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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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동물 농장 -조지 오웰]

 내 생에 최초이자 마지막 속셈 학원 책장 한 구석에서 발견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대여를 빙자, 결국 몇년 동안 우리집에 머물렀다. 좋게 말해 좀 오랫동안 빌린 것이지 실지로는 갖다주는게 귀찮았던것 같다. 당시 그 책은 (출판사까지 생각나지 않지만) 조지 오웰의 젊은 시절의 경험담을 담은 단편 하나와 동물농장이 묶여 있던 책으로 다행스럽게 완역본이였다. 어린이를 위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들어가며 훼손시킨 고전들이 얼마나 많던가. 사실 좀 어렵더라도 고전은 그 자체로 마주했을때 참 맛이 나는 법이다. 아이들의 수월한 독서를 위한 의역이란 말은 암만 돌려봤자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럼 원어를 배워 직접 읽는 기쁨을 누려라 하는식의 태클은 미리 거절한다.)

 각설하고, 완역본이라 해도 어차피 동물 우화 형식을 취한 동물농장은 당시엔 어렸던 나에게도 술술 읽혔다. 어디까지나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인 표현으로만 이루어진 재밌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열 받는 개소리였다. 부당하게 군림하는 인간으로 부터 모든 동물의 평등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분노하여 일어난 혁명은 결국 돼지라는 좀 더 영악한 무리의 (어찌보면 인간보다 더 악독한)지배자를 양산해냈을 뿐이다. 얼마나 허무하고 화딱지 나는 일인가. 평등에 등급을 나누는 순간부터 이미 평등은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가. 결국 이상은 현실에선 이뤄지지 않는 뜬구름인가?

 꼬맹이, 그때의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였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답을 찾아 보려 애썼던 것 같다. 완벽한 이상처럼 보였던 동물들의 봉기가 어디부터 틀어졌는지에 대해도 곰곰히 생각했고 당시 심취해있던 (애늙은이) 염세주의에 폭 빠져 궁극적으로 세상은 빌어먹게 생긴 것이니 하는식의 건방진 결론을 내려버리고 의기양양에 빠지기도 했다.

동물 농장이 우화이기 이전에 [타락한 독재정권]에 대한 정치풍자소설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였고 개기름 흐르는 돼지새끼들이 소비에트를, 답답할 정도로 복종밖에 모르는 농장 식구들이 프롤레타리아트(노동계급)을 상징한다는 말을 듣고는 정신이나마 잠시 지구를 탈출하는 컬쳐쇼크를 경험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왜 그리 야속하던지. 무지한 시절의 독서는 그야말로 수박 겉만 핥고 버린 꼴이다. 좌우당간, 좀 돌긴 했지만 동물 농장은 나에게 실랄한 풍자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날카롭고 무정한 것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결국 권력 자체만을 목적에 둔 혁명은 또 다른 독재자를 낳을 뿐, 대중이 깨어 있지 않는 한 혁명은 성공하지 못하는 법이다. 여론에 휩쓸려 부잡스럽게 자리를 바꾸는 자각 없는 대중이 있는 한 이상은 꿈결에서나 들리는 노랫소리일 뿐 짖어댈줄이나 아는 일부 높은 분들의 권력놀음에 놀아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무얼 배반당했는지도 모르는 동물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얼마나 우스운가. 풍자란 무뎌진 대중의 안일함을 이토록이나 날카롭게 후벼파는 것이였다. 뭐 그런 생각에 한동안 분해서 그동안 살아온 세월에 배신감마저 느꼈더란 이야기.

깨어 있지 않으면 대중은 또 다시 착취 당하고 버려질 뿐이다.

