현실 속에서 비루하게 살아가는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가능성도 있겠구나.. 했는데?! 웬걸? 인간이 가상 현실 속에서 살아갈 미래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이 책을 보면서 들었다.
"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는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집이다. 3편 모두 가상 현실, 즉 메타버스를 주제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아직은 먼 미래가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기후 변화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지구의 상황이 떠올랐다. 단편 " 멀티 레이어 " 에서처럼 극심한 환경 변화로 인해 지구가 종말에 다다르게 되면 메타버스인 " 세컨드 서울" 을 택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가상 현실이라는 차선책을 택하게 되지 않을까?
첫 번째 단편 " 멀티 레이어"에서 극심한 기후 변화로 인해 지구가 물에 잠긴 후 인류는 "세컨드 서울"이라는 가상 공간에서의 삶을 택했다. 기한은 100년, 그 사이에도 기후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회사가 로그아웃을 해주는 게 약정이었으나 100년이 지난 후에도 로그아웃 버튼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유저들은 항의 끝에 결국 혁명단을 조직하여 고객 센터로의 침입을 노렸지만 첫 번째 시도는 누군가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실패했고 이제 두 번째 기회가 왔다. "세컨드 서울" 을 테스트하던 시기부터 참여하며 그 세상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유저 정민에게 인클루드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다시 한번 의뢰를 해온 것. 가상 현실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온 정민이 이 의뢰를 받아들일 이유는 별로 없지만, 문제는 이 혁명단을 이끄는 중심부에 자신의 수양딸인 수현이 있다는 것! 그는 과연 로그아웃을 애타게 원하는 수현을 위해서 고객센터로의 침투를 감행할 것인가? 그리고 성공을 거두고 로그아웃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 멀티 레이어 "를 쓴 작가 이경희는 다른 SF 작품인 [테세우스의 배]나 [모래 도시 속 인형들] 등을 통해서 주로 서열이나 권력을 이야기하는 편인데 이 작품에도 다르지 않았다. 가상 공간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자들, 즉 자유와 개혁을 원하는 무리들과 가상 공간에서 자신들이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무리들 사이에 뚜렷한 갈등 관계가 드러난다. 사실 " 세컨드 서울" 은 붕괴하고 있고 붕괴 후 시스템이 셧다운 되어버리면 접속한 사람들은 어떤 부작용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든 가상 현실에서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소수 기득권과 불의와 불합리에 맞서 싸우는 다수 대중들이 있을 수 있다는 설정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메타버스 속 가상의 전시장에 걸릴 NFT 사진. 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손 사진들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게 되는 현준의 구 여자친구들. 주인공 미현은 선배이자 절친이었던 소리의 작품을 무단으로 NFT 창작자에게 빼돌린 현준을 용서할 수가 없다. 구여친들이 연대하여 전남친의 불법 행위에 대한 응징을 가한다는 다소 코믹 발랄했던 작품 [구 여자친구 연대]와 메타버스 세계에서 아바타를 납치하는 일당들이 머무르는 요굴에 언더커버 요원으로 들어가서 테러 행위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설정의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도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구여친 연대]를 제외하고 다른 2단편들의 경우는 스토리가 있는 롤 플레잉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만큼 그래픽 묘사와 장면 전환 자체가 상당히 화려하고 속도감이 있었다. 마치 평행 우주를 연상케 만드는 여러 레이어들, 그런 레이어들을 뛰어넘으면서 고객 센터로 질주하는 " 멀티 레이어" 속 정민의 모습과 "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 "에서 거대한 방망이를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도깨비의 모습에서 마치 신의 영역을 넘나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온라인 게임에 열광하며 오랫동안 가상의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런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였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바타로 변신한 듯한 느낌을 갖게 해 준 책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였다.
*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