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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와우,,, 책을 들자마자 이렇게 몰입해보기는 ( 처음은 아니지만 ) 어쨌든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굴 향기가 물씬 풍기는 켄트 지방의 한 식당에 볼 빨간 엘리스와 비쩍 마르고 키가 껑충한 낸시가 부산하게 요리를 나르고 굴을 까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듯하다. 그리고 남장 가수인 키티에게 미친 듯이 빠져드는 낸시가 매일 기차를 타고 가서 공연장 특별석에 앉아 키티의 공연을 지켜보는 모습이 생생하다. 성을 뛰어넘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순수하게 사랑에 빠져드는, 그 심리적 묘사가 너무나 충실하게 잘 그려져 있다. 감각적 묘사도 엄청 뛰어나서, 굴 향기가 느껴지고 무대 위 화려한 불빛과 낸시를 바라보는 키티의 눈동자 색깔이 보일 만큼 생생한 세라 워터스의 작품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줄거리로 들어가자면, 낸시는 켄트에서 굴 식당을 운영하는 가족을 도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소 따분한 이 생활 외에 자신에게 새로움과 즐거움을 불어넣어 줄 만한 것, 인생에 다른 뭔가가 더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켄터베리에 있는 예술 극장에 가게 되고 거기서 무대에 등장한 가수 키티를 만난다. 키티는 남성복을 입고 노래하는 여자, 즉 “ 매셔 ”라는 가수이다. 키티를 본 순간, 낸시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곧 그녀는 자신과 키티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상상한다. 우여곡절 끝에, 키티와 친해진 후 곧 그녀가 런던에 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의상 담당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낸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것은 슬펐지만 그녀는 키티와의 새로운 삶을 위해 런던행을 택한다. 물론 우리가 예상했다시피 이들은 결국 연인 사이가 되지만 이런 사랑의 나날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 티핑 더 벨벳 ” 은 캐릭터 묘사가 굉장히 뛰어난 듯하다. 여성 심리를 잘 묘사한다고 할까? 굉장히 강렬한 감정이 느껴지고 인물의 독특한 개성이 잘 표현되었다. 낸시는 순수한 소녀였다가, 냉소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상실감과 연인에 대한 열정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녀는 매우 다정하기도 하지만 이기적이기도 하고 거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책은 낸시의 5년의 삶을 펼쳐놓는데, 독자들은 굴 향기가 가득했던 낡은 집에서, 다소 지저분한 런던의 뒷골목과 동시에 화려하고 불빛이 번쩍이는 극장까지 흥미진진하게 그녀의 인생사를 따라가게 된다.
사실 낸시라는 캐릭터에 그렇게 끌리지는 않더라도, 그녀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전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던 런던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동성연애의 비밀스러운 삶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낸시의 삶을 통해, 쾌락주의와 변태적 성욕을 가진 여성들, 열정적인 정치활동가들, 그리고 복장 도착자들과 무대 위 스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점점 성장하고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낸시를 보게 된다. 작가 세라 워터스는 젊은이가 사랑에 빠졌을 때, 순수함을 잃고 절망을 느꼈을 때 혹은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때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해서 매우 세심한 글쓰기를 선보였고 그런 필력에 이끌려 독자들은 낸시의 삶을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세라 워터스의 글은 매우 아름답고 마치 물 흐르듯 읽힌다. 그녀는 일반적인 다른 역사서나 소설책에서는 잘 묘사되지 않았던 특별한 삶 - 같은 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공동체의 모습 - 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풍부한 역사적 사실들이 잘 드러나있는데 화려한 드레스와 떠들썩한 파티 그리고 공연 외에도 런던의 더러운 뒷골목과 싸구려 기숙 시설 등은 그 당시 생활상을 잘 드러낸다. 매력적인 런던의 이중적인 모습이 세라 워터스의 펜 끝에서 되살아났다고나 할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즉 역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이 작품을 너무나 좋아할 듯 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이 없더라도 내가 가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이국적인 장소와 시간대로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그동안의 천편 일률적인 소설 속 여성 캐릭터의 진부한 모습에 지루함을 느꼈을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 정말 재미있고 신선하고 풍부한 필력에 의해 지어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