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 메일
제프리 하우스홀드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여기에 끝없이 어딘가로 질주하는 남자가 있다. 누군가의 추적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나이. 위장술로 어찌어찌 몸을 숨겨보려하나, 집요한 적의 총공세로 인해 더 이상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살아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숲. 그는 한마리 동물이 되어 살아간다. 굴을 파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살쾡이와 친구를 맺는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은신처를 발견한 적과 대치하게 된 스파이.

 

주인공은 영국인 스파이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재자 암살 시도 끝에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여 손가락들이 망가지고 한쪽 눈이 실명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노련한 스파이답게 고문관들을 물리치고 빠져나온다. 사냥꾼이 사냥에 실패하면 도로 사냥감이 되는 법. 고도로 훈련된, 짐승의 본능과 민첩성을 가진 첩보요원이나 한순간의 실패가 모진 시련을 불러왔다.

 

이 책 로그메일에 등장하는 주인공 첩보요원은 존재감이 다소 희미하다. 일단 이름이 없다.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는 이 글에는,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그를 둘러싼 위협적인 외부세계만이 존재한다. 급박한 시간 속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 그는 도대체 누구이고 어떤 독재자를 쫓고 있었던 것일까? 독재자 암살의 명분도 없고 조국에 대한 사랑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쫓기는 사냥감의 동물적 감각과 집요하게 그를 쫓는 무리들. 아마 독재자 편이겠지.

 

도시의 인파 속에 묻히려던 그의 정체는, 그가 자신을 추격하던 누군가를 살해한 이후, 완전히 드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인파가 드문 시골까지 내려온 첩보요원. 좁은 오솔길에 들어와 굴을 파는 지경까지에 이른다. 굴을 파고 풀로 위장한 문을 만들어 몸을 숨기는 스파이.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숨어있는 그를 찾아낸 적들. 통로를 차단하는 압박 요법으로 점점 그를 코너에 모는데.....

 

책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친절함을 베풀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독재자는 누구인지, 시대적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드러나는 게 없다.

 

오직 " 나 " 라는 인물의 " 생존 " 을 향한 치열한 몸부림만이 보일 뿐이다. 치밀한 묘사로 인해, 독자들은 그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동굴 입구를 막아버리는 적군들 앞에서 이제는 주인공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냄새마저 맡을 수 있다. 오직 주인공의 도망과 적들의 추적으로 이루어지는 내용인지라, 독자들은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주인공과 함께 할 수 있다. 그가 갇혀있는 축축한 동굴 내부의 느낌, 산소가 모자라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갑갑함, 죽음을 앞에 두고 과거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느릿느릿한 독백의 처연함까지.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보니 저렇게는 살 수 없겠다 싶다. 억만금을 준다해도. 걷는 내내 뒤돌아봐야하고, 나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한다. 나중엔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의심이 된다. 조국을 위해서도 아니고 도대체 명분이 없는 암살자의 삶. 왜? 그렇게 살까? 그 아래 뭔가 있을리라는 나의 생각은 박살이 나고만다.

 

로그메일은 처절한 한 남자의 생존기이다. 감정이 끼여들 틈이 없다. 죽음이 코 앞에 있는 상태에선 생각을 해선 안되고 감정을 느껴서도 안된다. 오로지 삶을 향해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게 다소 힘들었다. 주인공이 긴장하고 불안에 떨때마다 독자들도 함께 했기때문.  같이 도망다닌 것 처럼 근육이 욱신거린다.

 

한마리 고독한 늑대의 이야기이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나만 믿어야 하는 외로운 스파이의 운명. 순간 번뜩이는 기지와 재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이나마 진짜 첩보요원이 된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007처럼 멋있게 암살에 성공한 스파이 이야기가 아니다. 암살에 실패한 뒤 도망다니는 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떤 첩보영화나 소설보다도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넘친다. 위기의 순간마다 땀을 쥐게 만드는 첩보소설 속으로 빠쳐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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