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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평점 :
" 화가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엄마 사이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난 미모의 여대생이 어느 날 아버지를 죽인 살해범으로 검거된다 "
다소 자극적인 이 문구가 무색하게, 이 책은 자신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찔러 죽인 한 살인마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일그러진 가족 관계 속에서 제대로 된 어른으로써의 성장을 하지 못한, 한 불안정한 여성의 자아찾기.. 에 관한 이야기 로 해석이 된다. 내 생각엔. 그녀의 자아찾기엔 여러 명이 함께 도움을 준다. 어려서도, 그리고 자라서도 자신을 지지해주던 어른이 부재했던 주인공 칸나. 이 사건이 있기까지 자신을 공격하는 무의식적 충동 ( 불안, 죄책감, 수치심 등등 ) 이라는 미로 속에서 눈이 가려진채 헤매고 있던 그녀.
주인공 20대 여성 칸나는 아나운서를 지망했던 전도유망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2차 면접을 앞두고, 갑자기 방송국을 떠난 그녀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의 여자 화장실에서 그를 흉기로 살해한다. 신문에 대서특필 될만큼 센세이셔널 했던 이 사건을 두고 한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려 하고, 임상 심리사인 유키에게 그 일을 맡긴다. 유키는 자신의 시동생인 가쇼가 국선 변호를 맡은 사건이라 흔쾌히 이 부탁을 승낙하고 카나와의 면담에 들어가는데....
사실 처음에 이 책을 읽어나갔을 땐 " 분노 " 라는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릴 적 부모의 학대에 가까운 방임과 잘못된 양육으로 인한 상처로 , 자신을 학대하며 팔에 자해행위를 했던 카나에 대해서 유키가 묻자, 이렇게 대답하며 냉담하게 반응하는 카나의 어머니.
" 그거 닭에게 공격받은 거잖아요 "
자신을 엄격하게 다루는 아버지의 말을 조금이라도 듣지 않으면 이런 얘기를 들어야했던 칸나.
" 호적에서 파버린다 "
부모란 사람들이 왜 이렇지? 결혼도, 출산도, 부모가 되는 것에도 면허증 발급이 필요하다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갈수록 이 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바로 칸나라는 구심점을 통해, 다른 주인공들의 심리도 함께 분석되고 해체된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가 담고 있는 성적인 시선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유키, 그래서 남자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그녀와 어릴 적 어머니에게 심한 학대를 받은 뒤, 사람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여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변호사 가쇼 등을 지켜보며, 문득 스스로에 대한 심리분석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건 뭘까? 양육되는 동안 받았을지도 모를, 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상처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소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왜 소설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지?
범인과 형사 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엄청나게 스릴 넘치게 다가왔다. 유키라는 한 진지한 임상 심리사와 피고인 사이에 벌어지는 집요한 정신 분석 과정.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고기의 꼬리처럼, 칸나가 왜 아버지를 살해하려하였는지는, 나올 듯 나올 듯 끝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칸나와의 면담과 편지... 그리고 주변인들과의 탐문. 제대로 된 답변조차 할 수 없는 약한 정신력의 칸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직감을 믿으며, 끝까지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그들. 유키와 가쇼.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칸나를 위한 책이다. 버려지고 부서진 채 구석에서 울어야 했던 작은 아이.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엔 여전히 그 아이를 품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흔들리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까?
과연 유키와 가쇼라는 팀은 칸나의 자아찾기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그녀의 결백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몰아치는 듯한 급박한 전개는 없지만 주인공들의 심리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해감으로써 독자들의 눈을 한시도 놓치지 않으려는 [ 퍼스트 러브 ]. 최근 봤던 소설 중 가장 의미있었던 소설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