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 가장 쉬운 깨어남의 길
레너드 제이콥슨 지음, 김상환.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이비(似而非)란 말이 있다. 비슷하지만 아니란 뜻이다. 진리에 대한 언급으로 가장 훌륭한 것은 침묵이다. 그러나 침묵을 진정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역사상 수많은 현자들이 진리에 대해 불가피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진리를 설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온전히 '하나' 또는 '둘 아님'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둘'의 입장에서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첫째 방식의 스승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바로 그것이다." 또는 "뜰 앞의 잣나무!" 이런 식으로 답하는 것이다. 같은 질문을 둘째 방식의 스승에게 묻는다면, "깨달음이란 환영과 같은 에고의 상태에서 벗어나 둘 아닌 하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보통의 경우 두번째 방식이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우리가 '둘'의 입장, 이원성의 세계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첫번째 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불친절하다거나 비이성적이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진실로 진리를 직접 경험함에 있어서는 첫번째 방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두번째 방식이 접근하기 쉽고 이햐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으나 원래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을 먼저 둘로 나눈 이후에 하나로 합쳐가는 방식을 따르는 한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념상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레너드 제이콥슨이 <현존>이란 책에서 전달하는 가르침이 바로 그러하다. 에고가 지배하는 '마음의 세계'와 우리의 진정한 존재인 '현존의 세계'를 나눠 놓고 마음과 에고의 속박에서 차츰차츰 현존의 영역으로 여행해 간다는(이 책의 원제는 'Journey into NOW'다.)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철길의 선로와 같이 영원히 평행할 뿐 하나로 만나지는 못한다. 저 지평선 끝에서 하나로 만날 것 같은 희망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여행일 뿐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심리치유의 기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진리로 이끄는 대다수 서양인 스승들이 가지는 한계다. 동서를 떠나 많은 현대인들이 심리적 외상에 의한 정신적인(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적인 문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방식의 치유 기법들이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증상에 따른 대증요법만으로는 근원적인 인간존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서양의 영적 지도자들 대부분이 심리학의 한계에서 영적인 영역으로 진입해 온 사람들이란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레너드 제이콥슨의 가르침에도 귀담아 들을 만한 진리의 편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많은 구도자들의 눈을 멀게 할 독(毒)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현존>의 7장 '영혼의 여행'에서 언급되는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와 마지막에 첨부된 '나의 깨어남'이란 자신이 영적 체험에 대한 기록은 그의 진리에 대한 순도(純度)를 결정적으로 의심케 한다. 책 속에 언급된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대 그는 약간 영매와 같은 특이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닌가 한다.

 

수련회 참가자를 앞으로 불러 의자에 앉힌 뒤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든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만나게 한다든지 하는 대목을 보면 그런 추측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깨어남의 체험에도 너무나 많은 이미지, 환상들이 등장한다. 말로는 '현존'이니 '하나임'을 말하지만 가만히 문맥을 보면 여전히 '마음의 세계'와 '현존의 세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영적 지도자 가운데 레너드 제이콥슨보다는 에크하르트 톨레가, 에크하르트 톨레보다는 아디야샨티가 훨씬 안목이 분명한 지도자인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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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o 2020-01-02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유의 철학적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석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종합적 방법입니다.전자가 분리된 결과들을 연결 시키면서 진리를 찾는 것이라면 후자는 일의성의 세계 즉 진리로 부터 결과들이 따라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님 역시 후자의 방식 속에서 진리를 찾을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합적 방법은 분석적 방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합적 방법은 분석적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시작은 언제나 분리된 세계로 부터이지 진리 그 자체로 부터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유전적 정보와 기억정보라는 외재적 관념에 의해 구성된 세계 속에 있고 그 세게로 부터 사유를 시작합니다. 바로 이 시작으로 부터 종합적 방법이라는 진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가 진리를 실천하는 방법의 핵심입니다. 하여 저는 어쩌면 진리로 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다라는 님의 낭만적인 생각이 오리려 구도자들의 눈을 멀게하는 독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