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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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기억,

진실과 거짓,

권력과 동의에 관한 이야기

처음엔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벙벙해하면서 읽어내려갔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작가가 매우 영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저자인 수전 최가 어떻게 보면 [ 신뢰 연습 ] 이라는, 다소 모순된 제목을 가진 이 책으로, 독자들 전체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플롯이다. 앞에 읽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다음 글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숨 죽이고 책을 읽게 된다고 해야 할까?

정확한 사실 관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저자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른 세 명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스토리 라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글을 다 읽고 나면 마음 속에 거대한 물음표가 찍힌다. 누군가는 어떤 것을 감추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그걸 드러내고 싶어한다.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각자의 각도에서 보이는 것을 드러낸다. 어떤 이야기는 " 세라 " 의 버젼으로 또 다른 이야기들은 또 다른 누군가의 버젼으로...

일단 독자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독서를 일찍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인데, 마지막에 가서야 작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꾹 참고 읽기를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이 소설의 3가지 버젼의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누군지 몰라서 꽤 헤매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렌도 첫번째 이야기인 " 세라 " 버젼에서는 거의 엑스트라급의 출현 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하고 그럴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


책을 조금 읽고 나니까 이제서야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신뢰 연습이라고 붙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독자들이 끝까지 작가에 대한 신뢰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지은 듯 하다. 작가의 의도가 그러하다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어쩌면 신뢰와 불신 사이에서 시험을 당하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사실 나는 어른들의 부주의함과 무책임함에 놀랐고 당시 무력하기만 했을 학생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 생각했다. 첫번째 이야기인 세라 이야기도 그렇고 두 번째 이야기인 카렌 이야기도 그렇고, 그 당시 어른들이 얼마나 미성숙하고 무책임했던가를 드러내는 듯 보였다. 그들은 어쨌건 교육자이지 않은가? 연기 연습이 목적이었든 아니면 감정의 부주의함이었던 간에, 킹슬리 선생님이든 마틴이든 모두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내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권위자의 손에 아이들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이 놓일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명성 있는 예술 아카데미를 다니는 고등학생들의 연기 연습 장면으로 시작된다. 독자들은 여기서 세라와 데이비드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신뢰 연습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기 연습을 하던 중에 격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불안한 십대들의 감정 상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그들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여름에 시작되었던 사랑은 가을 쯤에 끝나버리니까. 어쨌든 이 책의 거의 절반 부분은 세라와 데이비드의 엎치락 뒤치락하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격정적인 로맨스는 그들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들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실 청소년 이야기를 이렇게 푹 빠져서 읽게 될지 몰랐다. 어른인 내가 유치한 사랑 놀음에 빠질 소냐.. 뭐 이런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 구성면에서나 깊이 면에서 어른들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짜여져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3명의 각도에서 써내려갔는데 우선 고등학생 버젼인 " 세라 " 의 이야기도 유치하지 않고 그녀가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들이 너무 강렬하고 생생해서 정말 머리 속에 장면 하나하나가 다 그려졌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심리나 표정 묘사 등도 너무 세밀해서 혹시 자전적 소설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중간쯤 갑자기 화자가 " 세라 " 에서 그녀의 고등학교 친구 중 한명인 " 카렌 " 으로 바뀌면서 이야기는 다른 톤을 띄게 된다. 세라와 데이비드의 연애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지 더 읽고 싶었지만 어쨌든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보기로 했는데 오히려 " 카렌 " 버젼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책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데이비드와 세라의 연애 이야기는 소설 속의 소설, 즉 세라가 작가가 된 후 책으로 출판한 이야기였던 것! 두번째 파트는 카렌이 작가가 된 세라의 출판 기념 사인회를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세라는 자신의 소설에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 중 빼놓은 것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게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던 간에. 카렌은 세라가 펴낸 책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녀의 거짓말을 어떻게든 밝혀내려고 작정한 듯 보인다.

총 3부작으로 나뉘어져 있는 작품 [ 신뢰 연습 ]. 2부는 1부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고 또 3부는 2부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1부가 가장 양이 많고 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모든 사건들이 비롯되기 때문에 일단 읽어둬야한다. 진짜 이 책의 묘미? 혹은 백미? 는 2부와 3부에 드러나기 때문에 기다리면서 꾸준히 읽어두면 나중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 마치 속삭이듯이 비밀스럽게 감추어져있던 이야기가 다 드러나게 된 순간, 독자들은 참았던 숨을 터트려도 되리라...

이 책은 전체적으로 수전 최라는 작가의 풍부한 필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 번역가의 훌륭한 번역이 도움이 되었으리라 ) 저자는 또한 이야기의 구도를 이리저리 뒤집어서 허구의 가면에 가려진 진실을 독자에게 드러내며 깜짝 놀라게 만든다.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었어? 라며 흥분한 채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이 보이는 듯 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쩌면 이 책의 제목 [ 신뢰 연습 ] 은 " 세라 " 가 쓴 이야기에서 킹슬리 선생님이 학생들의 연기 지도를 위해서 이용한 수업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책과 책을 쓴 작가를 믿고 끝까지 읽어내라는 작가의 의도인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물론 이런 독특한 책의 형식과 다소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책 내용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을 독자들도 있으리라고 보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재미있었다. 한번 읽어봐서는 안될 것 같고 두번 세번 읽어야 작가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듯 하다. 너무너무 만족스러웠던 독서 시간을 선사해준 책 [ 신뢰연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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