[불과 얼마전 대선에서 목 놓아 부르짖던 사람들이 금새 무관심해지는 모습은 차라리 섬뜩하다] 이상은 권력이라는 달콤한 꿀단지가 개입 하면서부터 변질되고 똑똑한 자는 덜 똑똑한 자들을 속인다. 동물 농장의 돼지들이 마지막에 덧 붙인 문장처럼,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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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하우스 - 평범한 하루 24시간에 숨겨진 특별한 과학 이야기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27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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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정말 진도 안나간 책이다.
첫 장을 펼쳐 들었을때만 해도 휘리릭, 읽어치우고 다른 책을 집어 들 수 있으려니, 가벼운 마음이였지만
시작의 기세는 책의 절반을 넘어갈 무렵 똑 떨어져버렸다.
그때부터 툴툴 거리기 시작해 결국 삼일을 질질 끌었으니,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책 앞머리에 친절하게 달린,
발간에 앞서|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인류는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기술 발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학기술은 인류의 미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지만 핵폭탄, 환경오염에 따른 상태 파괴, 합성물질의 위협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칫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시리즈는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숨쉬고 살아 있는 공학의 실제 모습을 담고자 시획했습니다. 이는 실제 우리의 삶에 가장 밀접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던 공학을 대중들이 편안하고 가깝게 느끼도록 하기 휘한 것입니다.
라는 설명에 걸맞는 책이다. 평범해 보이는 한 집안에서 하룻동안 벌어지는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해 다룬 '시크릿 하우스'는 식탁 위에 살고 있는 세균들, 카펫과 이불 속에서 각질을 먹고 사는 진드기들, 습관처럼 먹고 마시는 먹거리들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 느끼지 못할 뿐 하루종일 내리는 전자비, 심지어 얼굴과 속눈썹에 살고 있는 생명들에 대해 다룬다.

 

인간의 눈이 가지는 한계 넘어의 것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는 주제다. 더구나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던 공학의 실제 모습을 담고자 기획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문장인가. 공학, 화학, 과학, 기타등등의 학들을 어렵게만 느끼는 일반인들에게 친절히 다가가고자 (서양의) 일반적인 주택에서의 하루를 얼개로 잡았으니, 저자의 노력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들을 쓰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중도'다.
정보와 재미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까다로운 독자들의 따가운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정보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면 넘어가지 않는 책장에 실망한 사람들은 등을 돌릴테고, 어느정도 지식을 갖춘 일부 독자들 역시 보다 전문적인 수준의 책을 찾을 것이다. 재미의 비중을 높이면 전자는 관심을 가질지 모르나 여타의 다른 문학작품들과 비교해 한참 떨어지는 재미만으로 만족하진 않는다. 데이비드 보더나스는 이 문제에 있어 꽤 탁월한 균형감각을 가진 듯 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예시들은 생소한 단어들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멀게 느껴지는 이론적인 문제를 다양한 사례가 갖는 이야기적 요소로 상쇄한다. 덕분에 신기한 지식으로 꽉 찼단 느낌을 주면서도 읽는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하는 책이 탄생했다.

문제는, 그 지식과 정보들의 효용성이다.


요즘은 바보상자가 참 똑똑해졌다. 그래봤자 멍청한 바보상자에서 좀 덜 바보스러운 바보상자로의 진화에 불과하지만 다양한 주제의 프로그램들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은 어떤까.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잡다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실제로 시크릿 하우스에 소개된 몇몇 장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의 확장에 지나지 않았다.

 

아토피를 일으키는 집먼지 진드기, 속눈썹에 붙어 살고 있는 독특한 종류의 진드기. 립스틱이나 비누의 재료들. 항생제들의 원료. 담배의 구성요소. 등등은 다른 매체를 통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들이였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다른이들 역시 완벽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이 책이 소개하는 몇가지 사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사례를 다루기 위해 짤막하게 이어지는 탓에 심도있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결국 식상하게 느껴지는 일부 사례들이 책에 맥을 끊는 주범이였다.

 

그 외에도 몇가지 사례는 지나치게 '아무렴 어때' 스럽다.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하루종일 내리는 전자비나 온몸에서 떨어져 내리는 각질, 나이론 스타킹을 삭게 하는 황하수소들에 대한 몇가지 에피소드들은 내가 아무리 특별한 목적을 갖고 읽는 책이 아니래도 심하다 싶다.
놀랍긴 하지만 그래서, 그러한 정보들을 어떻게 사용하란 말인가. 어디에서 말하고, 무엇과 대입하고, 어떻게 생각하라는거지? 저자가 앞에 있다면 '그래서요?' 라는 질문이 몇번이나 튀어 나갔을 것이다.

 

물론 얇고 다양하게가 모토인 듯 보이는 무수한 사례들 중에 몇몇은 머리를 치게 만드는 기발함을 갖고 있지만, (특히 면도와 감자칩에 대한 부분이 내 맘에 쏙 들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감질맛만 느끼다 말았다.

