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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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침묵은 슬픔을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는 듯한 책을 만났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과 부모님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어도 침묵하는 주인공. 그의 진한 슬픔은 천천히 차오르는 잔 속의 물처럼 찰랑거리다가 마침내는 책장 밖으로 흘러나와 독자의 가슴을 때린다. 이 글의 주인공은 어느 지역에 가든 꼭 한 명씩 있는 불행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는 슬픔을 겪는다. 교통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된 어머니와 도박판을 벌였다는 혐의로 직장을 잃게 된 아버지. 막막해진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하고 곧이어 어머니도 하늘나라로 가게 됨으로써 작가는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남게 된다. 형제도 없이 혼자 살아가게 된 주인공.

그러나 불행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주인공의 삶에 한줄기 빛이 스며든다. 그녀의 이름은 추쯔.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공간도 없던 캐노피 아래에서 굳이 자리를 만들어주던 그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족의 정을 느끼는 주인공. 그는 사랑에 빠져버린다.

" 한 여자가 캐노피 밑에서 손을 불쑥 뻗더니 손가락을 구부렸다. 마치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가족을 보고 어떻게 해서든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처럼 ."

어둡고 쓸쓸했던 삶의 한 언저리에서, 빛을 발견하게 된 그는 그때부터 그녀와의 행복한 삶을 꿈꾸게 된다. 그리곤 어떻게든 성공을 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건설회사에 들어가, 회장님의 2인자로 승승장구하던 어느날,,,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불행.

취미로 사진을 배우게 되었던 추쯔는 뤄이밍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사진 교실에 다니게 된다. 현실이 놓은 덫에 걸리게 되는 주인공과 추쯔....... 건설회사에서 벌인 사업으로 인해, 주인공은 마침 돈이 필요했고, 그런 주인공을 위해서 추쯔는 은행가였던 뤄이밍을 찾아간다. 그리곤 하지 말았어야할 선택을 하게 된다. 그걸 알게 된 주인공의 절망은 폭력적인 행위로 드러나게 되고, 그 순간 추쯔는 주인공의 곁을 떠나버린다.

하나뿐인 사랑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과 추쯔를 갈라놓은 뤄이밍이 살고 있는 장소로 들어가 조그만 카페를 차리게 된다. 그러면서 매일 그녀를 기다린다. 추쯔의 흔적을 발견하기만을 기다리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뤄이밍의 딸인 뤄바이슈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지난 과오를 자신이 속죄라도 하려는 듯 매일 찾아와 사과를 하는데......

작가 왕딩궈의 표현법이 독특하다. 이 글에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추쯔와 뤄이밍은 한번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주인공과 뤄이밍의 딸인 뤄바이슈의 대화 속에서 혹은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회상 속에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모습은 웬지 안개 낀 새벽 거리를 걷는 사람들 같다.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거기에 있다. 주인공에게 고통을 안겨준 과거의 잔상 그대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읽히는 소설이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보이는 잔잔함 속에는 누군가의 심장을 할퀴어내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자리잡고 있다. 일생 일대의 사랑을 잃고 헤매는 한 남자의 이야기. 그는 평생의 사랑을 찾았으나 또 한순간 잃고 말았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희열과 기쁨이 왔다 싶으면 또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있는 불행. 작가 왕딩궈는 매우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한 남자의, 어쩌면 너무도 비극적인 인생을 매우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 맑게 갠 하늘도 언젠가는 구름이 피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도 시드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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