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건 볼품없지만 트리플 3
배기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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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보니, 나의 젊은 시절 한때가 떠올랐다. 한국에선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서 중동의 한 지역으로 여행 겸 봉사활동을 떠났었는데 거기서 사실 외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많이 만났다. 각자 사연이 있었지만 다들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일종의 현실 도피형 (?) 인간들이 많았다는 점.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한국에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고, 여기 말고 거기에는 다른 게 있겠지... 하고 건너와봤지만 글쎄... 다들 현실은 꿈보다 더 견고하고 높은 장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던 또래들의 눈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찌질한 인간들로 비쳤을 수도 있다. 아니, 진짜 찌질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동안이나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서 방황하고 고민을 거듭했다. 쉽게 풀리지 않던 나의 청년 시절... 그러나 하나는 확신할 수 있는 게, 그 방황과 고민이 사실 헛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어른이 되어보니 내가

많이 단단해지고 확고해졌다는 걸 느낀다 ( 물론 그럴 나이가 되어서 그렇겠지만 )

이 책 [ 남은 건 볼품없지만 ]에는 3가지 단편이 등장한다. 책 제목과 같은 단편 1부, 그리고 [ 끝나가는 시절 ] 과 [ 레일라 ]라는 작품까지 포함하여 3편이다. 이 작품들 모두 불투명한 미래를 끊임없이 걱정해야 하는 20대 혹은 30대 초반이 등장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누군가의 밑에서 빛을 못 보고 허드렛일만 주야장천 하기도 하고 음악의 꿈을 꾸었다가 어머니의 병환에 현실과 타협하기도 한다. 여자친구의 집에 얹혀살다가 바람을 들켜서

쫓겨나는 주제에 여자 친구의 비싼 가방을 훔쳐서 팔아먹기도 하는 인간도 있다 ( 물론 자신이 사준 선물이겠지만 ) 저자의 현실이 녹아있는 작품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정말 실감 나는 이야기들이라 읽는 내내 정말 재미있었다.


첫 번째 작품인 [ 남은 건 볼품없지만 ]에는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커플 후재와 주인공 섞정이가 ( 물론 진짜 이름이 아님, 후재와 몸을 섞는 사이라고 그냥 그렇게 부름 )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모텔에서 겪는 소동은 어쩌면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할 범죄 ( 데이트 폭력, 인질극 ) 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묘사하는 방식은 전혀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월미도에 있는 탬버린 놀이기구에서 텐션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아비규환을 봤을 때와 같은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이 계속 깨어나지 않는 상황이 왜 이리 심각하지 않은가? 그렇게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눈을 반짝 뜨며, " 섞정아! 나 꿈에서 진짜 스펙터클한 영화를 찍었어! "라고 말할 것 같다.

시를 써서 등단하고도 백수처럼 지내면서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었던 주인공 섞정. 그런 아버지 때문에라도 예술 하는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의외로 그녀가 끌리는 건, 온통 예술 한답시고 똥폼 좀 잡는 남자들이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남자 찰스가 그랬고 ( 결국 월세 안 내고 도망감 ) 가끔 침대를 공유하는 이상한 관계인 후재는 예쁘고 어린 여자 친구를 두고 있으면서도 주인공을 그런 식으로 만난다. 그러나 주인공은 후재의 삶을 부정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롭고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가오를 심하게 잡으면서 알파치노의 눈빛을 닮으려 하고, 고민이라도 토로할라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후재를, 그녀는 있는 그대로 사랑했나 보다. 섞정은 후재가 깨어나면 이렇게 말해주려 한다.

" 잠들어 있는 후재가 도주범 발리송을 잡는 데 열을 올리는 것 말고, 열세 살로 돌아가 깡촌의 논에서 트랙터를 몰고 다니는 꿈을 꾼다면 좋을 것 같았다. 운전이 서툴러 아버지에게 욕을 실컷 얻어먹는 꿈을 꾼다면, 그래서 진저리를 치며 눈을 뜬다면, 서른세 살의 후재가 바보처럼 겁에 질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면. 그런다면, 나는 잠자코 후재의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후재야, 이젠 너를 괴롭히는 괴물 트랙터는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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