 

사람에 따라 어느정도 알고 있는 부분과, 신기하게 받아들이는 부분과, 그래서 왜? 싶은 부분이 다르겠지만 세 경우가 비율이야 어떻든 모두 들어있음엔 틀림없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시크릿 하우스는 여러 이유로 나와 그리 맞지 않는 책이였다. 나에게 공학은 새로운 발견이 아닌 그려려니 싶은 마음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경우에 따라서 어떤이에겐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여 놓는 계기와 같은 작용을 할 수도 있는 책이다. 일단 시작하는 의미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단 장점을 가졌으니 이 책을 계기로 공학을 좀 더 심도있게 다루는 다른 책들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신이 어느쪽에 속하는지는 직접 경험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시크릿 하우스를 한번 읽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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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온다 리쿠의 책 '흑과 다의 환상' 이예요.
표지의 그림이 독특하죠,

상의 표지 입니다.
숲을 걸어가는 네명의 사람.
리에코, 아키히코, 마키오, 세쓰코지요.

개인적으로 하권의 표지 그림이 더 맘에 듭니다.
활짝 피어있는 삼고의 벚나무..
책 중에선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나무죠,
일년에 세번 꽃을 피운다는 삼고의 벚나무는
마음에 걸리는게 없는 사람만 볼 수 있다고 해요
삼나무 숲에 벚나무라니, 꽃이 피었다면 눈에 확 띌텐데
어째서 봤다는 사람과 못 봤다는 사람으로 갈리는지..
전설 비슷하게 되어버린 삼고의 벚나무지요.

상과 하의 속표지입니다.
책을 읽지 않고 보았을땐 하권의 그림이 더 강렬하겠지만
(숲 속에 서있는 흰 옷의 여자, 으스스한 느낌이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상권의 그림이 더 끌립니다.
왜 인진 직접 확인하세요. 훗,

상에서 1부 리에코, 2부 아키히코,
하에서 3부, 마키오, 4부, 세쓰코,
이렇게 나뉘죠,
각자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매력적인 두 사람이죠,
리에코와 아키히코,

하지만 감정이입이 가장 깊이 된 인물은 세쓰코였어요.
처음엔 짐작도 못했던 의외의 역활을 완벽하게 소화했죠.
반면 마키오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타입..
내 주변에 있다면 괴롭혀줄거예요.

맘에드는 4부의 세쓰코 표지입니다.
중간부분이라 자꾸 페이지가 넘어와 손으로 잡고 찍었어요.

마키오의 속표지,
어쩌면 가장 서술적인 삽화인지도 몰라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생각나네요.

수수께끼와 과거로의 사색.
이 책을 한 문장으로 꼽으라면 여길 고르겠어요.

마지막으로 흑과 다의 환상에 대한 서평을 제블로그에 올려 놓았습니다.
부족한 점이 더 많은 글이지만, 사진과 함께 서평도 즐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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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lgray 2007-01-1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즐겁게 읽었어요. 지금 나온 온다 리쿠의 책을 다 읽었지만, 가장 마음에 오래 남는 책을 하나 고르면... 흑과 다의 환상인 것 같아요. 저는 리에코가 마음에 들던걸요.. ^^

夢猫 2007-01-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저도 처음엔 리에코에게 잔뜩 물들어버렸는데 나중에 등장한 세쓰코가 더 와 닿더라구요, 닮았다는 느낌 때문에 그랬을거예요,

푸른신기루 2007-01-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인지는 직접 확인하세요' <- 이런 말 쓰시면 또 지름신 내려오신단 말입니다~!! ㅜ.ㅜ 궁금함은 참을 수 없는 성격;; 사족이지만 손 예쁘시네요ㅋ 특히 손톱 부럽슴다;; 어릴 때 나쁜 습관 때문에 짧은 손톱이 된지라;;;

夢猫 2007-01-1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 말하는 게으른 손이죠, ㅎ 실제로도 게을러서..- _ -;; 일본소설, 여류소설, 좋아하심 지르셔도 절대 후회 안하실거예요, 저도 잘 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 그래도 무리가 되심, 조금 시간을 갖고 있다가 지르심이..ㅎ 많이 주문해놔봤자, 담달 허리나 휘고, 막상 많으면 훌훌 읽히지도 않더라구요
 
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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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 사요코, 흑과 다의 환상.

