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기는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탓에 항상 나는 뒷전이었고 학업으로 바쁜 언니들은 밖으로만 나돌았다. 혼자서 책과 TV에 빠져들기 딱 적절한 환경이었다고 할까? 아,, 그렇다면 불행하지는 않았던 걸로 해야겠다. 나는 책과 만화, 그리고 영화를 엄청 좋아하니까.
그 많던 애니메이션 중에서 손에 꼽는 만화들이 있는데 그 중에 “ 빨강머리 앤 ” 이 있다. 그녀는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진, 이미 사라져버린 별이 아직 우리의 눈 앞에 빛나는 것처럼,, 나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내 마음 속 추억 상자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녀.
앤이 왜 그리 좋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건 말로 참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지만.. 풀어서 설명을 해보자면. 앤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의지력을 가진 아이였던 것 같다. 앤에게서 슬쩍 슬쩍 엿보이는 그런 단호함이 너무 좋았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으니까. 물론 앤에게 있어 돋보이는 부분들은 많다. 상상력이 풍부하여 마법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아무것도 아닌 걸 특별하게 만들 줄 안다. 다소 과장하긴 하지만 그 발랄한 수다스러움 덕분에 과묵한 매튜 아저씨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이 책 < Ann of Green Gables > 중 기쁨의 하얀 길 편 에는 내가 기억나는 에피소드들도 있고 기억나지 않는 에피소드들도 있지만 다시 만나본 그녀의 이미지와 대화문 그리고 상황들은 나를 촉촉한 감상에 젖게 만든다.
“ 내 이름은 코델리아야. 코델리아 피츠제럴드 공주지.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긴 드레스를 입고, 가슴엔 진주로 만든 십자가를 걸고 있어. 머리엔 진주 핀을 꽂고 있지. 내 머리카락은 깜깜한 밤처럼 새까맣고, 피부는 투명한 상아처럼 아주 하얗게 빛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