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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인상을 풍기는 책이다.
실제로 흑과 다의 환상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아직 베일을 덮여있다.
그 중에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가지와라 유리.
흑과 다의 환상은 크게 네 파트로 나뉘어 있다.
냉정하고 분석적인 리에코. 주연으로 타고 났지만 조연의 삶을 살겠다는 아키히코.
어딘가 중요한 부분이 단선된 마키오. 누구보다 정확한 세쓰코.
젊은 시절의 일부들을 함께한 중년의 네 남녀는 Y섬 여행을 한다.
여행을 추진한 아키히코는 '과거의 기억을 찾는 여행' 부제처럼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생각해 보자 제안한다.
결과적으로 네 남녀는 지나간 과거에서 서로에게 얽혀있던 복잡한 감정과 의문을 이 여행을 통해 풀게된다.
절묘하다 싶었던 점은 여행의 진행을 따라 네 사람의 시점이 변한 다는 것,
각각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된다.
처음 등장한 리에코는 그들 과거에 얽힌 인물 가지와라 유리와 대학시절 애인이였던 마키오 간의
수수께끼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분석적이지만 원치 않는 결론은 무의식 중에 차단한다'는 세쓰코의 말처럼
답은 내리지 못한다.
그녀가 제시한 수수께끼는 바톤을 이어 받은 아키히코의 유년시절 친구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로 이어지고
그 미스테리의 열쇠를 쥐고 있던 마키오에 의해 진실이 밝혀진다.
마키오를 친구로서 동경하고 사랑하던 아미히코와 그의 누나의 굴절된 사랑이 자아낸 한 소년의 희생.
어디까지나 가지와라 유리와의 직접적인 접점이 없던 아키히코 편에서 유리에 대한 미스터리는
몇개의 단편적인 사실로만 흰트가 될 뿐, 이야기를 궁극적으로 풀어 낼 사람은 마키오다.
마키오 편에서야 유리, 리에코, 마키오 세 사람을 둘러싼 의문이 모두 밝혀지고
아키히코와 리에코 모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마키오라는 인물에 대한 가닥이 잡힌다.
어찌보면 나머지 세명을 묶고 있는 가장 큰 연결고리는 마키오다.
흐름을 읽고 어느 무리에서나, 누구든 무리 없이 대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해설자 역활의 세쓰코는
조금씩 모난 세사람을 적당히 조율하고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는 관찰자적 인물이다.
외려 아키히코 보다도 유리와의 연결점이 없는 세쓰코는 그렇기에 이야기에서 제외될 법도 하지만
누구보다 세 사람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단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결국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는 사람으로 가장 적임자가 아니였다 싶다.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수수께끼를 푼다.
일인칭 시점 책을 접했을때 항상 드는 느낌은 지나친 끈적함이다.
본이 아니게 한 사람의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살피게 된다. 현실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 실현된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나 자신의 관음증적 욕구가 끈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온다리쿠의 스타일은 인물의 눈을 통해 바깥과 다른 인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게 아니라
인물 내면의 복잡하고 셈세한 방들을 뒤지는 식이다. 누구도 봐선 안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해부한다.
지나치게 입체적인 그녀의 인물들이 전개하는 일인칭은 그래서 더욱 곤란하다.
우리와 똑같이 과거속의 트라우마와 약한 부분을 간직한 그들의 마음속이 여과없이 들어나
감정이입 이전에 관음욕구까지 자극하는 것이다.
그만큼 온다 리쿠의 인물들은 실제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녀의 문장들은 때때로 섬뜩한 느낌을 준다. 어디선가 느껴본, 어디선가 떠올린 생각들이
활자가 되어 그녀의 책에 인쇄되어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녀 안에 이 많은 문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온다 리쿠는 작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낮선 곳으로의 여행.
익숙하지만 각자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 거리의 젊은 시절의 친구 셋과 함께 하는 여행.
마음 속에 묻어 두었던 젊은날의 의문들, 중년이 되어 이제사 마주할 결심이 든 무서운 기억,
일상에 ?겨 흘려버린 작은 미스테리들을 생각하는 사치, 이 모든것이 어우러져
네 남녀는 나름대로의 '극복'을 하고 여행의 끝과 함께 흑과 다의 환상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책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기를 남기고 있다.
그 수수께끼들은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에 발을 담그고 있다.
흑과 다의 환상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다 리쿠란 작가에겐
숨겨놓은 다른 부분이 더 많은것 같단 기분이 들기에, 보물찾기를 하고 싶기에, 상관없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복잡한 내면이 매력적인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