 

 

 

 

흑과 다의 환상을 읽는데 삼일이 걸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여섯번째 사요코를 읽었다.

 

흑과 다의 환상이 몇번이나 내 생각을 다른곳으로 이끌었다면 사요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케했다. 이 사실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단순히 흑과 다의 환상이 더 지루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흑과 다의 환상이 더 풍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쪽일까..?

 

둘 다 맞다.

사요코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창시절의 추억어린 경험들을 끄집어 내는
메타포일 뿐이다. 아름다운 급우를 동경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시기.
열 아홈살, 아이와 어른의 경계라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를 동시에 품었던 시기,
학교라는 테두리에 압박을 느끼면서도 교복을 입었단 이유로 어떤 행동도 용서 받을거라 믿는 호승심의 시기,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지금의 내 모습은 없었다.

미래는 막연했고 오히려 당시에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데 당혹감마저 느껴진다.

짧았고, 이미 필요없는걸 너무 많이 알아버린 상태론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때,
그렇기에 더 아름답게 미화되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열 아홉살의 학교,
사요코가 있는 곳이 바로 그 학교이기에 책을 읽으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심령현상, 불온한 분위기, 자꾸만 등장하는 미스테리들은 우리의 부푼 추억의 힘을 입어
여섯번째 사요코의 존재감을 확장시킨다.

 

이런저런 실상을 덜어내고 나면 남는게 무얼까.
누군가의 말처럼 영화 여고괴담을 닮은 이야기 뿐이다.
단지 그 이야기가 여고괴담보다 치밀하고, 그럴법할(그래서 실제적인) 뿐이다.

 

이 책에서 작가 온다 리쿠는 자신의 소녀적 감성을 뽐내듯 드러내고 있다.
부끄러운 기색도, 우쭐한 기색도, 회상에 잠긴 기색도 찾아 낼 수 없다.
온다 리쿠는 마치 아름다운 외양에 경외와 두려움과 권력까지 느끼고 마는
십대시절의 소녀로 돌아간 양 글을 풀어낸다.

 

덕분에 당시의 내가 어떤 소녀였는지 생각하며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뜨끔, 이나 잠시 멈춰 한 문장에 얽힌 기시감에 대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십대의 나는 이미 지나버렸으니까.
나는 더 이상 열 아홉살이 아니다.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온다 리쿠가 던지는 미스테리에 흠뻑 빠져 끝까지 그녀의 의도대로 몸을 맞기고 흘러간다.

십대 소년 소녀들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튀어나가 버릴 것 같은 분위기.
학교라는 막힌 공간에서 불안한 상태의 아이들 사이로 은밀히 퍼지는 괴담.
그걸 실현시키고 확장하는 작가의 손 끝,


충분히 재밌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하지만..

 

흑과 다의 환상에서와 같은 진득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빨려들듯 사요코를 단숨에 읽었고, 읽는 내내 재미를 느꼈지만
기분나쁘게 발을 걸며 생각을 강요했던 흑과 다의 환상 쪽이 더 끌린다.

 

사요코에서의 온다 리쿠라면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보기 좋구나' 여기고 말겠지만,
흑과 다의 환상에서의 온다 리쿠라면 눈을 마주하고 앉아 밤새 사치스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미 내 나이가 십대의 관문을 넘었기에 그러하다.
좀 더 일찍 사요코를 만났다면 그 나이대 아이들이 그러듯,
아름다운 사요코를 더 신비스럽게 여길 수 있지 않았을까..

 

덧붙여..

온다 리쿠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몇가지 단어들이 보인다.

아름다운 여성이 지닌 권력과 폭력성(자기 파멸욕구라 해도 상관없지만)

미스터리, 관계와 관찰자, 특히 관찰자는 온다 리쿠 자신의 특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등장한다.

그게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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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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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인상을 풍기는 책이다.
실제로 흑과 다의 환상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아직 베일을 덮여있다.

 

그 중에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가지와라 유리.

 

흑과 다의 환상은 크게 네 파트로 나뉘어 있다.
냉정하고 분석적인 리에코. 주연으로 타고 났지만 조연의 삶을 살겠다는 아키히코.
어딘가 중요한 부분이 단선된 마키오. 누구보다 정확한 세쓰코.

