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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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익명의 존재로 산다는 것 즉 다시 말해서, 그 누구도 크게 눈여겨보지 않는 존재로 머무른다는 것은,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위험한 일을 당해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불리한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목받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있건 죽어있건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 익명의 소녀 ] 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제시카 패리스도 그런 익명의 현대인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냥 익명의 현대인들 보다 더 안좋은 것은, 익명의 여성,,,, 현대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그리고 포식자의 위험한 눈과 입 앞에서 나약하게 존재할 수 없는 익명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아닐지??

이 책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서 자존감이 떨어진 한 여성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다가온 한 포식자와 그가 던지는 그 거미줄,,, 점차적으로 옭아매는 거미줄과 그 거미줄 안에서 발버둥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자존감 상실로 인해 삶에 대한 통제감이 떨어진, 일시적으로 나약해진 인간의 정신과 삶을 누군가가 통째로 휘두르려고 한다면? 그 나약한 먹잇감이 당신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추리나 스릴러 소설을 읽다보면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스토리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대충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안개로 뒤덮혀있는 듯한 소설. 이 [ 익명의 소녀 ] 는 두 번째였다. 읽은 만큼만 알 수 있던 소설. 내 추리력이 이제 한물간걸까? 아쉬워하던 그때, 소설은 조금씩 물살을 타기 시작하면서 속내를 드러내보였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중독성있게. 이 책을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게 그 이유이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조금씩 아이에게 주면서 공부시키는 엄마에게 조련되듯 나는 책에 조금씩 조련되기 시작했다.

제시카 패리스는 뉴욕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말이 좋아 아티스트이지, 그녀는 무거운 메이크업 케이스를 들고 다니면서 고객들을 직접 방문하여 화장을 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예약이 많이 잡히면 중간에 밥 먹을 시간마저 부족한 제시카의 삶. 그러나 힘들어도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릴 적 뇌손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된 여동생 베키를 돌보느라 가정형편은 이미 많이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에. 항상 부채감에 시달리는 제시카. 그런데 그녀가 부채감에 시달리는게.... 가정 형편만이 이유일까?

그녀는 자신의 고객으로부터 제법 짭짤한 수입을 거둘 수 있는 한 설문조사에 대해서 정보를 얻게 된다. 간단한 설문조사를 해주고 500달러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혹한 나머지, 자신이 그 고객인 척 나가서 설문조사를 하게 된 제시카.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설문조사를 주도하는 실즈 박사는 제시카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녀를 52번 피험자라 부르면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평범하지만 인간적인 허물을 가지고 있는 제시카. 그녀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과 그와 관련된 마음의 상처. 그러나 이 설문조사를 계기로 힘겹게 드러내게 되는 과거의 상처들... 여동생 베키의 뇌손상 그리고 과거 극단에서 당한 성추행 등등. 제시카가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은 현재의 그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남자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 제시카. 그녀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남자들과 원나잇 스탠드를 하고 그런 자기를 혐오스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속해나간다.

한편, 컴퓨터 모니터 너머에서 설문조사를 하던 제시카의ㅏ 반응을 관찰하던 실즈 박사. 박사는 설문조사와 실험에 참여한 제시카의 미세한 반응과 그 다음에 예측되는 행동방향 등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은 불리한 상황입니다. 초대받지도 않고 연구에 몰래 끼어들었어요.

원래 계획했던 연구는 무기한 보류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 52번 피험자님에게만 집중합니다 .”

느리게 흐르는 발라드처럼 시작했다가 폭풍 기타 연주가 흐르는 락 음악으로 변질된 듯한 소설이다. 초반의 느린 전개는 마치 인공 지능 같던 실즈 박사가 사람이라는 실체로 등장하면서 완전히 빠른 전개로 돌변한다. 실즈 박사는 제시카에게 몇 가지 실험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에 관련된 실험을 한다는 박사. 그리곤 제시카로 하여금 술집에 나가서 누군가를 유혹하는 제스츄어를 취하길 바란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 유부남들. 박사가 그녀에게 이런 미션을 내리는 이유는 뭘까?

누군가가 내가 숨기고 싶어하는 내밀한 정보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나의 삶을 휘두르려 한다면?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그가 던진 끈끈이에 걸려서 몸부림치는 내 자신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시나리오이지만 여기에 그런 주인공이 등장한다. 쉽게 생각하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어느새 나를 옥죄는 감옥이 되었고 나의 팔 다리를 묶은 족쇄가 되어있다. 제시카 패리스,,,, 그녀는 이제 빠져나갈 수 없다. 쉬운 탈출은......

죽음뿐??

늪으로 빠져들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익명의 소녀. 박사가 가지고 있는 소름끼치는 비밀과 주인공 제시카의 비밀이 만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책을 읽고 심리상담을 하는 분들에 대해서 ( 미안한 말이지만 )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체적인 학대도 무섭지만 사실 정신적인 학대가 더 무서운 법이다. 나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칼과 총 같은 무기를 휘두르지 않고도 누군가를 이토록 쉽게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다니....

극적 긴장감과 스릴감이 남다른 소설 [ 익명의 소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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