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까운 사람들과 만났을 때 벌써 몇 번을 반복했던 이야기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기 전에 우선 내가 '우울하다'는 말을 비교적 자주 하는 편이라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우울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라고 하기보다 자주 뇌까린다고 하면 그 느낌을 상상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그 날 오후에도 나는 '또 한 번' 꽤 우울하였다. 그런데 평소에 우울했던 것과는 뭔가 조금 달랐었다. 정확히 무엇이 다른 것이었는지는 그 날 집에 와서 보온 밥솥에 저장되어 있는 밥을 그릇에 담아 물김치와 함께 먹고 나서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우울했다기보다는 배가 고팠던 것이다.

한참 속력이 붙어서 열심히(=억지로) 일할 때는 자주 식사를 건너 뛴다. 그럴 때는 뭔가를 먹으면 오히려 더 탈이 나기 때문에 탈난 것을 수습할 자신이 없을 때는 아예 원천을 봉쇄한다는 생각으로, 내 육체가 나의 적이 되면서 나는 그에게 저항하여 에너지 공급 중단을 불사하는 것이다.

(진정하고)

퇴근 무렵에 P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때는 P가 막 회의에 들어가는 참이라고 해서 통화를 못하고, 익히 예상했듯이 이번에는 내가 집에 와서 한참 저녁을 먹는 와중에 다시 P의 전화를 받았다. 결과 : P가 또 기다려야 했다. 어쨌거나 마지막 접선 시도는 유효해서 최초 발신자였던 내가 우선 이런저런 얘기를 포석 깔듯이 읊다가, "사실은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어." 했더니, P도 돌연 긴장하면서 수화기에 바짝 귀를 대는 느낌이 전해진다. 그래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아서 다시 이리저리 몇 바퀴 돌다가 P에게 용기를 내서 말해버렸다.

"나 아이팟 사줘." 

그 다음에는 잘 기억이 안난다. P가 "그렇구나. 아이팟이 없지."하면서 끌끌 웃었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음악도 나 대신 넣어줘." 했더니 다시 또 얌전하게 알았다고 하면서 "그런데 무슨 색깔?"한다.

타인에게 완전히 순수하게 나 자신만을 위한 무언가를 해달라고 한다는 것은(더군다나 입밖으로 낸다는 것은) 마음조차 먹어본 적 없다. 그것이 부탁이라는 것조차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방식으로 부탁할 줄 아는 동기들을 나는 얼마나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았던가? 태어난 이후 적어도 내 기억이 닿는 범위 안에서, 이렇게 원초적인 방식으로, 거두절미하고, 마치 맡겨 놓았던 내 물건 찾는 사람처럼 뭘 해달라고 해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우울했다기보다는 P가 사준 아이팟이 갖고 싶었던 것이다. 마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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