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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ㅣ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평점 :
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단편 소설집,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14 - 방어가 제철 -을 읽게 되었다. 각 단편들은 "누군가의 죽음" 을 다루고 있지만 죽음 자체를 조명하기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애도와 추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허망한 죽음 앞에서 허둥거리지만 결국 산 사람은 어떻게든 일상을 꾸려나가야 한다. 크나큰 슬픔과 분노에 압도될 수도 있는 남겨진 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추스르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소설들. 사랑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곁을 떠나버렸을 때 느껴지는 그 헛헛함,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그 빈 공간을 메울 수 있을까?
[방어가 제철]이라는 제목에 맞게 이 책에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등장한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너무나 힘들고 지쳤을 때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에 큰 위로를 받았던 경험. 정갈한 반찬들과 든든한 밥 한 공기,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다. 단편 [달밤]의 주인공은 생일을 맞이한 후배 소애가 육개장을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양지머리를 푹 삶아 결을 따라서 뜯어내고 고사리, 토란, 대파를 팍팍 넣어 먹음직스러운 육개장을 끓어낸다. 재료 준비부터 요리까지 감각적으로 묘사해 내는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주인공이 차려낸 얼큰하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육개장을 받아든 느낌이다. 절로 힘이 솟는다.
그녀는 육개장을 맛있게 먹는 소애를 보며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은주를 떠올린다. 갑작스러운 은주의 죽음 소식을 들은 후 장례식에 가서 미지근한 육개장을 먹었던 주인공. 질긴 대파를 씹으며 은주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은주가 왜 그렇게 빨리 떠나야 했는지를 안타까워한다. 그랬기에 현실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소애를 위해 정성스러운 육개장을 끓여 낸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소애가 현실을 잘 살아가길 바라며. 그녀가 끓여 낸 것은 아마도 육개장이 아니라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 살아있는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언니가 없는데, 언니가 스스로 없기를 원했는데 살아 있는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나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하지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30쪽)
차마 버릴 수 없어 차곡차곡 모아뒀던 기억과 추억들.. 죽은 이를 잊지 못해 모아뒀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단편 [방어가 제철]에서 주인공은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오빠와 오빠의 절친 정오 그리고 자신이 젊은 시절 나누었던 추억을 차마 그냥 떠나보낼 수가 없다. 영화와 책 그리고 음악을 공유하며 열띤 한때를 공유했던 그들. 그러나 중심축이었던 오빠 영재는 없고 이제 정오와 주인공은 가끔 만나 싱싱한 방어 회를 먹으며 슬픔과 그리움을 달랜다. 그러는 가운데 조금씩 마음에 묻어두었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는 그들. 배는 불러오고 취기가 얼큰 도는 가운데 비로소 망자와 그와의 추억을 떠나보낼 자신이 생긴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왜 오래전 연락이 끊어진 정오의 연락처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엄마의 장례식 소식을 그에게 전했는지, 그가 왜 다시 내게 연락을 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사주었는지, 우리가 왜 3년 동안 만남을 이어갔는지.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그 일들의 이유가 모두 같으며 그러므로 단 하나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방어가 제철인 계절이 온다." (71쪽)
누군가의 죽음 앞에 의연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떠나고 없지만 그 사람과 나눈 추억, 그 사람의 향기는 고스란히 남아 남은 자들을 한동안 괴롭히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서로 어떻게 위로받고 위로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 소설 [방어가 제철]. 각 단편들 속에 등장한 요리들 - 육개장과 방어회 -의 요리법과 먹는 장면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서 책을 덮은 후 언젠가 이 음식들을 꼭 먹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누군가가 곁에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의 크기만큼, 그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주위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공허함과 슬픔의 크기는 더 커지는 것 같다. 음식을 함께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의 공유가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준 소설이었던 [방어가 제철]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