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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
짧지만 임팩트있는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집 <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 을 읽었다. 제 9회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임성순 작가님의 첫 소설집이다. 첫 단편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만큼 가독성이 높고 몰입이 잘 되는 글이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쓰레기 매립지, 칠흑같은 미술 전시장 속 그로테스크한 전시물들, 버둥거리는 분홍빛 피부의 새끼쥐 등등....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시각, 청각, 후각이 한꺼번에 가동되었다.
이 소설집을 이루는 단편들은 매우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져 있다. 실소를 머금게 하는 블랙 코미디에서부터, 절망과 우울감을 일으키는 디스토피아 그리고 웬지 어디서 본 것 같은 패러디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해서 지루할 틈 없는 구성이다. 그는 각 이야기를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며 잔인할 정도로 날카로운 농담을 날린다.
첫번째 작품 몰 沒. 쇼핑장소를 뜻하는 영어 mall 과 잠긴다는 뜻의 몰. 주인공은 한 백화점 붕괴사고의 잔해에서 누이의 손 같은 고운 손을 건져올린다. 그러나 제때 건져내지 못하여 사람은 없고 손만 남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나, 결국엔 바다에서 건져내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글.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 무너진 쇼핑몰을 쓰레기장에 버리는 놈들이 있는 나라니까, 그러니까 백화점이 무너지는 거야 "
두번째 작품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허세와 속물근성에 찌든 미술계를 고발하는, 진한 농담이다. 유명 미술 에이젼시의 대표도 결국 자본의 논리에 부합하는 장사치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하다. 결국 돈이 되는 미술, 예술이 먹힌다는 걸 강조하는 듯한 이야기. 죽음에 대한 공포도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 단, 돈이 된다는 조건하에서.
" 이것이 쇼든 현실이든 답은 늘 같았다. 모든 건 결국 돈의 문제였으니까 "
사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글은 바로 계절의 끝 이라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단편이었다. 우주적 재난이 일으킨 기상이변으로 인해 겨울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서서히 죽어간다. 지하철 역에 숨어든 주인공은 식량이 떨어지자 상상하기도 싫은 그 무언가를 먹으며 살아남는다. 거칠고 황량한 대재앙의 그늘에서 살아남은 여주인공,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돌아오지 못할 연인을 그리며 편지를 쓴다.
" 당신은 결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바다가 사막이 되고, 강물이 황무지가 되어도 당신은 오지 않습니다.
.... 저는 나지막이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
이외에도 출산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를 향한 고발인 줄 알았더니 갑자기 지옥에 대한 과학 이론이 등장해서 실소를 머금게 했던 < 사장님이 악마에요 >, 사랑에게 버림받고 자신을 쓰레기처럼 느끼는 남자 이야기 < 불용 >, 그리고 인간 가치를 높이려는 야욕 (?) 에 불타는 비밀결사단이 등장하는 < 인류 낚시 통신 > 등등... 책의 구성이 다양하고 알차서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선물 상자를 열어 본 느낌이다.
독창적인 구성과 흡입력있는 문장구사 그리고 뼈있는 농담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임성순 작가. 이 책은 문학성과 대중성, 두 가지를 모두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세태에 대한 묵직한 비판이 숨어 있으나 결코 무겁지 않고 재기발랄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으나 뻔하지 않은 구성으로 인해서 이야기들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재치있고 박학다식한 달변가의 토크쇼를 본 느낌!!! 임성순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할 것 같다. 또다시 잠 못 자는 밤이 찾아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