 

젊은 시절의 일부들을 함께한 중년의 네 남녀는 Y섬 여행을 한다.
여행을 추진한 아키히코는 '과거의 기억을 찾는 여행' 부제처럼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생각해 보자 제안한다.
결과적으로 네 남녀는 지나간 과거에서 서로에게 얽혀있던 복잡한 감정과 의문을 이 여행을 통해 풀게된다.

 

절묘하다 싶었던 점은 여행의 진행을 따라 네 사람의 시점이 변한 다는 것,

각각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된다.
처음 등장한 리에코는 그들 과거에 얽힌 인물 가지와라 유리와 대학시절 애인이였던 마키오 간의
수수께끼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분석적이지만 원치 않는 결론은 무의식 중에 차단한다'는 세쓰코의 말처럼
답은 내리지 못한다.

 

그녀가 제시한 수수께끼는 바톤을 이어 받은 아키히코의 유년시절 친구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로 이어지고
그 미스테리의 열쇠를 쥐고 있던 마키오에 의해 진실이 밝혀진다.
마키오를 친구로서 동경하고 사랑하던 아미히코와 그의 누나의 굴절된 사랑이 자아낸 한 소년의 희생.
어디까지나 가지와라 유리와의 직접적인 접점이 없던 아키히코 편에서 유리에 대한 미스터리는
몇개의 단편적인 사실로만 흰트가 될 뿐, 이야기를 궁극적으로 풀어 낼 사람은 마키오다.

 

마키오 편에서야 유리, 리에코, 마키오 세 사람을 둘러싼 의문이 모두 밝혀지고
아키히코와 리에코 모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마키오라는 인물에 대한 가닥이 잡힌다.
어찌보면 나머지 세명을 묶고 있는 가장 큰 연결고리는 마키오다.

 

흐름을 읽고 어느 무리에서나, 누구든 무리 없이 대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해설자 역활의 세쓰코는
조금씩 모난 세사람을 적당히 조율하고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는 관찰자적 인물이다.
외려 아키히코 보다도 유리와의 연결점이 없는 세쓰코는 그렇기에 이야기에서 제외될 법도 하지만
누구보다 세 사람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단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결국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는 사람으로 가장 적임자가 아니였다 싶다.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수수께끼를 푼다.

 

일인칭 시점 책을 접했을때 항상 드는 느낌은 지나친 끈적함이다.
본이 아니게 한 사람의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살피게 된다. 현실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 실현된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나 자신의 관음증적 욕구가 끈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온다리쿠의 스타일은 인물의 눈을 통해 바깥과 다른 인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게 아니라
인물 내면의 복잡하고 셈세한 방들을 뒤지는 식이다. 누구도 봐선 안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해부한다.

 

지나치게 입체적인 그녀의 인물들이 전개하는 일인칭은 그래서 더욱 곤란하다.
우리와 똑같이 과거속의 트라우마와 약한 부분을 간직한 그들의 마음속이 여과없이 들어나
감정이입 이전에 관음욕구까지 자극하는 것이다.

 

그만큼 온다 리쿠의 인물들은 실제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녀의 문장들은 때때로 섬뜩한 느낌을 준다. 어디선가 느껴본, 어디선가 떠올린 생각들이
활자가 되어 그녀의 책에 인쇄되어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녀 안에 이 많은 문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온다 리쿠는 작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낮선 곳으로의 여행.
익숙하지만 각자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 거리의 젊은 시절의 친구 셋과 함께 하는 여행.
마음 속에 묻어 두었던 젊은날의 의문들, 중년이 되어 이제사 마주할 결심이 든 무서운 기억,
일상에 ?겨 흘려버린 작은 미스테리들을 생각하는 사치, 이 모든것이 어우러져
네 남녀는 나름대로의 '극복'을 하고 여행의 끝과 함께 흑과 다의 환상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책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기를 남기고 있다.

 

그 수수께끼들은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에 발을 담그고 있다.


흑과 다의 환상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다 리쿠란 작가에겐
숨겨놓은 다른 부분이 더 많은것 같단 기분이 들기에, 보물찾기를 하고 싶기에, 상관없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복잡한 내면이 매력적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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