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윌버의 일기 - 통합심리학의 대가 켄 윌버, 그의 이야기
켄 윌버 지음, 김명권, 민회준 옮김 / 학지사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켄 윌버. 이 신비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뭐라 규정할 수 있을까? 흔히 통합심리학자, 통합이론가로 알려진 그는 자연과학(과학)과 인문과학(종교), 서양과 동양, 육체와 정신(영혼) 사이의 대통합을 추구하는 이론가이자 영적 탐구자이다. 그의 최초의 책 <의식의 스펙트럼>의 대중적 요약본이라 할 수 있는 <무경계>가 국내의 자아초월 심리학 전공자와 선, 명상, 요가 수행자 사이에 공통으로 유행했었다.

 

그의 아내였던 트레야와의 운명적 만남에서 유방암으로 사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만큼이나 <켄 윌버의 일기> 역시 이 무시무시한 사상가, 깨달은 학자(판디트)의 내면과 인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책이다.  1997년 1월부터 12월 말까지 1년간의 일기 기록을 통해 이 사람의 일상은 물론 그의 주변 친구들, 미국을 중심으로 과거 종교의 어둠에서 과학의 조명 아래 새롭게 등장하는 영성과 관련된 다양한 이론과 그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한 기술을 접할 수 있다.

 

그를 중관철학의 완성자 용수 보살에 비한다거나, 선과 화엄을 회통시킨 규봉 종밀에 빗댄다면 어떨까? 학자라고만 하기엔 어딘가 구루의 냄새가 강하고, 구루라고 하기엔 학자적 풍모가 강한 그. 너무나 거대한 스펙트럼을 가진 그인 만큼 그는 그를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오독되고 오해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일미(一味, One Taste)'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골치아픈 이론적인 이야길랑은 훌훌 건너 뛰고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기록들...

 

일미에 대해 정말로 이상하고 근본적으로 모순된 점이 있다. 결코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거나 그것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일미를 알았다. 문자 그대로 150억 년 동안 우리는 그것을 알았고 곧 언젠가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 위대한 탐색은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상태도 일미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영원함을 지니는 공(空), 모든 무한함에 이르는 완전함. 단지 이것, 이것뿐이다. 이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고 그 때문에 아는 데 보통 평생이 걸린다. 너무 가까워서 손에 쥘 수 없고, 너무나 힘들지 않아 손이 닿을 수 없고, 존재하고 있어서 얻을 수가 없다. 부처는 결코 이것을 얻지 않았다. 지각 있는 존재는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누가 이것을 믿을 것인가?

 

내가 일찍부터 이 사람을 의심했었다. 특히 둘째 문단의 내용만 보면 라마나 마하리시나 마조나 임제의 말이라 해도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은 또 어떤가?

 

일미를 '의식'이나 '각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하다. 너무 성급하고 인지적이기 때문이다. 일미는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과 더 비슷하다. 우리는 이미 이 감각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실재하는 현존의 감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감각이나 체험과는 아주 다르다. 이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은 오거나 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시간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고 해도, 그 자신의 감각을 구성하는 조직의 하나처럼 그것은 전혀 시간 안에 있지 않다.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은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체험이 오가는 광대한 개방성이자 모든 지각이 움직이는 무한의 광활함이며, 그 스스로의 유희의 형태가 그 안에서 일어나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가는 위대한 영이다. 작은 자아가 모든 공간의 광대한 확장 속에서 풀릴 때 우리 스스로의 나-나다.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은 현존의 꾸밈없는 감각이자 일미의 꾸밈없는 감각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그렇지 않은가?

 

(중략) 영은 현존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체험 속에서 항상적인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 아주 조심스럽게 바라보면 빅뱅 이후와 그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깨닫게 될 것은,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 그 자체, 미묘하고 항상적이며 배경이 되는 의식이다. 우리가 그때부터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느낌이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인 이 무한한 순간 속에 우리가 진실로 시간 앞서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 또 언제나 항상 지금.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인식하게 된 문제의식은, 오매일여(悟昧一如)를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느냐다. 이 책에 기록된 켄 윌버의 개인적 체험에 의하면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꿈도 없는 깊은 잠의 상태 모두에 동일하게 항상적인 의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전 성철 스님의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에 대한 언급을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내지는 오해라고 치부했었는데, 정확히 말해서 아직 나 자신이 이 오매일여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대혜 스님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한 동안 씨름했다는데 과연 난관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이 의식 말고,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꿈도 없는 깊은 잠의 상태를 모두 관통하는 또다른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놀라운 일미는 어디에 있는가? 자, 누가 이 페이지를 읽고 있는가? 누가 그 눈 밖으로 보고 있는가? 누가 그 귀로 듣고 있는가? 바로 지금 누가 이 세계를 보고 있는가? 그 보는 자, 그 언제나 존재하는 주시자, 그것이 이 순간 그리고 모든 순간에 비이원적 계시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그대 자신의 즉각적인 참나다. 그대 자신의 참나로서 안식하라. 즉, 이 페이지와 이 방, 이 세계를 분명히 바로보는 것으로서 안식하라. 모든 세계가 일어나고 있는 광대하고 순수한 공(空)으로서 안식하라. 그러고서 세계가 그 참나와 하나가 아닌지를 보라. 주시자로서 꾸밈없이 안식하는 이 순간 주시자의 감각과 세계의 감각은 하나이며 같은 감각이라는 것에 주목하라("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을 때 종도 없고 나도 없고 그저 종소리가 있을 뿐이다."). 이 존재의 꾸밈없는 감각 속에서 그대가 바로 세계다.

 

보라! 단지 이것만이 있다. 

 

켄 윌버는 놀라운 텍스트다. 이제껏 분열되었던 육신과 정신, 영혼의 모든 단계를 통합하여 인간 의식의 최후 지점까지 이성적 탐구를 가하는 새로운 과학의 개척자이다. 누가 알겠는가? 앞으로 1~2백 년 후엔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깨달음의 이론과 실제' 내지는 '비이원적 의식 상태'를 과학 시간의 실험 과제로 다룰 날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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